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384화 (38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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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서주환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가브리엘라를 바라보는 파비오는 한탄스럽다.......

*

한 번 회귀 전 시점의 뒷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볼까 합니다.

참고로 외전의 은율은 현 시점보다 2년하고 6~8개월 정도 지난 시점입니다.

유지경처럼 외전으로 쓸까도 싶었지만 그 시간에 본 편을 쓰는 게 나을 것 같네요 ㅎㅎ;;

읽지 않아도 무방한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스포 없어요!

*

<회귀 전 시점 은율>

은율이 서주환의 옆집으로 이사 온 시기는 1월입니다. 서주환이 2학년을 앞두고 집구석에서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죠.

당시의 서주환은 각종 불행과 한수아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으로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정신질환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미 정신과에 통원을 한 지 1년 가까이 된 시점이죠.

서주환과 은율은 바로 옆집에 살았지만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건 몇 달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은율이 극단적으로 집에 틀어박혀 있었거든요.

본편에서는 서주환이 은율의 공황발작을 발견하지만, 반대로 뒷이야기에서는 은율이 서주환의 발작을 보게 됩니다. 어느 날 용기를 내 집 밖으로 나온 날이었죠.

그때부터 은율은 홀로 서주환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성적 호감은 아니고 자신과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죠.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서, 자신보다 불행하거나 힘들게 사는 사람을 보면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은율도 자신과 비슷한 증세를 가진 서주환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어쩐지 위안을 받았습니다. 자신만 힘든 게 아니라는 데서 오는 다소 이기적인 위안이었어요.

이후 은율은 보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하기 시작합니다. 밖에 나가는 게 두려워 간헐적으로만 다니던 병원에 꾸준히 나가기 시작했고, 집에서나마 운동을 시작했으며, 없는 식욕에도 건강을 위해 억지로 밥을 먹었습니다.

은율은 집에서 일부러 혼자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함묵증이란 선택적 함구증이라고도 하여 특정 상황, 장소에서만 말을 더듬거나 장애가 생기는 것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 단어만이라도 똑바로 말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단어를 외웁니다.

"안녕하세요."

질환을 앓은 이후 은율이 밖에서 처음으로 사람에게 한 말입니다. 집안에서 홀로 끊임없이 외운 말이기도 하지요.

물론 그 말을 한 대상은 서주환이었습니다.

은율에게 있어 서주환은 어느 정도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이해자였고, 자신의 병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 대상이었습니다.

약과 치료, 운동, 훈련 등을 통해 은율은 몇 년에 걸쳐서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함구증, 우울증 등의 증상을 점차 극복해나갑니다.

그러는 와중 내심 훈련 대상으로 삼은 서주환에게 홀로 호감을 갖게 됩니다. 이렇다 할 접촉이나 대화는 없었지만 의사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눈 게 서주환이었기 때문이죠. 자신이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던 것 또한 서주환 덕이라는 생각에 내심 마음의 빚도 있었고요.

그렇게 서주환이 4학년이 되고 꽤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은율이 어느 정도 일상적인 회화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저 사람이랑 대화해보고 싶어.'

은율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서주환에게 말을 걸고자 합니다. 그가 궁금했고, 친해지고 싶었고, 내심 갖고 있는 죄책감과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서주환의 주변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지경이죠.

항상 혼자 다니던 서주환의 옆에 여자가 따라다니자 은율은 홀로 마음을 접고 뒤로 물러납니다. 어느 정도 질환을 극복했다지만 누군가와 경쟁하기엔 아직 겁이 났던 겁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그가 먼저 부탁을 해옵니다.

유지경이 찾아오면 자신이 이사를 갔다고 거짓말을 해달라는 부탁이었죠.

은율은 그의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그녀에게 있어 낯선 사람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내심 마음의 빚이 있는 서주환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필사의 노력으로 은율은 무사히 거짓말을 성공합니다.

"해, 해냈어. 휴우."

유지경이 돌아간 뒤 문 뒤에 주저앉아 안도의 숨을 내쉬는 은율입니다.

