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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페티시가 보여-330화 (3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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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꿈, 그리고 행복

가브리엘라에게 허락된 열흘 중 대부분이 지나갔다.

지난 시간 동안 가브리엘라는 서주환을 따라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이전의 뒷조사를 통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서주환의 절친인 이석찬이었다. 그는 이미 가브리엘라를 알고 있는 듯 먼저 찾아오더니, 장난기와 흥미가 깃든 눈으로 그녀를 탐색했다.

가브리엘라는 질문했다.

“엉? 왜 후계경쟁을 때려치웠냐고?”

그녀가 알기로 이석찬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닌 인물이었다. 그의 아비는 물론 회장도 이석찬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애지중지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기대와 달리 이석찬은 어느 순간부터 엇나갔다. 후계경쟁은 그만둔 지 오래고, 지금은 평범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특이사항이라면 서주환과 웹소설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는 것일까.

이석찬은 이렇게 답했다.

“귀찮아서. 난 운성 같은 거 별로 필요 없거든. 후회 안 하냐고? 그런 걸 왜함? 지금이 훨씬 재밌는데.”

이석찬은 곧 흥미를 잃은 눈으로 말했다.

그런데 넌 졸라 재미없어 보이네. 생각보다 더, 라고.

“안녕! 너도 주환이 동창이니? 아니라고? 아무튼 친하게 지내자. 가브라고 불러도 돼? 난 양혜지야!”

양혜지. 정보에 없는 인물이었다.

서주환의 말에 따르면 중학교 동창이라는데, 수준 낮은 양아치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고등학교마저 자퇴하고 막장 인생을 살고 있는 여자였다.

아니, 살고 ‘있었던’ 여자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냐고? 아닌뎅. 주환이 덕분에 알았어. 뭐, 걔는 그냥 한 말인 것 같은데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도전해봤지. 그런데 내가 여기 재능이 있더라고? 도전 안 해봤으면 평생 후회할 뻔 봤지 뭐양.”

막장이었던 그녀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미술학원에 들어가고 약 4개월 만에 상급반으로 올라가더니, 최근에는 규모가 작은 그림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고.

서주환은 양혜지를 가리키며 사람이 바뀌는 데는 의외로 아주 작은 계기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꺄아아악! 어머, 어머! 이 머릿결 좀 봐! 백금발 미쳤다! 어떡해, 이 머리카락 정말 잘라도 돼요? 으아아, 주환 씨 진짜 고마워요. 어떻게 이런 분을 소개해주셨대? 가브리엘라, 이거 머리카락 자른 거, 제가 보관해도 될까요?”

신하늘. 머리카락에 미친 여자.

다만 미용사로서의 솜씨는 대단했는데,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재능이 먼저인지 흥미가 먼저인지 구분하는 게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모델! 모델 해주세요! 하연이랑 투샷으로! 아니면 주환이랑 투샷으로! 셋이서 해도 좋고!”

머리에 이어 옷에 미친 여자도 만났고.

“응? 직업이 뭐냐고요? 어… 백수에요. 정확히는 성우 지망생. 배우는 워낙 몸치라서 포기했었는데 성우는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아요.”

한 번 꿈을 포기했던 여자도 만났다.

“아하하. 타로점은 처음이네요. 응원 고마워요.”

The Star(별) 카드. 희망과 밝은 앞날.

주경은이라 이름을 밝힌 성우지망생의 미래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한편, 그녀와 달리 저물어가는 별도 있었다.

“허허. 빛을 잃어가는 게 두렵지 않으냐고?”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가가 허옇게 센 수염을 쓰다듬었다. 노인은 무례한 질문에도 허허로이 웃으며 답해주었다.

“당연히 두렵지. 무섭기도 하고, 내가 이거밖에 안 됐나 좌절도 했다네. 한때는 포기도 해봤고, 다시 도전했다가 후회도 했지.”

“그런데 왜 계속 그림을…….”

힘들지 않나요. 젊은 날에 비해 퇴색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 뒤로 물러나기만 하는 재능을 실감하는 것이. 자신의 부족함을 남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현실이.

