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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D
오디션
“괜찮아요?”
그는 이채희 옆에 쭈그려 앉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가자미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내 꼴이 지금 괜찮아 보여?”
“하하…….”
“내가 아역배우로 시작해서 삼십 년 가까이 연기를 해왔는데, 너 같은 독종은 처음 본다. 사람이 어떻게 그러니?”
이채희가 근 일주일간 지켜본 서주환은 그야말로 괴물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연기력도 그러했지만, 정말 놀라운 점은 시종일관 유지하는 집중력과 그를 가능토록 하는 체력이었다.
‘이 미친놈, 하루 12시간은 적당히 한 거였어.’
오디션을 준비할 때 보인 집중력만 해도 충분히 상식의 범주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철이 들기도 전부터 연기신동이라 불렸던 그녀가 이 불가해한 천재를 두고 재능보단 노력파(努力派)라 칭했겠는가.
한데 이제 보니 그것마저도 연재와 연기를 병행하느라 충분한 여력을 남겨둔 것이었다. 오디션 이후 비축분을 다 쌓았다며 찾아온 서주환은 먹고 자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연기훈련에 매진했다. 덕분에 가르침을 내리는 그녀가 먼저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지도하는 입장이라 어떻게든 버티는 거지.’
모든 훈련을 같이 했다면 이미 과로로 실려 갔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평소라면 쓰러졌어도 벌써 쓰러졌을 터인데.
“누나, 정 힘들면 며칠 쉬고 오세요.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혼자 연습할 수 있어요.”
“…시끄러, 이 괴물아. 주환이 너 아직 한참 어설퍼. 촬영 일정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그 꼬라지로 연기하면 대중들한테 엄청 물어뜯길 걸?”
사실 내뱉은 말과 달리 그 정도는 아니다. 그녀가 보기에 이미 서주환의 연기력은 누가 봐도 연기 판에서 수년 이상 구른 베테랑 수준으로 올라왔다. 적어도 김정민(살인마) 역에 한해서는 그 이상이었고 말이다.
한데 서주환은 그녀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듯 진중한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노력할게요.”
“지랄.”
이채희는 뇌를 거치지 않고 척수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여기서 무얼 더 어떻게 노력하겠다는 건지 황당했기 때문이다.
욕설을 듣고 쓰게 웃은 서주환이 다른 방안을 내놨다.
“아니면 다른 분한테 도움을 구하면 어때요? 두 타임으로 나눠서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그 말에 이채희는 무슨 개소리냐며 눈깔을 부라렸다.
“내가 가르쳐주는 걸론 부족하다 이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쓸데없는 소리 마. 어차피 김정민은 다른 배역이랑 합 맞출 일도 거의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서주환이 맡은 김정민은 영화가 중반으로 넘어가기 전에 경찰에 구속되고 퇴장한다.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초반에도 비중에 비해 대사가 적다. 역설적이게도 대사보다는 표정과 몸짓을 통해 긴장감과 잔인함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 난이도가 높은 배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다시피 자주 대치하는 상대역이 바로 이채희다. 그녀는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쭈그려 앉은 서주환의 고개를 강제로 숙이게 만든 다음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가 잘 가르쳐줄 테니까 지금처럼 열심히 하기만 해. 인맥빨이니 회사빨이니 하는 말들 신경 쓰지 말고. 스크린에 나가면 여론 다 뒤집어질 거야.”
“? 지금 저 위로해주는 거예요?”
서주환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이채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열 살이나 어린 주제에 귀여운 맛이 없어.”
“흐흐. 애교라도 부려볼까요?”
“됐네요. 아무리 연하라도 너처럼 생긴 놈이 애교부리면 끔찍할 것 같다, 얘.”
이채희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주환이 큭큭거리며 되받아쳤다.
“전 그 반응이 재밌더라고요.”
“에휴. 아무튼 많이 쉬었으니까 다시 시작할까?”
“네. 잡고 일어나세요.”
서주환이 손을 내밀었다. 이채희는 익숙하게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내 마주 선 두 사람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날카롭게 뜬 서주환의 눈은 싯누런 빛이 맴도는 듯 번들거렸고, 조금 전만 해도 그를 나무라던 이채희는 영락없이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Scene 15, 어두운 골목길에서의 대치상황이다.
서주환이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이번 소재는 수집하기가 힘드네.”
이채희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사람을 소재라 지칭하는 발음에서 무기질적인 오싹함이 느껴진 탓이다. 대사는 같았으나, 몇 시간 전에 보여준 것과는 또 다른 타입의 살인마가 눈앞에 있었다. 그새 정해진 틀 안에서 캐릭터를 다른 버전으로 재해석해낸 것이다.
이채희는 뒷덜미를 차게 만드는 살기를 받는 와중에도 환희를 느꼈다.
‘이 좋은 걸 다른 사람이랑 나눠가지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적어도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는 온전히 독점할 것이다. 서주환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스스로를 위해서 지도자를 자처하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아주 약간만, 조금의 실마리만 확실히 잡아채면 된다. 그러면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 이채희는 그 가능성을 쥐고 있는 게 바로 눈앞의 남자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사주에서 이맘때 기회가 온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서주환이 그 기회이자 귀인(貴人)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하복부에서 기분 좋은 열기가 차오르는 걸 느끼며 서주환과 합을 맞췄다.