얼마 후.

서주환은 정말로 이사를 갔고, 그렇게 은율과 서주환의 인연은 끝납니다.

결론: 은율 혼자 짝사랑(?) 하다가 끝남.

*

사실 서주환은 설정 상 회귀 전에도 은근히 인기가 많았던...... 그냥 재수가 오지게 없었을 뿐이죠.

*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D

PM11시, 밤 산책

은둔자(Hermit)를 긍정하는 점괘.

장난스럽게 대화하긴 했으나 S급 점술 재능을 가진 가브리엘라의 조언이다. 결코 쉬이 흘려들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뭘 뜻하는 걸까.’

가브리엘라도 정확한 뜻을 풀이하지는 못했다. 당사자가 직접 카드를 뽑은 게 아닌 그녀가 임의로 본 점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진 것이다.

[한 번 정리해보도록 하죠.]

루시가 말했다.

[점(占)에서 은둔자가 의미하는 것은 심려, 충고를 받다, 붕괴. 타로 점의 정위치는 탐색과 사려 깊음. 역위치는 음습, 폐쇄, 탐욕을 뜻합니다.]

“가브리엘라가 본 건 타로 점이야. 정위치였고.”

[그럼 탐색과 사려를 말함인데, 가브리엘라는 은둔자라는 단어 자체의 뜻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은둔자란 말 그대로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은둔(隱遁)이란 세상에서 숨어 지낸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그걸 긍정하는 점괘라 했지.”

[그렇다면 ‘세상으로부터 숨어서 충분히 탐색하고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한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네요.]

“그 대상은 나랑 엮인 은율 씨일 테고.”

[숨어 지내야 할 사람이 주인님일 가능성은 없겠죠.]

“그래. 포인트를 모으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주목받게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은둔자가 나를 가리키는 거라면 이전의 점괘 내용과 상반돼.”

가브리엘라가 그의 점괘를 봐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는 연락을 하기 위한 핑계로 종종 그에 대한 점괘를 봐주곤 했다.

언젠가 점괘에서 가브리엘라는 이렇게 말했다.

‘주환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문화와 예술계의 거장(巨匠)이 될 거예요. 개인의 힘으로 엄청난 부(富)를 쌓을 테고, 그런 부 따위가 중요치 않은 대단한 사람이 될 테죠. 지금은 비교적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주환도 느끼고 있을 거예요. 주환이 적당히 능력을 감춰도 점점 수면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걸.’

가브리엘라의 말 대로였다. 이제까진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싶어서 크게 나서지 않았으나 점점 포인트의 필요도가 커지면서 방송과 위튜브에까지 손을 댔다.

그나마도 조절한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메일함에 가득 쌓인 연예기획사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아직도 그를 탐내고 있는 리액트 엔터의 배성근을 통해 배우 데뷔를 할 수도 있었다.

사실, 이미 쓰고 있는 소설만으로도 그는 점점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협소한 웹소설 판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가브리엘라는 이렇게도 말했다.

‘주환에게는 행운, 전환기, 향상을 의미하는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가 깃들어 있어요. 이 힘은 아주 강력해서 주환과 엮인 사람의 운명까지 전환점을 맞게 하죠. 그리고 이것만큼 강하게 깃든 운명이 하나 더 있어요. 바로…….’

라이더 웨이트 덱의 마지막 21번 카드.

The World(세계, 우주).

완성, 약속된 성공, 나그네.

‘방랑벽 한 번 참 대단하네요. 무슨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겠다는 건지. 또 이런 운명을 지닌 사람이 고작 대학생활을 하겠다고 숨죽이고 있다니.’

그리 말한 가브리엘라는 ‘The World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변화가 시작된다는 뜻이리라.

서주환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확언했다.

“그러니까 은둔자는 내가 아니라 은율 씨를 가리키는 걸 거야. 그리고 퀘스트에서 이르길 은율 씨가 바라는 건 무대로의 복귀라고 했었지.”

