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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D
설 연휴
제사가 끝나고 한 상 가득 설음식이 올라왔다.
서주환은 떡만두국에 밥을 말아서 한 숟갈 들었다. 겉절이 김치까지 쭉 찢어서 함께 먹으니 입맛이 진하게 돌았다.
하지만 마음 편히 식사를 이어가기에는 그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친척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이 입을 열기도 전, 올해로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서미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자가 귀한 서 씨 집안에서 예쁨을 받는 막내였다.
“주환 오빠, 나랑 사진 하나만 찍어주라.”
“사진?”
“응응. 이 모델 오빠 맞지?”
서미진이 내민 폰을 보자 기시감이 떠올랐다. 엊그제 차 안에서 이거 너 맞냐며 폰을 내밀던 우서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 맞아. 그런데 미진이 너희 또래도 스완에서 옷 사니?”
“응, 옷이 예쁘잖아. 요즘 내 친구들 다 여기서 옷 사. 나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스완에서 산 거다?”
“어, 진짜네?”
최근에는 스완에 신경을 안 썼는데 생각보다 이용자가 더 많은 듯했다. 어쩐지 계속 포인트가 들어오더라니.
“사이트 들어갔는데 오빠 얼굴이 있잖아. 깜짝 놀랐다니까? 처음에는 오빠 아닌 줄 알았어.”
“메이크업 해서 그래. 화장빨이지, 화장빨.”
“그런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보다 그거 진짜야? 피팅 촬영하다가 리액트에서 배우로 캐스팅 받았다면서? 맞다, 나 사진 찍어줘, 빨리.”
궁금한 게 무에 그리 많은지 이야기가 중구난방이었다.
서주환은 상 너머에서부터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여동생을 진정시켰다. 이러다 어른들한테 혼날라.
“제의 받긴 했는데 거절했어. 그리고 사진은 밥 다 먹고 찍자. 나 어디 안 도망가. 응?”
그렇게 막내를 진정시키고 다시 밥을 한 숟갈 뜨려는 때였다. 이번에는 어른들이 말을 꺼냈다. 이제 보니 다들 이야기에 끼어들 틈만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주환이 너 작가라고 하지 않았니? 쇼핑몰 모델도 했어?”
“배우 캐스팅은 무슨 말이야?”
“환아, 네 소설 웹툰화 된 거 있잖느냐. 빙의사부. 그거 그리시는 분이 혹시 강필춘 선생님 아니시냐? 왜, 옛날에 무도라는 필명을 쓰셨던.”
“그래, 나도 그거 궁금했다. 화객이 무도 맞지?”
“형, 요즘 인터넷 방송도 하죠? 저 얼마 전에 후원도 했어요. 저 춤 좀 알려주면 안 돼요?”
“기사 봤다. 사업을 한다던데, 혹시 도움 필요하면 말해라. 내가 웹소설은 몰라도 기본적인 조언 정도는…….”
질문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날아들었다. 관심의 대상이 된 건 나쁘지 않지만 식사를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부모님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으나 두 사람은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서주희는 쌤통이라는 듯 혀를 내밀고 있고.
그때 탁, 하고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최연장자인 서만식이다. 그가 하얗게 센 눈썹을 찌푸리며 좌중을 쓸어봤다.
“밥상머리 앞에서 뭐하는 짓들이냐. 애 아직 밥도 다 못 먹었다. 보는 내가 다 체하겠구나.”
그 말로 끝이었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물론 어른들도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식사에 열중했다.
서주환은 한숨을 돌리며 할아버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에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서만식이 말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라고 했다. 한 결 같이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는 뜻이야. 무엇이 됐든 열심히 하거라.”
“예, 할아버지.”
“나도 재밌게 보고 있다.”
“…네?”
서주환은 조금 놀란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설마 연세가 칠순을 넘은 할아버지께서 제가 쓴 글을 봤단 말인가?
그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옆에 있던 서재필이 팔을 툭 건드렸다. 서주환은 그제야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열심히 쓸게요.”
“그래.”
식사가 이어졌다.
*
아버지, 서재필이 말했다.
“점잖은 체 하시지만 사실 네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할 거다.”
“제 소설을요?”
“그래. 저번 추석에 나한테 어떻게 하면 네 소설을 볼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더라. 단행본을 그 자리에서 다 사셨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그때 집에 남는 거 있었는데.”
“나도 말은 해봤다. 그런데 거절하셨어. 손주가 쓴 책이니까 직접 사고 싶으셨던 거겠지.”
서주환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와는 대화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제껏 할아버지란 그저 집안의 어려운 어른이었을 따름이다.
서재필이 픽 웃었다. 서주환과 꼭 닮은 웃음이었다.
“할아버지가 옛날에 글을 쓰셨거든.”
“정말요? 처음 듣는 얘긴데.”
“나도 잘은 몰라. 돌아가신 네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가족을 부양한다고 이미 공장에서 일하고 계셨거든.”
“그럼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글 쓰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겠네요?”
“그래. 뭐, 그래도 미련은 남으셨던 모양이지만.”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 이름만 봐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냐?”
“아.”
