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독자님들 모두 건강하고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바랍니다 :D
PM11시, 밤 산책
밤 산책을 나선지도 일주일째.
그간 은율의 상태는 빠른 속도로 호전됐다. 예상대로 ‘안정의 손길’을 비롯한 스킬이 그녀에게 특효약이었던 덕분이다. 본래라면 수년에 걸쳐 이루어졌어야 할 정신적, 심리적 안정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진행되었다.
[주인님, 곧 11시입니다.]
저녁 11시는 은율과 밤 산책을 나가는 시간이다.
“벌써? 준비해야겠네.”
서주환은 작업 중이던 파일을 저장했다. 마침 한 단락을 마무리 지은 참이었다. 그렇게 한글파일과 인터넷 창을 종료하려는데, 이메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
서주환은 반색하며 메일을 열었다. 이메일의 내용은 지난 4월에 출품한 문학공모전의 수상 소식이었다.
<구분: 대상 / 작가명: 서애필 / 작품명: 소통의 매개>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함께 메일을 확인한 루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작가명 ‘서애필’은 그의 어머니 서애라와 아버지 서재필의 이름에서 따온 필명이었다.
“축하 고마워, 루시.”
서주환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대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결과로 나타나니 순수하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간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이걸 노력한 덕분이라고 하긴 좀 민망한데.”
서주환은 민망한 마음에 눈꼬리를 긁적였다.
루시의 말대로 노력을 하긴 했다. 실제로 그는 회귀 후 성실하게 글을 써왔다. 단순히 집필활동을 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따로 시간을 내어 새벽까지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것도 시스템 덕분에 가능했던 거지만.’
그는 시스템이 지원해주는 능력과 아이템 덕분에 일반 사람들보다 긴 하루를 살고 있었다. 수면은 3~4시간만 취하면 충분했기에 깨어 있는 시간이 20시간 이상이었고, 그 시간을 알뜰하게 나누어 사용했다.
매일 아침 운동을 가고, 그림을 독학하고, 글을 쓰고, 춤을 배우고, 온갖 문학서적을 섭렵한다.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 백과사전을 완독한 것만 해도 수차례였다. 그 와중에도 제 사람들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아서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힘을 쓰기도 했다.
보통 사람은 소화할 수 없는 빡빡한 일정.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서주환은 특별히 자신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시스템이 있는데 이 정도도 안 하면 그게 병신이지.’
그는 일반 사람들이라면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고작 몇 만 포인트의 지불로 추월할 수 있다. 물론 재능의 등급을 높인다고 해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공부와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마저도 다른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에 비하면 민망한 수준이다. 그걸 동일시하면 염치가 없는 게 아닐까. 그가 아무리 하루를 빡빡하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들이고 있는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이 훨씬 컸으니 말이다.
[주인님, 그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주인님이 해온 노력을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다른 건 몰라도 ‘글쓰기’는 회귀 전부터 계속 해오던 것이잖아요?]
루시는 서주환의 생각을 읽고 염려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은 자만하는 것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서주환은 루시의 말에 작게 웃었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목소리로 말할 것 없어. 별로 이제 와서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건 아니거든.”
[그런가요?]
“응. 지금까지 잘 이용해놓고 그러는 것도 웃기잖아.”
조금 뻔뻔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욕망 시스템은 이 한 몸 희생해서 영웅으로 살았던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그게 비록 기억도 안 나는 전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회귀도 마찬가지. 본래 제 것이 아니었던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피해보상으로 받은 것이다. 서주환은 그 불행 때문에 각종 정신질환과 끔찍한 트라우마를 앉고 살았었다.
“단지 그걸 내 노력만으로 된 거라고 포장할 생각이 없는 것뿐이야. 그건 너무 염치가 없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보다 작은 노력으로 더 큰 결과를 얻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대신 그만큼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정말로 피땀을 흘리며 노력한 누군가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언젠가 후원 재단 같은 것도 하나 만들어야겠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신의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 자기위안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을 후원하고 도와주면 조금은 더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이석찬과 말한 재단 말이군요. 노벨다이스도 그때부터였죠?]
“응. 옛날부터 생각했던 거야.”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 될 때였다.
지이잉!
스마트폰이 울렸다. 액정에 떠오른 발신인은 ‘은율’이었다.
[앗, 주인님! 11시가 넘었습니다!]
“헉. 깜빡했다.”
서주환은 전화를 받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기 너머로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 그으, 오, 오늘은 산책 안 가요…?
“미안, 금방 갈게!”
*
은율은 설레는 마음으로 시계를 바라봤다.
‘10분 남았어.’
저녁 11시는 서주환과 함께 산책을 나가는 시간이다. 언제나 이 시간이 되면 서주환이 집으로 찾아와서 그녀를 데리고 나가곤 했다.
‘빨리 오면 좋겠다.’
고작 10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은율이 서주환과 처음 산책을 나간 건 일주일 전이다. 그 날 이후 11시는 은율에게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은아힐링’의 다음 편이 올라오는 시간보다도 말이다.