[하지만 가브리엘라는 세상으로부터 숨어서 신중을 기하라고 했지요.]

서주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번 퀘스트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장기적으로 진행하던가.”

본래 계획은 은율의 질환을 호전시킴과 동시에 이석찬 혹은 배성근의 도움을 받아 연예계로 복귀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라의 점괘로 추측컨대 섣불리 연예계 복귀를 시도했다간 은율의 상태가 더 악화될 듯했다. 그나마 작게 피어난 용기마저도 꺾일지 몰랐다.

‘내 생각이 너무 짧았어.’

너무 욕망 퀘스트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말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섣부른 복귀가 그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석찬이랑 성근이 형 빽을 쓰면 복귀야 가능하겠지만 결국 비난의 목소리는 나올 거야. 그걸 감당해야하는 건 은율 씨고.’

연예계 복귀의 가능 여부와는 별개로 비난의 목소리는 반드시 나올 것이다. 실질적으로 은율이 무죄라 할지라도 한 번 꼬리표가 된 추문은 평생을 따라다닐 터. 조금 상태가 호전된 정도로는 그런 비난을 견디지 못할 게 뻔했다.

[가브리엘라의 연락이 와서 다행이군요.]

“응. 목적을 헷갈릴 뻔했어.”

욕망 퀘스트란 사용자와 주변인의 욕망에 반응하여 만들어지는 것. 그가 바라는 것은 보상 그 자체보다 은율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있었다. 100만LP라는 보상은 적지 않은 수치였지만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

서주환은 그 날부터 은율과 개인적으로 연락을 나누기 시작했다. 다만 서주희와 한수아, 장덕훈은 함께 하지 않았다. 그 개인적으로는 은율에게 다른 친구들까지 모두 소개시켜주고 싶었으나 그녀는 아직 서주환을 제외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와의 교류조차도 까톡과 문자를 이용한 소통이 전부였다.

- 은율: 작가님, 오늘도 재밌게 잘 봤어요!

- 나: 고마워. 그런데 아까 댓글로도 달지 않았어?

- 은율: 직접 말하고 싶어서요ㅎㅎ

엄밀히 말하면 까톡도 직접 말하는 건 아니지 않나?

서주환은 눈꼬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안 좋은데.’

벌써 열흘이 지났음에도 호전된 게 거의 없었다.

대화를 많이 나누면 뭐하나. 까톡이 전부인 것을.

직접 공황장애를 겪어봤던 사람으로서 판단컨대 이대로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봐야 더 나아질 게 없을 것 같았다.

‘까톡으로만 대화를 나누니 스킬이랑 특수능력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겠고.’

그에게는 은율을 보다 빠르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이 있었다.

우선은 ‘페로몬(pheromone)’ 스킬.

페로몬은 이성의 생리, 흥분작용을 조절함은 물론 흔히 행복 호르몬이라 부르는 세로토닌과 같은 성분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여 우울증을 막아주기도 한다.

여성들이 서주환에게 본능적인 호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함께 있기만 해도 우울감과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인체의 신진대사까지 긍정적으로 변화하니 본능적으로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성스러운 손길’이다.

성스러운 손길은 서주환의 밥줄과 같은 스킬이었다. 이를 이용하면 접촉 부위와 시간에 따라 여성의 흥분도를 올릴 수 있다. 또한 긴급 상황 시 자잘한 상처쯤은 단번에 치유할 수 있었으며, 마사지를 통해 몸의 피로를 풀 수도 있었다.

그 중 은율에게 필요한 건 심신을 안정시킬 수 있는 ‘안정의 손길’이었다. 이를 사용하면 공황발작 정도는 두려울 게 아니었다.

손길과 이름이 비슷한 ‘성스러운 씨주머니’도 빼놓을 수 없다.

스킬등급이 A+이른 성스러운 씨주머니는 이제 질내사정 대상의 체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킨다. 한 번의 상승폭은 결코 높지 않고 개인마다 지닌 육체적 차이점에 따른 한계선이 있었지만, 현재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은율에게는 특효약일 터였다.