“힘들어. 하지만 도저히 놓을 수가 없더군.”

“…….”

“아가씨, 이걸 보겠나?”

노인은 어설픈 손짓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내밀었다.

조그만 화면에는 수천, 수만 개의 댓글이 떠올라 있었다.

- 오늘도 재밌는 한 편 감사합니다! 다음 편이 너무 기다려져요!

- 그림체가 익숙한데 혹시 무도 작가님 아니신가요? 어렸을 적 협객 시리즈를 무척 재밌게 봤습니다. 지금도 전권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요. 제가 잘못 알아본 게 아니면 좋겠네요.

└ 제가 보기에도 무도 작가님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그림체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선 쓰는 방식이 딱이에요.

- 무도 작가님 맞으시죠? 제 고등학생 시절을 함께한 작가님이신데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그 때가 벌써 30년 전인데 어느덧 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됐네요. 다시 보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 84년생 애 아빠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 만화를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에 무도 작가님의 작품으로 만화를 접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 덕에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됐는데, 이번에는 만화를 좋아하는 아들 놈 덕분에 다시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됐네요.

└ 저도…아들이…추천해줘서…찾아왔습니다. 아들이…댓글…보더니…저한테…무도가…누군지…아냐고…묻더군요. 덕분에…생전…폰으로…만화를…본…적이…없었는데…결제까지…하게…되었네요;;

└ 아이고, 아버님. 점 좀 그만 찍으세요.

└ 어쩐지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난 것 같아 반갑네요. 저는 딸아이가 알려줘서 찾아왔습니다.

└ 아조씨들 신났네ㅋㅋㅋㅋㅋㅋ

└ 아줌마도 있단다^^

└ 뭔가 신기하네. 우리 엄빠한테도 물어봐야지ㅋㅋㅋ

강필춘과 동시대를 살아온 만화 팬들에게 무도(武道)란 두 글자는 꽤나 의미가 깊었다. 그때의 강필춘은 그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아직까지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니 고마운 일이지.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명까지 바꾼 게 의미 없어졌지만… 솔직히 기뻤다네.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이.”

강필춘을 알아본 독자들은 놀랍게도 그와 함께 나이를 먹어간 옛 세대의 팬들이었다.

팬들의 평균 나이는 어림잡아 40세 정도.

그쯤 되면 스마트폰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기에 한동안 화객으로 필명을 바꾼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건만, 생각 외로 팬들은 금세 그의 정체를 추측했다.

물론 보기 좋은 댓글만 있는 건 아니었다.

- 대단했던 작가라면서? 그럼 오리지널 만화를 그려야지 왜 서환 작가한테 빨대를 꼽음ㅋㅋㅋㅋㅋㅋㅋ?

- 늙어서 머리가 굴러가겠음? 빨대라도 꼽아야지ㅋㅋㅋㅋ

- 스토리 빨이지 이건. 서환 이름값 아니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혔을 듯.

└ 막눈 새끼들 존나 많네. 무도 작가가 ㅈ으로 보이냐? 이 정도면 원작 초월이지.

└ 병먹금 하죠. 이 정도 퀄리티를 보고도 깐다는 건 싫어서 까는 게 아니라 까기 위해서 까는 거임.

원색적인 욕설을 본 가브리엘라의 표정이 굳었다.

강필춘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난 악플을 신경 쓰는 편이 아니네만, 이번 건 꽤 아팠다네. 늙어서 그런지 예전만큼 이야기를 못 짜내는 게 사실이니까. 주환 군이 아니었다면 재기하지 못했을 게야.”

“…….”

“하지만 말일세.”

강필춘의 얼굴에서 씁쓸한 기색이 사라진다. 그리고 벅차오른 감정과 행복이 묻어났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내 작품을 보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즐거워하는 만큼 나 또한 행복해지는 것을.”

“…….”

