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442화 (44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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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즐거운 한가위 되셨나요?

저는 오랜만에 늘어지게 쉬고 병원도 다녀왔습니다.

식단이고 뭐고 마구 처먹었더니 순식간에 살도 쪘습니다.

역시 멋쟁이 근육맨보단 행복한 돼지가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추석이었습니다 하핳

*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D

친구들

서주환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끔뻑였다.

“하연이 너도 잊고 있었다고?”

“…어.”

정하연이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스스로 답하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기색이었다.

서주환은 얼이 빠진 그녀와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그, 우리…….”

“…….”

“일단 마저 씻을까? 난 저쪽 가서 씻고 올게.”

“…알았어.”

정하연은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어쩐지 문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안색이 조금 전보다 더 하얗게 보였다. 어머니의 기일을 잊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서주환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눈꼬리를 긁적이다가 다른 욕실로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

서주환은 서둘러 씻고 나온 후 정하연이 있는 욕실을 살폈다. 욕실 안에서 단조로운 물소리만 들리는 걸 보아하니 나오기까지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그 이유가 비단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보아온 정하연의 행동패턴을 되새기며 주방으로 향했다.

‘분명히 또 땅굴 파고 있겠지.’

지금쯤 욕실 안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찬물을 맞으며 자책하고 있을 모습이 그려졌다.

서주환은 그 모습이 너무나 선명해서 상황에 맞지 않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도무지 생긴 거랑 안 어울린단 말이야.”

겉으로만 보면 찬바람이 쌩쌩 불 것 같은 냉미녀인데 정작 속 알맹이는 여리고 말랑말랑한 찐따가 따로 없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케어를 해주지 않으면 혼자 상처받고 쭈그러지는 귀찮기 그지없는 여자였다.

[전혀 귀찮은 표정이 아닙니다만.]

그는 루시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느 정도 귀찮고 번거로운 맛이 있어야 애착도 더 생기는 법이다. 평탄하게 보낸 시간보다 힘들게 고생한 시간이 더 기억에 남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도 굉장히 사랑해.’

[?!]

서주환은 어쩐지 충격 받은 듯한 루시를 무시하고 앞치마를 둘렀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살폈다.

“음. 대충 먹고 남은 소고기랑 콩나물 정도인가?”

아쉽게도 장볼 때가 되어서 식재료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조미료는 충분하니 아침식사 정도는 문제없다.

“분명 입맛이 없을 테니까 얼큰한 걸로 하자.”

서주환은 먹고 남은 소고기 자투리와 콩나물, 고추, 대파 등을 넣고 얼큰하게 국을 끓였다. 일부러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를 넉넉히 뿌려서 입맛을 돋우는 매운 맛을 살렸다.

그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정하연이 있는 욕실 앞으로 갔다.

똑똑.

“하연아, 슬슬 나와. 밥 먹자.”

“…….”

“정하연! 빨리 안 나오면 덮치러 들어간다!”

당장 쳐들어갈 듯 크게 소리치자 안에서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서주환은 깜짝 놀라서 문을 열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 정하연이 이상한 포즈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털 한 오라기 없는 두덩이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너 괜찮아?”

“어, 어어. 괜찮아. 그냥 물건 떨어트린 거야.”

그 말에 욕실 바닥을 보니 바디워시와 샴푸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떼잉 쯧쯧하고 혀를 찼다.

“조심성 없기는.”

“뭐? 아니, 너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거잖아!

“소리치는 거 보니까 다치진 않은 모양이네. 그만 씻고 얼른 나와.”

“알았으니까 빨리 문 닫아. 언제까지 보고 있으려고?”

“보고 또 봐도 안 질리는 걸 우째? 캬. 누구 여친인지 몸매 참 잘 빠졌… 헉!”

서주환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다가 얼른 문을 닫았다. 철퍽! 수건이 욕실 문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정하연이 나와서 말했다.

“주환아, 미안한데 나 머리만 말리고 밥 먹을…….”

“어, 말려줄 테니까 일로 와.”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손에는 드라이기와 빗이 들려있었다.

정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머리 감은 거 어떻게 알았어?”

평소에는 이렇게 아침부터 머리를 감지 않는다. 해봐야 앞머리만 감을 뿐이다. 지금은 멍하니 물을 맞다가 온통 다 젖은 것이었다.

서주환은 픽 웃으며 재차 의자를 두드렸다.

“좀 전에 봤으니까 알지. 빨리 와서 앉기나 해.”

“혼자 해도 되는데.”

“쓰읍. 튕기지 말고 앉지?”