재필(才筆). 글씨나 문장을 재치 있게 쓰는 사람.
확실히 그의 아버지 서재필의 이름에는 할아버지의 바람이 어느 정도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도 책 읽는 건 좋아해서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이름과 다르게 글을 쓰는 데 재주가 없어서 아쉬웠지.”
확실히 서재필의 보유 재능에는 글쓰기에 관련된 재능이 없었다. 할아버지인 서만식도 마찬가지. 하고 싶은 일과 재능이 일치하지 않는 건 흔한 일이었다.
서재필은 기특하다는 듯 아들을 보며 말했다.
“그런 할아버지 입장에서 손주인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됐으니 얼마나 좋았겠냐.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 할아버지가 더 기뻤을 게다.”
“정말 그랬겠네요.”
“그러니까… 네가 할아버지 말 상대 좀 해드려라. 나랑 얘기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실 거다. 가끔이라도 괜찮아.”
서주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볼게요.”
“고맙다, 아들.”
“저야말로 감사해요.”
“응?”
“저 스무 살 때, 글 쓰는 거 지지해주셨잖아요.”
스무 살. 기껏 대학에 합격하고도 글을 쓰겠다며 바로 휴학을 했던 때다. 부모 입장에서 좋게 보일 수가 없는 결정. 당연하게도 어머니는 휴학을 반대했었는데, 왜인지 서재필은 그의 결정을 지지해주었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서주환은 피식거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그는 서만식과 세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눈 참이었다.
‘할아버지한테 그런 귀여운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네.’
회귀 전에는 그저 엄하고 예를 중시하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한데 막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할아버지는 책이라는 관심사가 나오자 아닌 척 하면서도 즐겁게 말을 이어가셨다. 고사성어를 이용한 설교 외에 이토록 길게 말씀하시는 걸 들은 건 처음이었다.
‘김 선생님 싸인을 꼭 받아와야겠어.’
얼마 전에 김현영 작가님과 만났다고 했더니 어찌나 놀래시던지. 은근하게 싸인을 원하시냐고 물어보니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셨다.
서주환은 다른 방에서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서재필을 찾았다.
“아버지.”
“이제 나오는 거냐? 생각보다 오래 걸렸구나.”
“얘기하다보니까요. 그보다 아버지, 할아버지한테 스마트폰 하나만 장만해주세요.”
“스마트폰? 할아버지가 사달라더냐? 분명 복잡해서 쓰기 싫다고 했었는데.”
“폰으로도 소설을 볼 수 있다니까 갖고 싶은 눈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드린다고 밀어붙이니까 됐다면서 쫓겨났어요.”
“알 만하구나.”
서재필은 잇 사이로 큭큭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돈을 잘 번다고 해도 손주 돈은 받기가 싫으셨던 모양이다. 그의 아버지는 여느 노인들이 그렇듯 이상한 고집이 있으셨다.
그때 한쪽에 정좌하고 있던 서정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형, 그런 거면 스마트폰 보단 테블릿이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이북 리더기나. 그게 훨씬 보기 편하잖아.”
“오, 좋은 생각이네. 그냥 폰이랑 테블릿 둘 다 사드려야겠다. 아버지, 제가 돈 드릴게요.”
“됐다. 내가 알아서 하마.”
서재필이 손을 내저으며 할아버지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서주환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서정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정호는 여전히 예의바르게 정좌한 자세로 배가 부른 작은 어머니 옆에서 수발을 드는 중이었다. 그 옆에 있는 작은 아버지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정호야.”
“어?”
“형이랑 얘기 좀 하자. 작은 어머니, 정호 좀 잠깐 빌려가도 될까요?”
김순애는 힐끔 서정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옆에 있는 남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래, 주환아. 오늘은 우리 남편 있으니까 괜찮아. 그치?”
그 물음에 작은 아버지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정호야, 다녀와라.”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고 보기엔 너무나 어색한 부름이다. 이름을 불린 서정호도 무척이나 어색한 얼굴로 인사했다.
“그, 다녀올게요.”
서주환은 묘한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좀 괜찮아졌나 보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서정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오늘 검사해야지?”
주머니 안에 넣어둔 금연 테스트기를 만지작거리면서였다. 서정호는 지난 추석 그와 금연을 약속했었다.
‘자식, 담배 안 끊었으면 용돈 없을 줄 알아라.’
*
테스트기에 붉은색 선이 한 줄 나타나면 양성, 두 줄 나타나면 음성이다. 이내 화장실에 다녀온 서정호가 당당하게 테스트기를 내밀었다.
진한 붉은색 선이 두 줄. 음성이었다.
서주환은 씩 웃으며 서정호의 등을 두드렸다.
“짜식, 힘들었을 텐데 열심히 했다?”
“당연하지. 임산부 옆에서 담배 냄새 풍길 순 없으니까.”
“전에는 살이 좀 찐 거라고 하더니만.”
“그, 그때는 몰랐어. 4개월인데 배가 그것밖에 안 나왔을 줄은 몰랐다고.”
“3개월이 아니라 4개월이었어?”
“어. 지금 35주래.”
35주면 만삭이 가까워졌다. 배가 많이 나와서 거동도 불편할 때였다.
