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421화 (42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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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화요일 휴재 보충 한 편 더 있습니다!

오디션

연기를 마친 서주환이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민선하는 저도 모르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에 서주환이 다시 한번 목례를 하고 오디션장을 빠져나갔다.

끼익, 쿵.

문이 닫히고, 민선하는 장내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김정민 역으로 서주환 씨가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연하죠.”

“마약유통이 어쩌니… 촬영도 전부터 무슨 일이가 했는데 위기가 기회로 왔네요.”

단연코 기존 배우보다 낫다는 뜻이다.

민선하는 슬쩍 투자처에서 온 중년인을 돌아봤다. 중년인은 몇 번 입을 달싹거리다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견은 없었다.

*

서주환은 합격통지를 보고 픽 웃었다. 솔직히 합격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기에 기쁨이 크지 않았다.

‘통과 못하면 그게 등신이지.’

결코 자만한 게 아니다. 그저 시스템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했으리라는 마음에서 든 생각이었다.

루시가 말했다.

[누구나 가능하진 않았을 거예요.]

“응?”

[시스템이 있다고 해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그리고 주인님은 엄청나게 노력하셨어요.]

능력이 있는 것과 능력을 잘 활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재능과 특수능력에 의존해 본능대로 행하는 것과 충분한 연습을 통해 활용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루시는 그가 지나치게 겸손하다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주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그걸 노력이라고 말하면 양심이 없는 거야. 어느 직업군이든 죽을 각오로 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주인님께선 이상한 데서 기준이 높으시네요.]

루시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후후 웃음을 흘렸다.

[주인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뭘 혼자 납득하고 웃는 거야?”

[앗, 메시지가 왔답니다.]

이채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합격 기념으로 술을 마시자고 한다.

‘이 누나 몸매 관리 안 해도 되나?’

배역도 구했으니 금방 촬영 일정이 잡힐 텐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안 가실 건가요?]

“음. 고민이네. 오늘 저녁엔 글 좀 쓰려고 했는데.”

아직 비축분이 꽤 있긴 하지만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모아두고 싶었다.

그때 메시지가 한 번 더 왔다.

이채희: 민선하도 여기 있어. 와서 얼굴이라도 익혀놔.

“……!”

민선하는 이번 영화의 감독이다. 서주환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가서 인사라도 해야지 싶었다.

*

이채희가 민선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얘가 좀 또라이거든. 새로 합류한 배우님 얼굴 좀 봐야겠다면서 쳐들어왔어.”

“누가 누구한테 또라이래?”

민선하가 심통 난 얼굴로 이채희의 옆구리를 쿡 쑤셨다. 그에 맥주를 마시던 이채희가 콜록 기침을 해댔다.

“야 이, 내가 술 마실 때 건드리지 말랬지?”

“술은 무슨. 그거 무알콜이잖아.”

“쯧.”

이채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또 혀를 찼다. 민선하에게 짜증이 난 게 아니라 무알콜이 마음에 안 든 것이다.

그때 주방에서 배성근이 나왔다.

“야, 서주환. 오디션 끝났으면 나한테 연락을 해야지!”

“형도 있었어?”

“누님 감시하러 왔다. 겸사겸사 너도. 오늘부터 술은 안 돼.”

배성근이 으름장을 놨다.

서주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알코올 중독도 아니고 술 좀 못 마시는 것에 불만이 일진 않았다. 그저 이채희만 시무룩한 얼굴로 무알콜 맥주를 홀짝일 뿐이었다.

배성근은 그가 동의를 하고서야 축하를 건넸다.

“아무튼 정말 축하한다. 설마 진짜로 합격할 줄이야.”

“뭘, 채희 누나가 잘 지도해준 덕분이지.”

그때 손 하나가 앞으로 다가왔다. 민선하가 맥주 한 캔을 그에게 건넨 것이다.

“저기, 주환 씨? 서 배우님?”

“네, 감독님.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

“그래도 될까?”

기다렸다는 듯 말을 놓는 민선하다.

서주환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선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웃었다.

“주환이 너도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채희랑 누나동생 한다면서?”

“네. 그럴게요, 선하 누나.”

냉큼 누나라고 부르자 민선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너 되게 넉살 좋다. 무대에서랑은 느낌이 전혀 다르네.”

“그건 연기니까요.”

“응응, 그래, 연기는 얼마나 했어? 진짜 잘하더라.”

그 질문에 이채희와 배성근의 표정이 묘해졌다.

서주환은 맥주캔을 따며 답했다.

“일주일이요.”

“…뭐?”

“아, 오늘까지 8일인가?”

“…….”

민선하의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정말이냐는 듯 이채희와 배성근을 돌아봤다. 두 사람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민선하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아하하. 나 놀리는 거지?”

“…….”

“…진짜야? 그게 말이 돼?”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물음에 서주환은 적당히 둘러댔다.

“제가 나름 작가거든요. 그래서 마감 치는 장면은 익숙했어요. 맨날 하던 거라.”