그렇게 설렘과 기대로 시간을 보내던 은율은 점점 초조해졌다. 11시가 지났는데도 서주환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산책 안 가는 걸까…?”
항상 11시 전에 오던 서주환이 오지 않는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은율은 초조한 기색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서주환의 성격상 산책을 가지 않으면 연락이라도 줬을 텐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깜빡 잊은 걸까? 먼저 연락해봐야 되나?’
그런 생각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려다가도 멈칫하게 됐다. 혹시나 하고 든 안 좋은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귀찮아진 거면 어쩌지? 너무 바빠서 연락을 못하는 거면… 괜히 전화했다가 방해가 될 텐데…….’
만에 하나라도 그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5분이 지났을 뿐이다. 조금 늦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빨리 오는 날이 있으면 늦게 오는 날도 있는 법이다. 괜히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은율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기다리다가도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깜빡한 거면 어쩌지? 그럼 전화하는 게 맞지 않나? 진짜 안 오면… 그럼 오늘은 한 번도 얼굴 못 보는 거잖아…….’
그리 생각하자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한 번도 얼굴을 못 본다고?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는 부족해. 손도 못 잡았어. 같이 걷고 싶은데. 오늘 못 보면 내일 11시까지 또 기다려야 되잖아. 24시간은 너무 길어.
‘역시 전화하자!’
그런 생각으로 번호에 손을 올리면 또 다시 앞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귀찮아서 안 온 건데 전화하면… 눈치도 없는 애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서로 다른 생각이 순간마다 몇 번이나 뒤바뀌었다.
그러기를 다시 5분.
은율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다. 이대로면 오늘 서주환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잠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저히 잠자리에 들 자신이 없었다.
- 미안, 금방 갈게!
전화를 받은 서주환의 말이었다. 다행히 그는 깜빡 잊은 것뿐이었다.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괜히 재촉해서 죄, 죄송해요.”
- 아냐, 내가 미안하지. 얼른 갈게.
“아니, 제가 죄송… 아, 끊었네.”
은율은 아쉬운 얼굴로 연락이 끊어진 휴대폰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헤헤 웃음을 흘렸다.
“전화하길 잘했다.”
하마터면 그를 보지도 못한 채 하루를 끝낼 뻔했다. 그리됐다면 십중팔구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날밤을 새웠을 것이다.
“빨리 보고 싶다.”
그가 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터다. 가본 적은 없지만 그의 집은 걸어서 10분 거리라고 했으니.
하지만 은율에게는 그 10분마저도 무척이나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항상 11시면 볼 수 있던 그였는데 벌써 11시 15분이었다. 무려 15분이나 지체됐다.
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은율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럼 산책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원래라면 12시까지 함께 안양천을 걷고 돌아온다.
오늘은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그만큼 더 오래 걷는 걸까? 아니면 평소처럼 12시에 산책이 끝나는 걸까?
만약 후자면 어쩌지.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미리 나갈까?’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집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미리 나가는 게 좋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은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채비는 끝내놓은 상태다. 그가 오는 방향도 대충 알고 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
은율의 집으로 향하던 서주환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도착하기도 전인데 은율이 보였기 때문이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긴 했으나 분명 은율이었다.
“율아?”
눈으로 보고도 설마 싶은 마음에 이름을 부르니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오, 오빠!”
그를 발견한 은율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앞에 섰다.
서주환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혼자 여기까지 왜 나왔어? 금방 간다니까.”
“…….”
은율은 차마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라고 답하지는 못했다.
서주환은 말없이 있는 그녀를 보다가 픽 웃으며 말했다.
“많이 발전했네. 혼자 나올 줄도 알고.”
“…오빠 덕분이에요.”
은율은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혼자 나온 밖은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그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럼 갈까?”
그리 말하며 손을 내민 서주환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손은 필요 없으려나? 혼자 나올 정도니까.”
말과 함께 짐짓 거두어지려는 손.
“?!”
화들짝 놀란 은율은 재빨리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곤 사탕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피, 필요해요, 손.”
“그래?”
“네…!”
대답과 함께 크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고개.
서주환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은율은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모자를 쓰고 나오지 말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와서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억울하기까지 했다.
‘손이라도…….’
그런 마음으로 손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그러다 무심코 깍지를 끼우고 말았다.
“아……!”
먼저 깍지를 껴놓고 놀란 소리가 나왔다.
은율은 제 풀에 놀라 흠칫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끔뻑이며 웃기만 했다. 왜? 하고 눈으로 묻는 말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 끼우고 있어도 되겠지?’
괜찮을 것이다. 싫었으면 말을 했겠지. 거부당하지 않았으니까 계속 깍지를 끼우고 있어도 될 터였다.
“…….”
은율은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사히 오늘도 손을 맞잡은 채 안양천으로 밤 산책을 나선다. 선선히 불어오는 봄바람이 기분 좋았다.
서주환은 그런 은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슬슬 때가 된 것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