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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페티시가 보여-449화 (44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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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tnfvh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D

친구들

서주환은 그 후로도 정하연과 몇 번이나 관계를 더 가졌다.

그리고 완전히 행위가 끝났을 때.

예정된 등짝 스매싱을 당해야만 했다.

짜악! 짜아악! 쫘아아악!

욕실 안에서 찰진 소리가 메아리쳤다.

서주환은 손을 뒤로 넘겨서 등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끄어어억! 아, 아파! 하연아, 진짜 아파! 어억!”

“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내가 밖에 싸라고 했지! 그런데 이게 뭐야!”

한바탕 소리친 정하연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샤워기를 연신 음부에 뿌렸다. 부끄러움 따위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간 상태. 지금은 아무리 긁어내도 끝을 모르고 나오는 정액 덩어리만이 문제였다.

“어떡할 거냐고, 이거…….”

얼마나 싸지른 건지 샤워를 마쳤음에도 정액이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다리가 조금 벌어지기만 하면 툭툭 떨어지는 백탁액 때문에 욕조에 들어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서주환은 머쓱한 표정으로 눈꼬리를 긁적였다. 정하연은 임신하면 어떡하지라는 얼굴로 울먹이고 있었으나 실상은 완벽하게 피임이 된 상태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납득시킬 방도가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었다.

‘나는 맨날 보던 장면인데.’

그간 아이템을 사용해서 관계를 가진 후 매일 저런 식으로 정액을 씻어내던 정하연이다. 그에겐 아주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아이템으로 인한 인지부조화를 설명해줄 수도 없는 노릇.

그는 이내 정하연의 손을 잡고 욕조로 끌어당겼다.

“하연아, 그냥 들어가자.”

“…계속 나오는데? 물 위에 둥둥 떠다닐 걸.”

“괜찮아. 내가 싼 건데 뭐.”

“씨.”

문득 또다시 화가 솟구친 정하연이 입술을 깨물며 눈을 흘겼다.

서주환은 뜨끔한 얼굴로 얼른 그녀를 욕조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제 무릎 위에 올려놓은 후 뒤에서 몸을 꽉 끌어안았다. 애정표현이 아니라 때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꼼수였다.

정하연은 뒤늦게 자신이 속박당한 것을 알아채고 욕설을 내뱉었다.

“죽을래? 이거 안 놔?”

“아잉, 하연아.”

“아잉은 얼어 죽을. 그 덩치로 어따 애교야? 징그럽게.”

“언제는 귀엽다면서?”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정하연이 했던 말이다.

서주환이 실실 웃으며 따박따박 대꾸하자 정하연이 이를 드러냈다. 당장에라도 그의 팔뚝을 물어뜯을 듯한 기세였다.

서주환은 기겁해서 그녀를 놓아줬다.

“네가 너구리야? 왜 물어뜯으려고 그래.”

“왜, 난 고양이니까 할퀴어줄까? 콱 씨.”

“헐. 자기가 자기더러 고양이래.”

“뭐? 네가 고양이라매!”

정하연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서주환은 낄낄거리며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무척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정하연이 탁 하고 그의 손을 내쳤다.

“어딜 만져? 거짓말쟁이가.”

“왜. 만지게 해준 댔잖아.”

“흥. 내가 언제?”

“복수 안 하는 대신 가슴 만지게 해준다면서?”

이 말 또한 그가 취해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다.

정하연은 그가 자꾸만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역시 처음부터 깨어있었지!”

서주환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아닌데요? 그냥 갑자기 떠올랐는데요?”

“아, 재수 없어!”

“쓰읍. 요게 서방님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쓰읍? 쓰으읍? 서방님, 진짜 뒤지고 싶으세요? 그리고 약속은 네가 먼저 어겼어요.”

그리 말한 정하연이 물에 둥실 떠오른 정액덩어리를 욕조 밖으로 밀어냈다. 욕조물이 넘쳐흘렀다.

서주환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꿍시렁댔다.

“중간부터는 자기도 즐겼으면서…….”

한 번 질내사정을 허락한 정하연은 그 뒤로 이성을 잃은 듯 자제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에게 질외사정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쾌락을 즐긴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억지로 밀어붙인 서주환이 당당하게 할 말은 아니었던지라 정하연의 두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뭐야? 다시 말해봐.”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님.”

“마님? 웃기고 있네. 좀 전엔 네가 서방님이라면서. 다시 말해보라고요, 서방님. 오늘에야말로 진짜 죄다 꺾어버릴라니까.”

“사랑합니다, 마님. 돌쇠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이게 지 불리할 때만 사랑한대. 아이씨, 진짜. 내일 당장 피임약 받으러 가야겠네. 지가 진짜 돌쇠야 뭐야.”