“아니, 그렇다고 그게 될 리가 없잖아. 그럼 살인도 해봤게?”

“선하야.”

“아, 미안. 내가 말을 잘못했어.”

민선하가 재빨리 말실수를 사과했다.

서주환은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살인마랑 싸워보긴 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일단 건배할까요?”

서주환은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맥주캔을 앞으로 내밀었다. 민선하가 얼른 캔을 맞부딪치며 말을 재촉했다.

“음. 제가 말년 휴가 나왔을 때 있었던 일인데…….”

서주환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풀어놨다. 대충 경위를 알고 있던 이채희와 배성근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어디 가서 살인마와 싸운 썰을 들어보겠는가.

이야기가 끝나자 민선하와 이채희가 참았던 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그때 뉴스에 나온 게 너였구나. 안 무서웠어?”

“어디 다친 덴 없는 거지?”

두 사람은 1년도 더 된 일을 가지고 새삼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반면 남자인 배성근은 관점이 조금 달랐다.

“살인범 잡고 말년휴가가 짤려? 와 씨…….”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온 남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사실 서주환의 입장에서는 영내에서 정소라와 실컷 떡을 쳤으니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서주환은 시간을 확인하고 세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한데 저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글 써야 돼서.”

“글? 은아힐링 말하는 거야?”

민선하의 물음이었다.

서주환은 어떻게 제목을 알고 있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내가 얘기 안 했구나. 나 주환이 네가 쓴 소설 다 봤어.”

“정말요?”

“응. 재밌던데? 특히 회병생은 드라마로 만들면 재밌겠더라. 문집에 실린 ‘소통의 부재’도 인상 깊었고.”

“…감사합니다. 저도 감독님 작품 다 봤어요.”

서주환은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민선하 감독이 자신의 소설을 다 봤다니 믿기지 않았다. 반반감독이란 해괴한 별명을 가진 그녀는 천만관객을 달성한 적도 있는 영화판의 거장이었다.

마주 고맙다고 말한 민선하가 문득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연재하면서 촬영할 수 있겠어?”

“아, 걱정 마세요. 촬영 일정에 지장 없도록 할게요. 지금도 촬영 전에 비축분 만들려고 가는 거예요.”

“음…….”

서주환의 답에도 민선하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신들린 연기를 보고 그를 뽑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본업 때문에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이채희가 걱정 말라는 듯 민선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서주환에게 말했다.

“괜찮아. 주환아, 얼른 가봐.”

“네. 선하 누나, 다음에 또 뵐게요. 성근이 형, 나 먼저 갈게.”

서주환이 문을 나섰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민선하가 툭 말했다.

“괜찮은 거 맞겠지? 작가들 중엔 글 안 써지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민선하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됐다.

이채희가 맥주를 꼴깔꼴깍 넘기며 말했다.

“선하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환이 쟤는 걱정할 필요 없어.”

민선하는 무척 의외라는 눈으로 이채희를 봤다.

“평이 너무 좋은데? 너 저런 타입 싫어하지 않아?”

“뭐?”

“너 천재과 싫어하잖아.”

“뭐래.”

이채희가 픽 웃었다.

“그럼 너부터 싫어했겠지. 난 천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지 잘난 거 알고 적당히 설렁설렁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거야. 그리고 주환이 걔는… 굳이 따지자면 노력파지.”

그 말에 민선하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농담해? 일주일 만에 연기를 그렇게 하는 애가 노력파? 재능파를 잘못 말한 거지?”

“정확히는 둘 다야.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이라고 했잖아.”

그리 말한 이채희는 지난 일주일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직접 서주환의 연기를 지도했다. 때문에 하루 중 절반 이상을 붙어 지냈다.

절반, 12시간. 서주환의 훈련 시간이다. 그마저도 최소로 잡은 시간이었다.

‘사실 엄청나게 많은 양이냐 하면 그건 아닌데.’

대한민국의 예체능계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치열하다. 노력이라 하면 열 시간은 기본이고 하루 이틀 밤새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습실에서 보내는 모든 생활을 포함한 시간이다.

반면 지난 일주일간의 서주환은 어떠했나.

‘ 순수 훈련량이 평균 열 시간 정도 되려나?’

서주환의 12시간은 밥 먹고 쉬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이 훈련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집중력을 떠올리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당시를 떠올린 이채희의 얼굴에서 살짝 핏기가 빠져나갔다. 서주환의 미쳐버린 순수 훈련량과 집중력은 연기에 목숨을 건 그녀마저도 따라가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하마터면 지도하는 입장에서 먼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그런 애가 일정에 지장을 줘?’

이채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주환이 걘 알아서 잘 할 애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아, 알았어.”

워낙 단호한 기색에 민선하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채희는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오히려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이채희의 눈이 묘한 열기로 들끓었다. 서주환과 훈련을 하는 동안 매너리즘이 다소 가신 덕이었다. 그녀는 이번 영화를 찍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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