‘거기에 이제는 상대의 정력까지 상승시키니까 정신질환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정력(精力)이라 함은 흔히 남자의 성적 능력을 뜻하지만 동시에 심신의 활동력을 뜻하기도 한다. 어쩌면 페로몬이나 성스러운 손길보다 이 효과 한 가지가 은율을 회복시키는 데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수단을 가지고 있어도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용기를 내겠다던 은율은 생각만큼 적극적이지 않았고, 그와 까톡으로 소통하는 데에서 이미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회귀 전에는 좀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은데.”

현재 은율의 상태와 회귀 전 은율의 상태는 다소 차이점이 있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이맘때쯤의 그녀는 그에게 먼저 인사를 해왔었다. 당연히 문자가 아닌 육성으로 말이다. 또 지금의 그녀는 불과 열흘 전에서야 집밖으로 나온 반면 회귀 전의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쯤 밖으로 나와서 고갯짓으로나마 그와 인사를 나누었었다.

‘회귀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옆집에 살던 자신의 존재. 그리고 회귀 전에는 연재되지 않았던 ‘은퇴 아이돌의 힐링방송’이라는 작품.

서주환은 설마 싶은 마음에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히려 내가 악영향을 준 건가?”

퀘스트의 설명과 은율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있는 동안 ‘은퇴 아이돌의 힐링방송’을 접하고 집밖으로 나올 용기를 얻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매화 마다 장문의 감상문을 남길 정도로 은아힐링의 엄청난 팬이었다. 그래서 서주환은 자신의 작품이 그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작품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현실에서의 적극성이 줄어든 것이라면? 오히려 다른 긍정적인 계기가 찾아왔을 기회를 없애버린 것이라면?

“그게 말이 되나? 아무리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지만 너무 비약인 것 같은데…….”

납득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젓는 서주환.

그러나 이런 서주환의 생각은 의외로 정답에 가까웠다. 그는 알 수 없었지만 회귀 전 그녀가 밖으로 나올 용기를 얻은 계기는 당시 공황장애를 앓고 있던 그가 발작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밤중에 몰래 택배를 가지러 나왔다가 복도에서 공황발작을 진정시키고 있는 그를 본 것이다.

그때의 은율은 자신과 같은 증세를 앓고 있는 그를 우연히 목격했고, 동질감을 느꼈으며, 자신만 힘든 게 아니라는 데서 오는 다소 이기적인 위안을 받았다. 또한 그 위안은 서주환을 향한 관심으로 바뀌었고, 작은 용기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었다.

하지만 이번 생의 서주환은 공황장애를 겪지 않았다. 오랜 세월 반복된 불행으로 정신적인 불안함과 트라우마는 가지고 있었으나 현 시점에서는 이미 극복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지금 은율의 옆집에 사는 것은 서주환이 아닌 그의 친동생 서주희였다.

그렇기에 은율이 좀 더 빠르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계기가 사라졌고, 그것은 ‘은아힐링’이라는 작품으로 대체되었다.

이렇듯 몇몇 조그마한 변화가 은율이 밖으로 나오는 시점을 뒤로 늦춘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서주환이 알 수 없는 이야기. 그때의 은율은 멋대로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었던 것뿐이었으니.

[악영향이라니 비약이 너무 심합니다, 주인님,]

루시가 말했다.

서주환은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그치? 시스템은 내 소설이 은율이한테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했잖아.”

[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주인님의 회귀 전과 달라진 부분은 있을지언정 그녀가 주인님 덕분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만큼은 사실이에요.]

“음. 그럼 안심해도 되는 거겠지? 혹시 나 때문에 더 안 좋아진 거면 어쩌나 했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만에 하나 그렇다 해도 주인님께서 회귀 전보다 더 빠르게 치료해줄 거잖아요? 괜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응, 그래야지.”

서주환은 그리 대답하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지금까지는 얌전히 기다려주었지만 이제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였다.