서주환은 투덜대는 정하연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피임약 안 먹어도 되는데.’

하지만 역시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입 밖으로는 생각과 다르게 말했다.

“같이 가자. 나도 따라갈게.”

정하연이 그 말에 째릿 노려봤다.

“너 구독자 오십만이 넘은 위튜버야. 동네방네 어그로 끌 일 있니?”

“벼, 변장하고 가면 되지. 어떻게 널 혼자 보내.”

“흥.”

정하연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기분은 조금 풀어진 듯 보였다.

“혼자 다녀올 테니까 그냥 있으세요, 서방님. 원래 피임약은 생리불순 때문에도 처방받는 거예요.”

“그래도 같이…….”

“쓰으읍. 기분 풀렸으니까 그만해라.”

“네, 마님.”

서주환은 짐짓 비굴하게 손을 비비면서 대답했다. 이내 화가 풀린 정하연이 참지 못하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

목욕을 마치고 나온 정하연은 먼저 침대에 누운 서주환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신기하다는 듯 콕콕 자지를 찔러보았다. 평소의 쇠기둥 같은 딱딱함 대신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뭐하느냐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주환에게 말했다.

“너도 작아지긴 하는구나?”

“엉? 무슨 당연한 소리를 그런 표정으로 해?”

정하연은 도리어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난 이렇게 말랑말랑한 거 본 적이 거의 없거든? 넌 항상 처음부터 딱딱해져 있잖아.”

“그랬던가? 아닌데. 입으로 세워달라고 한 적도 있는데?”

“…다른 여자랑 착각한 거 아니야?”

정하연의 눈이 순간 싸늘해졌다.

서주환은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있었어! 아, 그때도 반은 커져 있었어. 완전 시든 게 아니라서 기억 못하나 보다. 틀림없어.”

“흐음… 그런가?”

이내 정하연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주환은 한 차례 위기를 넘기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하연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응? 뭔데?”

“오늘…이 아니라 어제지 이제. 아무튼 어제 아침에.”

“응.”

“나한테 그, 누구 임신시킨 거 아니냐고 물었었잖아.”

“…설마?”

정하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주환은 재빨리 부정했다.

“아니야!”

“킥킥. 농담이야. 아무튼 그게 왜?”

“어휴. 그때 네가 언급한 이름들이 좀…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야? 소라 누나는 그렇다 쳐도 미화랑 유이까지.”

정소라는 군대에서 알게 된 누님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동정을 떼어준 누나라거나 한 번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등의 자세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정하연의 눈치라면 어떤 관계인지 충분히 짐작할만했다. 그녀는 의외로 눈치가 빠른 여자였으므로.

하지만 최미화와 도유이의 이름이 나온 것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뭘 알고 짐작한 걸까?

정하연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답을 알려주었다.

“미화 씨는 내가 눈치 챈 거 아니야.”

“어? 그럼?”

“지경이.”

“너구리가?”

“지경이 지금 노벨다이스에서 편집자로 알바하고 있잖아. 그때 이석찬이 미화 씨를 소개시켜줬다는데… 손에 반지 보고 알았다나봐. 그 반지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준 거랑 같은 거지?”

“맞긴 한데… 겨우 그걸로? 반지 모양도 다른데?”

서주환은 당시 각자에게 맞는 반지를 제작해서 선물했다. 각기 재질도 모양도 다르다는 뜻이다. 한데 그걸 보고 어떻게 두 사람의 관계를 유추해냈단 말인가.

정하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동물이라서 감이 좋은가 보지.”

“와, 지금 짐승 같다고 한 거지? 지경이한테 일러야겠다.”

“뭐래. 너야말로 맨날 지경이한테 너구리라고 부르잖아.”

“닮지 않았어?”

“그건 인정.”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정하연이 슬쩍 말했다.

“사실 지경이가 먼저 알아채긴 했는데, 확신한 건 나 야.”

“어?”

“내가 미화 씨를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거든.”

“뭐? 언제?”

돌연 정하연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서주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헌팅남.”

“?”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아.”

서주환은 그제야 1년도 한참 더 된 일이 떠올랐다.

입학하기 전의 만남.

정하연과는 이 동네에 이사 오고 얼마 안 되어 학교 밖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첫 만남은 흡연장이다.

당시 불이 필요한 정하연이 그에게 라이터를 빌렸고, 그는 전생의 기억 때문에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싶어서 정하연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헌팅을 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그 후로 정하연은 그를 헌팅남이라 불렀고, 그는 정하연을 공주병이라 불렀다.

두 번째 만남은 안양 1번가의 길거리다.

당시 그는 최미화를 꼬시기 위해서 칵테일 바에 갔었다. 그리고 취해서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해서 모텔로 가다가 정하연과 부딪혔었다.