“…흥.”

정하연은 의미 없는 코웃음을 치며 의자에 앉았다.

위이잉~.

서주환은 능숙하게 그녀의 머리를 정리했다. 정하연도 익숙하게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서주환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거 알아? 내가 머리 말려준 여자, 하연이 네가 처음이다?”

그 말에 정하연이 의미 있는 코웃음을 쳤다.

“뭐래. 어렸을 때 주희 머리 많이 말려줬다면서.”

“걔가 여자야? 동생이지.”

“수아도 있잖아.”

서주환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보니까 한수아의 머리도 많이 말려줬었다. 하지만 그는 괜히 지기 싫은 마음에 변명했다.

“그때는 수아가 여자로 안 보였잖아. 그러니까 노카운트.”

“와. 지금 그 말 수아가 들었으면 진짜 섭섭해 했을 거야. 울었을지도 몰라.”

“…비밀로 해줘. 내가 말실수 했다.”

환이 오빠 바보! 환이 오빠 멍청이!

어디선가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괜히 변명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정하연이 킥킥 웃다가 툭 말했다.

“주환아.”

“응.”

“혹시 나랑 다른 여자 헷갈리면 팔다리 다 꺾어버릴 거야. 알았지?”

“…응.”

“대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다른 애들한테도 말조심하란 말이야. 다 알고 만나는 거라도 상처는 받으니까.”

“알았어. 조심할게.”

서주환은 조금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위로를 해주려고 했는데 어쩐지 혼이 나고 있었다.

빗질까지 끝내자 정하연이 일어나서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품에 안기며 말했다.

“환아, 고마워.”

처음 사귀었던 시절의 애칭이다.

서주환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거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치. 금세 기고만장하긴.”

예쁘게 웃은 그녀가 볼에 입술을 맞췄다.

서주환은 마주 그녀의 볼에 입술을 맞춰준 후 팔팔 끓고 있는 냄비를 들어 식탁으로 옮겼다.

‘좀 짜졌으려나?’

물을 좀 부어야 하나 했지만 본디 입맛이 없을 땐 맵고, 짜고, 단 게 최고라는 격언을 따르기로 했다.

다행히 정하연은 국물 맛을 보더니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는 후식으로 마카롱과 원두커피를 내왔다.

정하연이 달콤한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물며 물었다.

“마카롱 네가 샀어?”

“응.”

“너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는 거지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야. 너랑 애들이 집에 자주 놀러오니까 오다가다 눈에 띄면 한 번씩 사는 편이기도 하고.”

“그래? 아무튼 이거 맛있다.”

서주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요. 순발력 있게 잘 넘겼습니다.]

‘그러게.’

사실 마카롱은 물론이고 원두커피도 그가 산 게 아니었다.

1학년 때 리더십 캠프에서 만난 주경은. 과거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시를 알려준 강사. 부모님의 죽음 이후 배우의 꿈을 포기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던 여자. 그가 길을 제시해준 사람들 중 한 명.

지금 먹고 있는 마카롱과 원두커피는 얼마 전 성우 공채에 합격한 그녀가 감사의 의미로 보낸 선물이었다.

‘진짜 큰일 날 뻔했군.’

다른 여자에게 받은 선물을 여자친구에게 대접했다가 걸릴 뻔한 상황이라니. 하마터면 제대로 된 대화 시작도 전에 분위기가 싸해질 뻔했다.

“음.”

서주환은 슬슬 얘기를 꺼내려고 정하연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쓰게 웃더니 먼저 서두를 뗐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천만의 말씀을.”

“아니, 진짜로.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

“그래? 한참은 더 우울해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놀리듯 말하니 정하연이 뚱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아니거든?”

“오올, 우리 정 찐따 많이 발전했는데?”

“이게… 그래, 누구 덕분에 하도 속앓이 하다보니까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왜, 더 할 말 있어?”

서주환은 식탁에 처박을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흥. 까불고 있어. 팍씨.”

정하연이 장난스럽게 주먹을 흔들었다. 귀여우면서도 무서운 동작이다. 그는 저 하얀 손이 얼마나 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잘 하란 말이야.”

“예, 마마.”

“오냐.”

정하연은 피식 웃으며 서주환의 말투를 흉내 냈다. 상대가 계속 장난스럽게 나오니 심각해질 수가 없었다. 묘하게 진지함을 벗어나진 않아서 화가 안 나는 게 신기했다.

그녀는 이내 작게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깐 진짜 놀랐어. 엄마 기일을 잊은 건 처음이거든.”