*
서주환과 이채희는 차 뒷자리에 올랐다. 운전석에는 이채희의 매니저인 배성근이 있었다.
배성근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적당히 몸 좀 사리면서 해요. 그러다 촬영 시작도 전에 쓰러지겠어요.”
“성근이 시끄러.”
이채희가 기운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성근이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고집은.”
“성근이 셧 업…….”
“하이고, 저 고집불통 누님을 어쩌면 좋냐. 주환아, 네가 좀 말려봐라.”
“그럼 내가 죽을 걸? 아까도 슬쩍 말해봤다가 욕만 먹었어.”
“주환이도 셧 업…….”
“넵, 누나.”
“착해, 착해…….”
마치 개를 칭찬하는 듯한 어투다. 그에 서주환은 끅끅 웃음을 흘렸다. 이채희의 몸은 한계에 달했음이 분명한데 당장 졸도할 것 같은 모양새로 할 말을 다 하고 있는 게 우스웠다. 기력이 조금만 더 남아있었어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여자였다.
‘동생 취급받는 건 또 오랜만이네.’
회귀 전의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어지간히 나이차이가 나도 대부분이 동생처럼 느껴졌는데 기분이 꽤 묘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듯 차를 세운 배성근이 말한다.
“누님, 내리세요. 주환이 넌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누님 안으로 들이고 데려다줄게.”
“아, 나도 같이 들어갈 거야.”
“어? 왜?”
서주환은 어리둥절해하는 배성근 대신 이채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채희 누나 마사지 해주기로 했거든. 그렇죠?”
이채희는 대답할 힘도 없다는 듯 고개만 미세하게 까딱였다. 배성근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웬 마사지? 너 마사지도 할 줄 알아?”
“들어가서 설명할게.”
배성근은 그가 마사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서주환은 먼저 차에서 내린 후 이채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나, 일어나요.”
“몸이 안 움직여…….”
“엄살 부리지 말고요.”
“엄살? 죽을래?”
“아니면 그냥 제가 업어요?”
“차라리 그게 낫겠다.”
“진짜요?”
“아, 대답할 기운도 없어.”
농담이 아닌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하는 이채희다. 어째 오늘따라 유독 힘들어하더니만 완전히 지쳐버린 듯했다.
서주환은 이채희의 손을 잡고 짐짝 빼듯이 끌어당겼다. 그녀가 억! 하는 소리를 내며 주르륵 딸려 나왔다.
*
서주환은 매트를 깔고 이채희를 엎드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최상급 마사지’와 ‘상급 치유의 손길’의 효능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이내 거멓게 죽어가던 그녀에게서 온천에 들어간 사람이 으레 토하는 노곤함에 잠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커어어어어…….”
정정한다. 열탕에 들어간 아저씨마냥 구수한 음성이었다.
서주환이 이채희의 몸을 떡 주무르듯 하는 모양새를 반신반의하며 지켜보던 배성근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누님, 그렇게 시원해요?”
“말로 해야 아니?”
“표정은 거의 극락가기 직전이긴 한데요.”
“주환이 얘는 마사지의 신이야. 마음 같아선 성근이 너 해고시키고 얘를 매니저로…….”
“내가 대표 아들인데 누구 맘대로 해고타령이에요?”
“아무튼 궁금하면 너도 받아보던가.”
그에 배성근이 기다렸다는 듯 서주환을 돌아봤다. 처음 마사지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서주환이 여배우의 몸을 거침없이 주무르는 것에 식겁했었다. 하지만 눈에 바로 보이는 효능을 확인한 뒤에는 궁금증이 더 커진 모습이었다.
“왜, 형도 한 번 주물러줘?”
서주환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예의상 권유했다. 남자 몸은 별로 만지고 싶지 않았다.
배성근은 거절을 모르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마사지를 받는 배성근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허으으응…….”
서주환은 기겁해서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징그럽게 뭔 소리를 내는 거야!”
“어억!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형 머리통을!”
“나 마사지 안 할래!”
“뭐? 야, 시작해놓고 그러는 게 어디 있어. 주환아,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아무래도 이능력에 가까운 효능을 발휘하는 ‘최상급 마사지’가 잠자고 있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배성근에게 페티시, Tripsophilia(下)가 추가되었습니다.]
[업적, ‘페티시 추가’를 달성하여 10,000LP가 지급됩니다.]
그 날 서주환은 원치 않는 포인트를 얻었다. 그리고 마사지에 제대로 맛을 들인 이채희와 배성근에게 시달리는 나날이 시작됐… 될 뻔했다.
결코 남자 몸을 주무르기 싫었던 서주환이 말했다.
“형은 매니저잖아. 매니저가 배우한테 마사지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
배성근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입을 닥쳤다.
서주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채희 누나만 주무르면 되겠군.’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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