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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페티시가 보여-329화 (32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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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꿈, 그리고 행복

재능보다 꿈을 선택한 부부라.

집으로 돌아온 가브리엘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혼자 있게 해줄 수 있을까요? 좀 피곤해서요…….”

양해를 구한 가브리엘라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지그시 내리감은 눈.

눈꺼풀 사이로 들어온 희미한 빛에 이혜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저도 꿈이라고 말은 했지만, 아마 그런 상황이 오면 한 번쯤은 아이를 설득할 거예요. 아이가 힘들 걸 뻔히 아니까요.’

이혜리는 말했다.

그럼에도 결국은 아이의 꿈을 응원할 거라고.

‘아이도 자기 재능을 알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꿈을 찾아가겠다는 건, 그 길이 아이의 행복이라는 뜻이겠죠.’

가브리엘라는 감았던 눈을 뜨고 마른세수를 했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도는 말에 생각이 복잡했다.

- 난 재능과 행복은 별개라고 봐.

그녀의 안에 자리한 말은,

이혜리가 아닌 서주환의 목소리였다.

*

사건의 발단은 장덕훈과 서주희의 까톡이었다.

[서주희: 정말? 혜리 이모 요리 실력이 더 늘었어? 거기서?]

[장덕훈: ㅇㅇ지난여름에 먹었을 때보다 훨씬 맛있었어.]

[서주희: 치사하게 오빠만! 나도 맛있는 거 먹고 싶다 ;ㅅ;]

[장덕훈: 미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연락 못했어.]

[서주희: 바보. 이럴 때는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하는 거야.]

장덕훈은 서주희의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그간의 경험으로 이렇게 해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장덕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서주희: ㅎㅅㅎ좋아 언제 갈까?]

서주희는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장덕훈은 그게 데이트라는 걸 몰랐다.

[서주희: 그런데 누구누구 갔어? 나도 아는 사람?]

[장덕훈: 모르는 사람일 거야. 외국인 두 명이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왔대. 백금발이 엄청 예뻤어. 눈동자도 보라색이라서 신기했고.]

[서주희: ㅡㅡ]

[장덕훈: ?? 왜?]

[서주희: 여자야?]

[장덕훈: 한 명은 여자고 한 명은 남자. 가브리엘라랑 파비오라고 했어. 주환 형님 친구들이래.]

여자라는 말에만 신경 썼던 서주희는 곧 화낼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가브리엘라? 이 오빠가 진짜!’

장덕훈이 아니라 친오빠인 서주환과 얽힌 사람이다.

‘존경을 하려다가도 할 수가 없어!’

이 쓰레기 카사노바 같으니!

가브리엘라에 대한 소식은 한수아에게 전달됐다.

[한수아: 언니들ㅠㅠㅠㅠㅠㅠㅠ]

한수아는 가브리엘라를 알고 있었다. 서주환이 방을 알아봐주겠다며 옆집에 갔을 때 본 여자였다. 예쁘다고 생각은 했는데 어느새 서주환은 그 여자와 밥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민가희: 가브리엘라?!]

민가희도 울었다.

[민가희: 가브리엘라면 오빠한테 결혼하자고 했던 여잔데…….]

[정하연: ?]

[유지경: ?]

여자들의 단톡방이 뒤집어졌다.

[너구리: 지금 물어뜯으러 간다.]

[정하연: 지금 가도 돼?]

서주환은 뜻 모를 까톡을 보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무래도 좆 된 것 같다고.

*

유지경을 비롯한 여자들은 서주환의 행실을 알면서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어지간한 건 얼핏 짐작을 하면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가 누구 한 명을 선택하는 순간 그 외의 다른 인연들은 끊어지게 된다. 그녀들은 서주환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함에 잠겼다.

그래서 정하연과 유지경은 직접 움직였다. 민가희와 한수아는 각자의 일로 바빴으나 두 사람은 집이 가까워서 저녁 시간임에도 서주환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적용 중인 몽마신의 축복이 발동됐다.

서주환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놈의 축복은 행운이라 말하지만 그건 받아들이기 나름이었다. 물론 결과만큼은 언제나 행운이란 말에 걸맞았다. 다만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꼭 순탄치만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대충 짐작은 가네.’

1년도 넘게 시스템을 사용해왔더니 축복이 무얼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다가올 근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있을 가브리엘라를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피곤에 찌든 눈을 한 가브리엘라가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생각이 많았는지 복잡해 보이는 얼굴에 행색 또한 부스스했다.

잠시 후, 정하연과 유지경이 도착했다.

“주환아, 나 왔어.”

“캬아아악! 집사 새끼! 딱 대!”

그의 얼굴을 본 정하연이 반갑게 인사하고, 너구리는 곧장 살점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의 뒤를 따라 나온 여자를 보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찬란한 백금발과 신비로운 자안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행색이 좀 부스스했으나 그런 것 따위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급격히 어색해진 분위기.

서주환은 본능적으로 정하연과 유지경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곤 두 사람의 어깨를 감싸며 가브리엘라를 바라봤다.

“얘들은 정하연이랑 유지경. 내가 사랑하는 여자친구야.”

낯간지러운 말을 망설임도 없이 내뱉은 서주환.

정하연과 유지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주환이 너 방금 뭐라고…?”

“오빠, 방금 한 말 다시 해봐!”

그녀들은 낯간지러운 말에 부끄러워하기보단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가 직접적으로 여자친구라고 얘기한 게 처음이었던 탓이다.