“이번 여름은 날씨가 맑았잖아. 역대 최고 가뭄이라면서 비도 안 내렸고.”

비와 천둥번개는 정하연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트리거다. 그녀는 비가 오는 날이면 울적해 했고, 천둥번개까지 치는 날이면 신체적으로도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정하연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 기일을 잊은 건 날씨랑 상관없어. 딱히 기일이 아니어도 혼자서 찾아가곤 했었거든. 내 생일이나, 엄마 생일 날. 또 힘든 일이 있거나 문득 외로워지면 엄마를 보러갔어.”

“…….”

“그런데 최근에는 그러지 않았어. 나도 눈치 채지 못했는데, 요즘은 엄마 생각을 많이 안 했던 것 같아.”

“그랬구나.”

“응. 대학 들어오고부터… 아니, 너랑 만나고부터라고 하는 게 맞겠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거의 잊고 살았는데… 기일까지 잊어버릴 줄은 몰랐네.”

정하연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서주환은 말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대신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정하연은 오히려 그 태도가 편해서 말의 앞뒤를 맞추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말할 수 있었다. 때로는 정리되지 않는 속말을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게 좋았다.

“저번 달에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그때는 그냥 안부전화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같이 엄마 보러 가자고 말하려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겠네.”

“아버진 아직도 날 어려워하는 것 같아. 사실 나도 마찬가지고. 오래 벽을 쌓고 지냈는데 이제 와서 살갑게 구는 게 힘들더라.”

“갑자기 살갑게 굴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할지도 몰라. 아버님이 엄청 당황할 걸?”

상상을 한 모양인지 정하연은 킥킥 웃음을 흘렸다. 이내 웃음을 멈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예전보다는 나아. 옛날엔 아버지 얼굴만 보면 엄마 생각 때문에 화가 났거든. 아버지가 엄마를 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지?”

“맞아. 다 오해였고, 내 착각이었어. 굳이 원망하려면 할아버지란 사람을 원망해야 하는데, 난 그 사람 얼굴도 몰라.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 없어. 아버님도 만나란 소리 안 하잖아.”

“응. 오히려 안 마주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봐서 좋을 게 없으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이제 아버지를 봐도 화가 안 난다는 거야. 원망스럽지 않아서 그런가봐.”

“다행이네.”

정하연과 이주철의 오해가 풀린 지도 몇 달이 됐다. 두 사람은 가끔씩이나마 안부전화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부녀지간 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데 정하연의 낯빛이 돌연 어두워졌다. 그녀가 조금 멍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 있지. 화가 안 나는 대신에 아버지를 봐도 엄마 생각이 잘 안 나. 옛날엔 아버지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는데 지금은… 그냥 아버지야. 오히려 지금까지 내 고집 때문에 힘들게 해서 미안한 마음도 있고…….”

그렇게 횡설수설 한참을 말하고 보니.

정하연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일지도…….”

말끝을 흐린 그녀가 흠칫 눈을 크게 떴다. 스스로 말하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모양새였다.

서주환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잘게 떨리고 있는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막 쏟아냈으니까 이제 정리해보자. 왜 그런 생각이… 아니, 뭐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정하연이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엄마를 잊어버린 게.”

그리 말한 정하연의 입매가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서주환은 ‘안정의 손길’을 사용해서 그녀가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진정시켰다. 깊게 새겨진 트라우마는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침잠시킨다. 그렇게 가라앉은 상태로 깊이 고민하고 몰입하면 부정적인 답에만 매몰되기 십상이다. 겪어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서주환은 맞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을 잘 정리해보자고 했지? 자, 하연이 넌 어머님을 생각하지 않게 돼서 좋은 게 아니야. ‘괴로운 일 때문에’ 어머님을 생각하지 않게 돼서 좋은 거지.”

정하연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서주환은 시선을 마주하고 ‘위스퍼’를 사용해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둘은 같은 말 같지만 전혀 다른 뜻이야. 하연아, 아까 어머니를 어떨 때 만나러 갔다고 했어? 기일이 아니어도 종종 찾아갔다고 했잖아.”

“내 생일. 그리고 엄마 생일.”

“그리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또.”

“외로울 때.”

서주환은 그녀의 말을 정리했다.

“네 생일에는 너를 축하해줄 어머님이 없어서 슬펐을 거고, 어머님 생일에는 네가 축하해줄 어머님이 없어서 슬펐겠다.”

“…응.”

“전부 힘들고, 외롭고, 슬플 때 어머님을 찾아갔었네. 어머님께서 딸 걱정이 많았겠어.”

