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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이 작품을 쓰면서 좀 아쉬운 게
주인공이 순한맛 쓰레기라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19금 물에서는 매운맛 쓰레기가 제일 다양한 전개를 하기 좋은데 말입죠...
*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D
한 걸음
재벌가 친구를 두면 여러모로 편하다. 그런데 막상 그 재벌가 친구는 그에게 ‘인생 더럽게 피곤하게 산다’고 말한다.
“정신병원? 우와 이 미친놈, 어떤 의미론 진짜 대단한 새끼다. 인정 또 인정한다.”
이야기를 들은 이석찬이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는 친구에 대한 리스펙을 아낌없이 할 줄 아는 도량을 가진 남자였다.
“아, 오해하지 마셈. 병신이라고 욕하는 거 맞으니까, 븅신아.”
물론 그 리스펙이 항상 좋은 의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서주환은 재벌가 친구의 도움으로 믿을만한 의사를 손쉽게 소개받았다. 덕분에 일반적으로 한 달 전에는 예약해야 될 것을 3일로 단축했다.
“율아, 가자.”
“네, 오빠.”
이제는 작가님보다 오빠라는 호칭을 더 편하게 부르는 은율이다. 서주환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향했다.
“은율… 아, 여기 있네요. 확인했습니다. 금방 부를 테니까 잠시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두 사람은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의자에 앉아서 대기했다.
서주환은 대기하는 동안 옆에 앉은 은율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율아, 괜찮아?”
“네? 아, 네. 생각보다는요. 오빠가 같이 있어줘서, 그런가 봐요.”
은율이 모자를 꾹 눌러쓰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작게 웃었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눈동자에서 옅은 불안이 보였다. 그녀는 몇 초마다 얼굴을 잘 가렸나 연신 모자와 마스크를 매만졌다.
서주환이 그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자 은율도 시선을 눈치 채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내 그녀는 맞잡은 손에 슬며시 깍지를 끼우며 속삭이듯 말했다.
“손, 계속 잡고 있어도 되죠? 그러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 그걸로 괜찮으면 다행이지.”
“헤헤. 고마워요, 오빠.”
고작 깍지를 끼운 걸로 진정된 걸까. 아니면 ‘안정의 손길’이 충분히 스며든 것일까. 다소 딱딱했던 은율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율 님, 1번 진료실로 들어가실게요. 아, 남자분은 보호자이신가요?”
“네, 제가 보호자입니다.”
서주환은 의아한 표정으로 보는 간호사에게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오늘 은율의 부모님은 함께 오지 않았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른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의사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정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인상적인 여자다. 그녀는 나긋한 손짓으로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은율이 마주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의사가 서주환을 쳐다봤다.
“보호자분도 앉으시겠어요? 꽤 오래 걸릴 수도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저는 김희윤이라고 해요. 앞으로 자주 봐야할 테니까 잘 부탁해요. 보호자님도요.”
앓고 있는 질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정신과의 경우 짧아도 몇 달, 길면 연 단위로 내원을 해야 한다. 그런 만큼 의사와 환자의 거리감도 중요했다.
“아, 네. 잘 부탁, 드려요.”
“잘 부탁드립니다.”
의사는 한동안 차트와 은율을 번갈아보며 그녀가 앓고 있는 질환을 확인했다. 몇 달도 전 은율 혼자서 병원에 갔던 기록과 현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다.
“함구증을 앓고 있다고 되어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좋으시네요. 말더듬이 조금 있긴 하지만 발음도 정확하고 의미 전달도 문제없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공황장애랑 우울증도 기록보다 완화된 것 같고요.”
몇 가지 질문을 마친 의사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후후. 주인님이 옆에 딱 붙어서 케어했으니 당연한 결과죠.]
루시가 으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의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듯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아, 네에. 상태가 좋아진 건, 보름 정도, 됐어요.”
“아뇨. 그거 말고.”
“네?”
의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좀 더 옛날로 돌아가 보도록 해요. 환자분에겐 괴로운 이야기겠지만, 증상이 시작됐을 무렵부터 얘기하죠. 차트에도 대략적인 건 나와 있지만 이건 이전 병원에서 기록한 내용이고… 제가 환자분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직접 듣는 게 나을 테니까요.”
“아…….”
순간 은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괴로운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서주환은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대상자, ‘은율’의 호감도가 ‘A’입니다.]
[스킬, ‘안정의 손길’이 호감도 보정을 받습니다.]
스킬이 적용되고, 은율의 얼굴이 눈에 띄게 안정된다. 그 모습을 본 의사가 조금 놀란 눈으로 서주환을 돌아봤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증상이 시작된 건, 6개월 정도, 됐어요.”
다소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서주환은 안타까움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면 알수록 참…….’
어찌 이리도 자신과 비슷한 건지 모르겠다. 그는 문득문득 은율에게서 회귀 전의 자신이 겹쳐보였다.
‘어째 미련하게 혼자 버틴 것까지.’
당연한 말이지만, 은율에게도 가족이 있다. 하지만 은율의 가족은 오늘 병원에 함께 오지 않았다. 은율이 여러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작정하고 숨긴 다음 집을 나왔으니 가족들 입장에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가족들에게 증상을 알리지 않은 것에는 은율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그녀의 가족은 재혼 가정이었고, 아버지와 계모 사이에서 태어난 열 살 된 늦둥이 동생이 한 명 있었다.
계모라곤 해도 은율의 새어머니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친자식이 태어난 후 그녀에게 다소 소홀해지긴 했지만 두 사람은 나름대로 원만한 모녀관계를 유지했다.