“다른 이유가 아닐세.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독자들이 내 작품을 봐주는 게 행복해서 펜을 놓지 못하는 게야.”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브리엘라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지난 몇 년간 고개를 숙인 적이 없기에 어색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허허. 그럼 내 손주 만화 좀 봐주겠나?”

“알겠어요. 그런데 제가 만화를 본 적이 없어서 도움이 될 지는 잘…….”

“괜찮다네. 솔직히 말해주기만 하면 돼. 나루야, 이리 오렴.”

“아, 안녕하세요. 여기부터 보시면 돼요. 주환 오빠도 봐주실 거죠?”

“그럼. 이리 줘봐. 가브리엘라, 같이 보게 옆으로 좀 가봐.”

가브리엘라는 서주환과 나란히 앉아서 강나루가 그린 만화를 감상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역시 이 애도…….’

가브리엘라는 힐끗 강나루를 훑었다. 척 보기에도 뛰어난 그림 수준. 그녀는 이제 쉽게 납득했다. 지금까지 소수라 생각했던 천재란 참 흔해빠진 존재였음을.

‘그런데 이거 무슨 내용이지?’

만화를 읽는 가브리엘라의 눈이 점점 찌푸려졌다. 그림은 봐줄만 한데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여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부족한가 싶을 정도였다.

그때 다음 편을 찾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던 서주환이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발했다.

“…어?”

돌연 가브리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파일을 잘못 누른 건지 화면에는 만화 대신 다른 그림이 튀어나왔다.

“이건…….”

화면에 나온 것은 인물화였다.

익숙한 생김새.

눈앞에 있는 노인이었다.

‘따듯하다.’

화면에 나타난 그림은 그와 똑 닮아있었다. 눈가와 입가의 주름부터 수염 하나하나까지 세심한 표현이 돋보였다. 물론 그녀가 보아온 유명 화가들의 그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온기가 없는 그림일 뿐임에도 따스함이 느껴졌다.

서주환은 그런 가브리엘라를 보고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봤을 때랑은 얼굴이 꽤 바뀌었네.’

항상 가면을 쓰고 연기하던 표정이 많이 사라졌다. 아름답지만 정이 안 가던 가면 대신 어설픈 표정이 겉으로 드러났다.

그때 강나루가 물었다.

“어, 어때요? 재미있나요?”

“…….”

서주환은 침묵했고, 오히려 가브리엘라가 입을 열었다.

“음. 나루라고 했지?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니?”

“네? 아, 네. 전 할아버지 같은 만화가가 되고 싶어요.”

화가(畵家)가 아닌 만화가(漫畵家)인가.

가브리엘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강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원할게. 열심히 하렴.”

“…감사합니다.”

강나루는 울상으로 대답했다.

결국 재밌다고 말해주진 않는구나.

*

저녁식사 시간.

“어때?”

서주환은 물었다.

지금까지 네가 본 사람들은 어떠했냐고.

그들 중 천재 아닌 사람이 있었냐고.

“주환, 당신이 옳았어요.”

가브리엘라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열흘 중 아흐레가 지나서야 인정했다.

사실은 진즉에 인정하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의 제 삶을 부정하는 것 같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참 오래 걸렸다.

다만 한 가지.

‘아직도 그건 잘 모르겠어.’

이혜리가 작게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입가에 만든 자애로움. 백강호가 그런 아내를 바라보던 눈빛.

서주환이 제 여자들을 소개하며 말한 수식. 그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여자들의 감정.

- 반려는 개뿔. 난 너한테 있어 사랑이 아니라 수단이잖아?

그 말이 옳다.

그녀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서주환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한국까지 올 일도 없었을 테지. 점술 능력의 회복을 이루어준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쉽게 반려로 맞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터였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모르겠어.’

그를 만나고 반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가치관이 흔들렸다. 부서졌고, 바뀌었다.

“주환.”

“응?”

“내일이 마지막이에요. 저에게 남은 시간.”

“그래. 모레 돌아가는 거지?”

“네. 그러니까…….”

불안하게 흔들린 눈동자가 그를 바라본다.

“오늘 밤, 저를 안아주세요.”

가브리엘라가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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