“그러게.”

생각해 보니까 정말로 그랬다.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말한 기억이 없다. 몇 번 정도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새삼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걱정시킨 것 같아 더 죄스러웠다.

서주환이 말했다.

“다행히 지금은 안심하고 있겠는 걸.”

“…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항상 힘들고 외로울 때 찾아오던 딸이 한동안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어떤 생각이 들겠어? 아, 우리 딸이 요즘은 힘들지 않구나. 외롭지도 않고 슬픈 일도 별로 없겠구나 싶겠지.”

서주환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그럴듯한 말을 확신조로 늘어놓았다.

정하연에게는 그 말이 제법 좋게 들린 모양이다. 그녀는 흑백이 또렷한 눈동자를 껌뻑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구나.”

“틀림없어.”

상대방을 설득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말하는 사람의 자신감이다. 확신을 가지고 말하면 상대도 헷갈리게 되어 있다. 그는 씩 웃으며 맞잡고 있는 정하연의 손등을 두드렸다.

정하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 지었다. 신기하게도 갑갑했던 속이 조금 편해졌다.

그때 서주환이 문득 말했다.

“가자.”

“어딜?”

“어머님 뵈러.”

정하연이 고양이 같은 눈을 껌뻑였다.

“지금?”

“불안해하고 있을 어머님 안심시켜드려야지.

“…좀 전엔 안심하고 있을 거라면서.”

서주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니까 저번에 내가 어머님한테 한 말이 있잖아.”

“아, 쓰레기 선언?”

정하연의 말에 서주환은 속이 뜨끔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본인이 쓰레기인 것을 인지하고 있던 터라 이내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나 같은 놈한테 꿰였으니 얼마나 걱정하고 계시겠어? 가서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켜드려야지.”

자학적인 개그에 정하연은 웃음이 나왔다.

“너 보면 더 걱정할 거 같은데. 그냥 나 혼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럼 또 혼자서 찌질대고 있구나 걱정하시겠지.”

“뭐야?”

“그러니까 애들도 불러서 같이 가자.”

“어? 다른 애들도?”

정하연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서주환은 당장 폰을 들어 까톡방을 열면서 말했다.

“나쁜 애인 말고 멀쩡한 친구들도 있다고 소개시켜줘야 안심하시지.”

“멀쩡한?”

정하연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서주환도 무언가 이상해서 눈을 끔뻑였다. 생각해 보니까 정하연과 친한 사람은 대부분 그의 여자거나 이석찬 혹은 장덕훈이므로 결코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도 정하연을 따라 애매한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아무튼 간에. 석찬이도 부른다?”

“…응.”

정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이석찬이 예전부터 자신을 챙겨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주환은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 나: 지금 시간 되는 사람 우리 집으로 와줘.

시간 차이를 두고 제각각의 답이 올라왔다.

- 유지경: 편집하느라 바쁘다!

- 장덕훈: 죄송합니다, 형님. 저 비축분 하나 남았습니다. 거의 라이브 연재라 시간이 없습니다…….

- 이석찬: 나 지금 회사임. 볼 거면 저녁에ㄱㄱ

- 서주희: 혼자 놀아

- 한수아: 환이 오빠 친구 없엉? 내가 놀아줄깡?

서주환은 까톡을 하나 더 보냈다.

- 나: 하연이네 어머니 뵈러 갈 거야. 시간 되는 사람들 같이 가자.

이번엔 곧바로 답이 올라왔다.

- 한수아: 지금 환이 오빠네로 가면 돼?

- 장덕훈: 금방 가겠습니다.

- 서주희: 30분 안으로 갈게.

옆집인 한수아는 당장이라도 건너올 기세였고 장덕훈과 서주희도 금방 올 것 같았다.

한편 ‘노벨다이스’에서 편집자로 알바 중인 유지경은 이석찬에게 말했다.

- 유지경: 석찬 오빠, 대표님, 나 퇴근시켜줘. 안 되면 퇴사시켜줘.

- 이석찬: 기다려 보셈. 야, 지경인 내가 데리고 감.

- 나: 장소 알아?

- 이석찬: ㅇㅇ앎. 그런데 정하연이 같이 가자고 한 거 맞음?

서주환은 옆에 앉은 정하연을 돌아봤다.

그녀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까톡 메시지에 답했다.

- 정하연: 다들 고마워.

그 날 정선애(鄭嬋愛)의 묘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꽃이 놓였고, 저녁에는 가뭄의 끝을 알리는 듯한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나 정하연은 더 이상 비와 천둥번개가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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