*

은율은 요즘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여전히 간헐적으로 발작이 찾아오거나 우울감이 몸을 지배하곤 했지만, 소설을 보는 것 외에도 삶의 낙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작가님이랑 까톡을 할 수 있다니.’

성덕이라는 게 이런 걸까? 우연한 만남은 그녀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두통이 많이 줄어들었어. 요즘은 밥도 조금 많이 먹고 있고. 아, 작가님은 식사 하셨을까?’

문득 궁금한 마음에 까톡을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 식사 하셨나요? 뭐 드셨어요?

하지만 생각만 하고 보내지는 않았다. 이미 오늘 여러 번 까톡을 보내지 않았던가. 혹시라도 작가님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된다. 그러다 자신을 귀찮아하시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으으음. 참자. 방해하면 안 돼. 호의가 권리인 줄 알면 안 되는 거니까.”

작가님에게 까톡을 하는 건 증상이 심해졌을 때다. 발작이 찾아올 것 같을 때,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몸을 지배할 것 같을 때 까톡을 보내자. 그러면 거짓말처럼 상태가 호전되니까.

그게 아니라면 괜히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힉! 자, 작가님?”

은율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까톡도 문자도 아닌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그 서주환 작가님에게!

“어, 어떡…해. 바, 받아, 버렸어…….”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고 말았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니 멀쩡하던 목소리가 떨려나오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율아?

은율은 안절부절하다가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이미 받았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작가님이지 않은가. 무어라 인사라도 해야 했다.

“여, 여보…세요?”

- 아, 율아.

“네, 네. 작가, 니임.”

- 갑자기 전화 걸어서 미안해.

“아, 아니, 괜찮…….”

은율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에게 서주환은 그저 한없이 고마운 사람이다. 무기력함에 젖은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은인이었다. 미안하단 말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서주환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 괜찮다고 해줘서 고마워.

“아, 아니! 제, 제가 고마, 워요…!”

- 응?

“저, 오늘도, 소설 봤… 위로, 용기…….”

은율은 그리 말하며 울상을 지었다.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목소리가 떨려서 단어가 끊어져 나온다. 정박아도 아니고 제대로 된 대화조차 이어가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결코 그런 그녀를 답답해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 알아들었다는 듯 따듯한 목소리로 말해온다.

-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아…….”

- 나도 율이 네가 항상 남겨주는 댓글이 위로가 되거든. 알다시피 모든 독자들을 만족시킬 순 없는 거고, 악플은 어디에나 달리잖아. 그럴 때면 율이 같은 독자님들의 댓글이 힘이 돼.

서주환의 말에 은율은 인상을 찡그렸다. 언젠가 은아힐링에 달린 악플이 떠올라서였다. 그건 비판이 아니라 어떤 타당한 이유도 없는 비난이었다.

은율은 언젠가 자신에게 쏟아지던 악플이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심정을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그런 아, 플, 신경, 없어요!”

- 그런 악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네!”

- 큭큭. 고마워. 은율이 네가 이렇게 크게 말하는 거 처음 듣는다.

“아, 으.”

- 듣기 좋아서 한 말이야. 율이 너 목소리 좋잖아. 노래할 때 음색도…….

“…짓말.”

은율은 ‘노래’ 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다 흠칫 스스로 한 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불쾌했으면 어쩌지. 아니, 조그맣게 중얼거렸으니까 안 들렸으려나? 부디 안 들렸기를.

- 거짓말 아닌데.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어.

“아…….”

은율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대체 그 조그만 목소리를 이 사람은 어떻게 다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다. 거기에 이상하게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니 거기에 대고 다시 부정할 수도 없었다.

- 뭐, 그 말 하자고 전화한 건 아니고. 따로 할 말이 있어서.

“네, 네.”

- 흠흠. 율아.

한 차례 숨을 가다듬은 서주환이 말했다.

- 앞으로 나한테 까톡하지 마. 문자도. 대신…….

“아……?”

은율의 입에서 새된 신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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