기억을 되짚은 그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고작 1년하고 6개월 정도 된 기억이다. 사람에 따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 그의 경우에는 굉장히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졌다.

서주환은 피식 웃음을 흘리곤 정하연을 마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공주병.”

그 말에 정하연이 째릿 노려봤다.

“공주병이라니? 헌팅만 아니었지 결국은 내가 맞았잖아. 그때 나한테 막 넘겨짚지 말라고 화내더니, 그 날 미화 씨랑 모텔 갔던 거 맞지?”

“…이야, 넌 그걸 어떻게 기억해? 우리 하연이 기억력 대박. 머리 완전 좋아.”

“흥. 말 돌리기는.”

“아무튼, 그래서 알게 된 거였구나.”

“그래. 결국은 지금 미화 씨도 우리 톡방에…….”

“톡방?”

“아.”

정하연이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

서주환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다시 물었다.

“톡방이 뭔데? 너희들 나 없이 톡방 만들어서 뭐해?”

“…….”

“빨리 말해줘.”

서주환은 순순히 털어놓으라는 투로 말하며 정하연의 가슴 위로 슬쩍 손을 올렸다.

하지만 정하연은 이내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미니사이즈 자지를 움켜쥐었다. 서주환이 꼬리를 잡힌 손오공처럼 억 소리를 내며 허물어졌다.

정하연은 아예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들끼리 서주환 뒷담 까는 톡방 좀 만들었다, 왜. 불만 있냐, 난봉꾼?”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얘기 하는지 궁금해. 누구누구 있는지도.”

“알면 다쳐.”

“쩝. 그럼 하나만. 거기 유이도 있어?”

“아니, 유이는 애매해서 없어.”

“뭐가 애매한데?”

그렇게 묻자 왜인지 정하연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유이는 반지 없으니까. 네가 우리처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즐기는 상대로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서주환은 그 말을 듣고 대충 톡방에 속한 여자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반지를 준 여자들. 정하연, 유지경, 한수아, 민가희, 그리고 최미화. 어쩌면 은율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가브리엘라는 없을 듯하고.

그때 정하연이 문득 짜증난다는 듯 서주환을 노려봤다.

“아씨, 대화가 왜 이렇게 저질스럽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난봉꾼 자식!”

꽈악!

“어억! 그거 세게 잡지 마라!”

“씨이!”

“세게 잡으면 다시 선다!”

“뭐?”

정하연은 깜짝 놀라서 자지를 놓아주었다. 순간 꿈틀거리는 게 무서웠다. 아니, 그렇게 싸놓고도 또 서려고 한단 말인가? 이 불가사의한 정력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서주환은 낄낄대면서 정하연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서 옆에 눕혔다. 그에 놀림당한 걸 깨달은 정하연이 삐친 티를 내며 뒤돌아 누웠다. 그는 슬그머니 그녀의 머리 아래로 팔을 비집어 넣고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정하연도 못이기는 척 얌전히 품에 안겼다.

그는 가슴을 조물조물 만지면서 속삭였다.

“우리 한 번 더 할까?”

정하연이 화들짝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미친. 싫어. 더 건드리면 수아네 집으로 도망갈 거야.”

“농담이었는데…….”

“구라치고 있네.”

이게 안 통하네.

“그럼 얘기나 더 하자. 유이는 어떻게 안 거야?”

그 말에 정하연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유이랑 나랑 친한 거 몰라?”

“엉?”

“진짜 몰라?”

“일학년 때 엠티 사건 이후로 언니동생하며 지낸 건 알지. 그런데 아직까지 연락하는 줄은 몰랐어. 유이 자퇴했잖아.”

“나 유이랑 지금도 종종 연락하고 지내.”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정하연이 말을 이었다.

“유이가 먼저 얘기하더라. 자기가 너 좋아해도 괜찮겠냐고.”

서주환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걸 왜 하연이 너한테… 아.”

그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정하연이 이제야 알겠냐며 그를 주먹으로 때렸다.

“나랑 너랑 사귀었던 거 알고 있으니까 묻는 거지.”

“그렇다고 헤어진 전 여친한테 그런 걸 묻나? 물론 다시 사귀고 있지만 유이는 그걸 모르잖아.”

“우리 관계가 좀 특이해? 다른 사람들은 헤어졌다가 절친으로 지내는 줄 알잖아. 당연히 다시 사귀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아.”

“그렇긴 하지.”

“아무튼 유이 입장에선 혹시라도 자기가 너랑 잘 되면 나중에 내 얼굴 보기 미안해지니까 미리 말한 거지. 뭐, 허락을 구한다기보단 그냥 통보였고.”

“그래도 참 별나다. 말할 거면 사귄 다음 말하는 게 맞지 않나? 어떻게 될 줄 알고 사귀기도 전에 너한테…….”