“작은 어머니 여기 있어도 괜찮으신 거야? 그냥 집에 있으시지 힘들게 왜 오셨대. 아무도 뭐라고 안 했을 텐데.”
“그게, 오늘은 아버지도 같이 왔잖아. 그래서 일부러 오신 거야. 친척들한테 괜찮은 모습 보여주고 싶어서.”
“아아. 그것 때문에.”
서정호의 가족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위태로운 분위기였다. 크게 아팠던 아버지가 해고를 당한 후 가정이 힘들어진 게 시작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수술을 했음에도 간헐적으로 시달리는 고통 때문에 술에 절어서 살았고, 점점 피폐해지는 정신으로 아내와 아들에게 못할 말을 쏟아냈다. 한 번은 서정호가 정신 좀 차리라고 대들었다가 손찌검을 당했다던가.
가정환경은 성장기 아이들에게 중요하다. 당시의 서정호는 살얼음 같던 집안 분위기 때문에 예민해진 상태였고, 자그마한 갈등에도 또래 아이들과 마찰을 빚었다.
“요즘도 애들 때리고 다니진 않지?”
그 물음에 서정호가 기겁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형. 나 원래 애들 안 괴롭혔다니까? 먼저 시비 거는 놈들이랑만 그런 거야. 다 일진 놀이하는 놈들이었다고. 그리고 나도 싸우기 싫은데 그놈들이 계속 찾아와서…….”
학창시절 싸움이란 게 한 번 시작하면 멈추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일진이니 하는 양아치 놈들이랑 얽히면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서주환은 낄낄 웃으며 서정호의 머리를 헝클었다. 지난 추석에는 샛노랗던 머리가 까매져 있었다.
“그러게 싸움도 못하면서 왜 시작을 했어.”
“헐. 나 어디 가서 싸움 못한다는 소리 들은 적 없거든? 지금도 우리 학교에서 내 이름 모르면 간첩이야.”
“자랑이다, 새끼야.”
빡, 하고 서정호의 뒤통수를 후렸다. 그에 억, 하고 뒤통수를 잡은 서정호가 억울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서주환은 픽 웃으며 지갑에서 오만 원 지폐를 몇 장 꺼내들었다. 죽상이던 서정호가 활짝 웃는 얼굴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며 말했다.
“형, 내가 존경하는 거 알지?”
“인마, 돈이 아니라 나 존경하는 거 맞냐?”
“그럼. 난 아버지보다 형이 더 존경스러워.”
“헛소리 말고. 용돈은 금연 성공했으니까 주는 거야. 곧 동생 생길 텐데 앞으로도 피우지 말고.”
“당연하지. 내가 뭐 때문에 개고생하면서 끊었는데.”
용돈을 받아든 서정호가 희희낙락하며 지폐를 셌다. 생각보다 많은 양에 곧 헉, 하고 놀란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많이 줘도 돼?”
“형 돈 잘 번다.”
“그야 알지. 그런데 그… 저번에 우리 엄마한테도 돈 보내줬다면서.”
“…알고 있었냐?”
“엄마가 말해줬어. 형네 아버지랑 어머니도 따로 도와주셨다고 하더라. 사실 그 얘기 안 들었으면 금연 못 했을 거야. 고마워, 형.”
사내 놈이 부담스럽게 글썽거리는 눈으로 보기는.
서주환은 괜히 민망해져서 눈꼬리를 긁적이다가 서정호의 등을 팡 하고 두드렸다.
“너무 고마워할 거 없어. 옛날에 우리 집 힘들 때 너희 어머니랑 아버지가 도와줬었거든.”
“그래도.”
“고마우면 작은 어머니한테 잘해. 작은 아버지한테도.”
“…노력 중이야. 아버지랑도 요즘은 괜찮아. 얘기해보니까 술 담배 끊은 지 몇 년 됐더라고.”
“그래, 훨씬 좋아 보이더라.”
지난 추석에는 ‘아버지’를 ‘그 인간’이라 언급하던 서정호다. 그때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개선된 상태였다.
“아기 태명이 행복이라고 했지?”
“응. 내가 지었어.”
“그래? 무슨 뜻으로 지은 건데?”
“말하기 좀 그런데.”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는 서정호.
서주환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저번 추석 때 맞고 있는 거 들켰을 때보다 더?”
“아, 형!”
“알아따따.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
“그, 내가 행복하게 해줄 거거든. 행복이는 불행한 일 없이 행복한 일만 있으면 좋겠어.”
“여동생이라고 했지? 좋은 오빠 되려면 열심히 해야겠네.”
“응. 그리고 뜻이 하나 더 있어.”
“뭔데?”
서정호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행복을 가져다 준 아이. 우리 막내 덕분에 가족이 다시 행복해졌잖아. 내가 엄마, 아버지랑 제대로 얘기하게 된 것도 다 막내 덕분이거든. 그래서 행복이야. 우리 가족한테 행복을 가져다 줬으니까.”
행복을 가져다 준 아이라.
“의미도 있고 좋네.”
“그치?”
서정호가 활짝 웃었다. 이전의 그늘과 독기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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