문제는 걸그룹 스윙레이디의 해체 후, 은율이 집에 돌아가고 며칠 뒤에 일어났다. 어느 날 동생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고 울면서 돌아온 것이다. 따돌림의 이유는 누나인 은율이 마약, 학폭, 성상납 추문에 얽힌 스윙레이디의 전 리더라는 사실이었다.
초등학생들의 언어는 고작 열 살 된 아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은율을 칭하길 창녀 내지는 마약돌이라 하였고, 그러한 비난은 은율의 동생에게로 향했다.
비단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덜 된 학부모들이 문제였지.
맘카페 등을 비롯한 학부모 커뮤니티에 은율을 대상으로 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퍼진 것이다. 법적으로 은율은 어떤 혐의도 없음을 판결 받았지만, 본디 사람들이란 진실보단 자극적인 가십거리를 더 쉽게 받아들이는 법이었다.
- 이 새끼들을 싹 다 고소해버릴 수도 없고!
- 여보, 우리 이사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유진이 전학이라도… 율이 소문 때문에 우리 유진이 학교 어떻게 다녀요.
- 뭐? 당신 율이가 잘못했다고 하는 거야?
- 아니, 율이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잖아요! 소문이 그러니까 유진이까지…!
- 으아아아앙!
- 유, 유진아, 엄마가 미안해. 소리 안 지를게.
화목하던 집안에 고성이 오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행히 부부는 금세 화해했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지만, 결국 막내 은유진을 위해 이사를 가고 전학을 갔다. 학부모들에게 해명해봐야 이미 아이들 사이에 퍼진 인식을 고치기는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증상을 자각한 건 그 무렵 집을 나온 후부터란 말이죠?”
은율은 가족의 이사 계획이 잡힌 후 집을 나왔다. 자신이 함께 있으면 이사를 간 후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가족들은 함께 살자고 했지만 은율의 결정은 확고했다.
“네……. 이전에도, 증상이 있었지만, 그냥 악플,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인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은율에게 공황발작이 처음 찾아온 것은 자취방을 처음 얻은 날이었다. 긴장의 끈을 놓자 극에 달한 스트레스가 일시에 터져버린 것이다.
“그 후로, 혼자 병원을 몇 번, 갔었는데… 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서…….”
그때부터 은율은 집밖을 나서는 데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성이 오가던 집이라도 혼자 있는 것과 가족이 함께 있는 건 달랐다. 철저히 혼자가 되자 지독한 우울증과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식사를 거르고, 생활패턴이 망가지고, 수면장애가 생기며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런데도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 한 마디. 이성적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이유 에 서주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단지 걱정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 또한 가족들에게 죽을 때까지 병을 숨기고 지냈었다.
‘죽은 다음에는… 알았겠지.’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다음에야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무슨 심정이었을까. 씻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저 때문에, 두 분이 죄책감… 부모님 또, 싸우는 건… 유진이도… 누나가 정신병…….”
말을 잇는 은율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내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서 유추해야 되는 수준이었다. 완화되었던 함묵증이 다시 도지고 있었다.
은율의 상태를 본 의사는 질문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키보드에서 손을 뗀 그녀는 은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손을 잡고 심호흡을 유도하려 했다.
“은율 씨….”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다시 은율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맞잡은 서주환의 손에 힘을 더하면서였다. 은율이 서주환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가, 살려줬거든요.”
그를 들은 의사의 눈이 크게 뜨이며 서주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의사의 시선을 알아차릴 정신이 없었다.
“…….”
서주환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은율의 눈빛에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감정이 전해져온 탓이었다. 한없이 따스한 눈동자에 그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내 다시 은율을 바라본 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은율 씨, 더 얘기할 수 있겠어요? 힘들면 다음에 해도 괜찮아요.”
“얘기할 수, 있어요. 아니, 얘기하고 싶어요. 이제부터는, 아픈 기억이 아니거든요.”
“…좋아요. 우리 은율 씨가 말하고 싶은 걸 얘기해볼까요?”
이야기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은율의 목소리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끊어졌지만, 이전보다 더 또렷했고, 더 정확했다.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그녀의 표정에선 괴로움보다 미소가 진해졌다.
*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의사, 김희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서주환을 보며 물었다.
“보호자님, 실례되는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아, 네. 그런데 무슨 질문이시길래…?”
허락이 떨어지자 김희윤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음. 혹시 정신병 걸려본 적 있어요? 공황장애라거나 우울증 같은 거요.”
“…네?”
서주환이 눈을 크게 뜨자 김희윤이 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아, 오해하지 마시고요.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니까 은율 씨 상태가 나아진 건 전적으로 보호자님 덕분이거든요.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 정확해서요. 아니, 정석이라고 해야 하나? 마치 직접 앓아본 사람이 도와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아, 혹시 의대 다니세요? 그쪽이 더 설득력 있겠네.”
“하하…….”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이 여자 상태창 열어보면 직감 재능 있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하는 동안 대답을 한 건 은율이었다.
“그건, 오빠가 작가라서 그래요.”
“유, 율아?”
“네? 작가요?”
김희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은율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아힐링 주인공이 저랑 비슷, 하거든요!”
알아듣기엔 너무 단편적인 말이었다. 심지어 은아힐링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줄임말이지 않은가.
서주환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간단하게나마 설명하려는 때였다. 김희윤이 깜짝 놀란 얼굴로 서주환을 돌아봤다.
“헉. 은아힐링이면 은퇴 아이돌의 힐링방송 말하는 거 맞죠? 보호자분이 작가님이었어요?”
서주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는 너는 독자였, 아니, 독자님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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