“사귀진 않아도 섹스는 했잖아.”

“…….”

서주환은 입을 닥쳤다. 뭔가 이상한 말인데 한편으로는 그것도 그러네? 싶었기 때문이다.

“유이가 나랑 했다는 말도 했어?”

“안 말해도 내가 알아서 눈치 깠지. 상대가 너니까.”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듯한 말이다.

듣기에 따라 비꼬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무심한 듯도 했다. 아니, 해탈(解脫)했다는 말이 더 옳겠다.

서주환은 어쩐지 급격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정하연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평소 짓궂고 장난스러운 태도로 여자들과 어울렸지만 깊게 들어가면 결국은 그가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마음을 준 여자들에 한해서는 그랬다. 여인들이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마음으로 인내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주환이 입을 다물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의아함을 느낀 정하연이 그를 돌아봤다. 그렇게 시선을 맞춘 그녀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내가 그런 표정 하지 말랬지.”

“…어?”

“그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 말이야. 진짜 안 어울리거든?”

서주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정하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너 그때 내가 한 말 벌써 잊었어?”

“…무슨 말?”

“크리스마스 때 한 말.”

“아.”

서주환은 지난 크리마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정하연에게 지금과 같은 관계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줬는데 그 선물 때문에 다른 여자들이 떠오르는 상황이 너무 아이러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하연은 그의 사과를 받고 사람 우습게 보지 말라며 당차게 말했었다.

지금의 관계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그리 말하면 오히려 억지로 만나주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그저 제대로 확신만 달라고.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사람 신경 쓰이게. 내가 좀 전에 한 말 때문에 그래?”

“그냥 뭐…….”

“너 눈치 보라고 한 말 아니야.”

“알지.”

“아는데 왜 계속 그런 표정이냐고. 씨.”

정하연이 양손을 들어서 그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그리곤 웃으라는 듯 입꼬리를 잡고 쭉 잡아 올렸다.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양심이 있지.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미안하다는 생각도 해.”

정하연이 콧방귀를 뀌었다.

“웃겨. 넌 양심 따지기엔 이미 늦었어.”

“…그래?”

“어, 한참 늦었어. 차라리 평소처럼 뻔뻔하게 행동해. 그게 나도 편하니까. 네가 진지하게 미안해하면 나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단 말이야.”

서주환은 그녀의 말이 묘하게 들렸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돼서 문제라는 말. 달리 말하면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깊게 따지고 싶지 않다는 것 같습니다. 결론이 나지 않는 복잡한 문제니까요.]

루시가 첨언했다. 그리고 서주환은 루시의 의견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제법 사람의 감정에 능통해진 루시였다.

서주환은 결국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들추어봐야 마음이 복잡해지기만 했으므로.

그가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 쪽 입을 맞추자 정하연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있잖아, 주환아.”

“응?”

“사실 난 지금이 좋아. 그냥 계속 이랬으면 좋겠어.”

“…무슨 뜻이야?”

“난 지경이도 좋고 수아도 좋거든. 가희도 그렇고 미화 언니도 얘기해보니까 착한 사람 같고. 아, 율이도.”

“…….”

서주환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정하연의 목소리가 졸린 듯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쭉 이런 관계면 좋겠어. 누구 한 명만… 너랑 있게 되면…….”

“…….”

“다른 사람들은… 너무 슬플 것 같아.”

서주환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말했다.

“…만약 그 한 명이 하연이 너면?”

그는 저도 모르게 말해놓고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쓸데없는 말을 꺼내버렸다.

한데 의외로 정하연은 품속에서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싫어.”

“…왜?”

“그럼… 수아도, 지경이도, 가희도… 전부, 다 멀어질 것… 같으니까…….”

“…….”

아이러니한 관계로 엮인 여자들.

처음에는 서주환이 중심에 있어서 엮인 인연이지만 이제는 그가 아니어도 너무 가까워져버렸다. 한데 이제 와서 그가 한 명만 선택한다면 어찌 될까. 그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지, 아니면 의외로 그저 친구처럼 원만한 관계가 될 지는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 정하연이 꿈속에 잦아드는 목소리로 흐릿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응.”

“피임, 꼭… 해야 돼…….”

“…….”

서주환은 소리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껏 그녀가 철저한 피임을 해왔던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는 이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중얼거렸다.

“…나중에 중동을 가든가 해야겠어.”

석유나라 공주를 한 명 꼬셔다가 결혼해야겠다. 그리고 하렘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가 산재한 방안이었지만 이제 마냥 농담으로 치부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그 말을 들은 루시는 서주환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게 웃었다.

[글쎄요…….]

루시는 주인님의 앞날에 방해가 되지 않고자 다시 한 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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