그와 여자들은 실질적으로 사귀는 사이나 다름없다지만 결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연인처럼 사랑을 나누면서도 서로를 남친이나 여친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서주환은 조금 민망한 듯 웃으며 두 사람에게 되물었다.

“맞잖아? 여자친구.”

“어, 으응. 맞는데… 응, 맞아.”

정하연은 언젠가 헤어진 이후 처음 듣는 단어에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가브리엘라는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반면 유지경은 가슴을 쭉 펴고 가브리엘라를 돌아봤다.

“흫, 흐흫. 안녕하세요. 주환 오빠 ‘여자친구’ 유지경이에요.”

“…….”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이없음에 할 말을 잃어버린 가브리엘라.

서주환은 얼빵하게 서 있는 그녀에게 눈으로도 뜻을 전했다.

야, 장단 맞춰라.

능력 회복하고 싶다면서?

단지 눈짓이었음에도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Shit…….”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브리엘라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안녕하세요, 가브리엘라에요.”

빌어먹을.

*

가브리엘라의 설명을 들은 후.

정하연은 자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되물었다.

“그러니까, 주환이한테 결혼을 하자고 한 이유가 점술 능력의 회복을 위해서라는 거죠?”

“네.”

유지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난 들어도 모르겠는데. 점술이랑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람. 애초에 카드만 믿고 이탈리에서 한국까지 찾아왔다는 게 말이 돼?”

황당하다는 투로 말한 유지경은 서주환을 돌아봤다.

“오빠, 대충 지어낸 거 아니야?”

“진짜야. 의심되면 가희한테 물어봐. 가브리엘라를 처음 만난 건 가희랑 타로카페에 갔을 때니까.”

“그건 그렇지만… 말이 되나? 점술 같은 건 미신이잖아.”

유지경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미신이란 말을 철회해야 했다. 점술을 한낱 미신으로 치부하는 그녀의 말에 가브리엘라가 실력 행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가브리엘라가 카드를 뽑으며 말했다.

“지경, 당신은 종종 관계의 역전을 꿈꾸고 있군요.”

“네?”

“구속 받고 복종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를 구속시키고자 하는 감정이 있어요. 최근 어떤 물건을 샀죠? 아무래도 성적인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남성의 성과 관련된 구속이라면… 혹시 남성용 정조대를…?”

유지경은 흠칫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녀는 이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서주환을 보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 오빠, 아니야! 나 그런 생각 안 했어!”

“너구리 너?”

“아니야! 쓸 생각은 없었어!”

“진짜 샀냐…?”

“아니, 그게, 너무 화나서 조금 전에 주문한 거야. 지금 취소할게. 응?”

그 모습을 본 정하연이 얼른 말했다.

“전 믿어요. 타로.”

“다행이군요.”

“그런데…….”

“음?”

“타로는 원래 앞날을 예지하는 게 아니라 카드의 뜻을 바탕으로 유추해서 조언해주는 거잖아요?”

가브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연이 말한대로 일반적인 타로 점은 예지가 아닌 유추를 통한 조언이 기본이었다.

정하연은 의문어린 눈으로 가브리엘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타로 점으로 어떻게 나라와 사람을 특정한 거죠? 그 결혼 대상이 주환이가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제 점은 특별하니까요. 예언에 가까운 힘을 갖고 있죠.”

정하연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아직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선 결혼해야 된다면서요.”

“그건…….”

가브리엘라의 눈동자가 흘깃 서주환을 훑고 돌아온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포기했어요.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거절하더라고요. 아까도 주환은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사랑. 그 간질거리는 단어를 입에 담은 가브리엘라가 눈가를 찡그렸다.

그게 뭔데.

어쩐지 작게 부푼 배를 쓰다듬던 이혜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옆에서 제 아내를 바라보던 백강호의 눈빛도.

정하연이 붉어진 낯을 진정시키려는 듯 흠흠 헛기침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가브리엘라의 능력은 어떻게…?”

“…그건 해결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네?”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저 남자 옆에 있으니 조금씩이지만 회복되더군요.”

가브리엘라는 회복의 이유가 어젯밤 그에게 애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일은 숨겼다. 서주환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능력이 떨어져서 제 점괘가 조금 빗나갔었던 것 같아요.”

“아…….”

납득한 건지, 안심한 건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연.

가브리엘라는 그런 정하연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심술이 났다. 자신과 비슷한 사연이 있기 때문인 걸까. 정하연의 얼굴 위로 스스로가 겹쳐보였다.

‘주환을 내가 먼저 만났다면.’

그럼 저 옆자리는 내 것이었을 텐데.

순간, 가브리엘라는 저가 떠올린 생각에 고개를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타당한 이유를 찾고 진정한다.

‘그는 우수하니까.’

그녀는 일그러지려는 입매를 정돈하며 말했다.

“하연, 지경. 그러니까 제게 주환을 열흘만 빌려줘요.”

“어… 왜 열흘이죠?”

“엑. 열흘이나?!”

의문을 표하는 정하연과 명백히 싫은 기색으로 반응하는 유지경.

가브리엘라는 제 입에 걸린 웃음에서 쓴맛을 느끼며 이유를 말했다.

“전 열흘 후면 귀국해야 되거든요.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애초에 회복이 목적이었지 전 주환을 사랑하지도 않는 걸요.”

그건 저 남자도 마찬가지일 테지.

자신을 수단으로만 보는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

유지경은 정하연과 함께 돌아가며 불만스런 얼굴로 말했다.

“언니는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어?”

“음. 대부분은?”

“아니, 이해가 안 되네. 그걸 어떻게 믿어? 카드를 따라서 결혼 상대를 찾아 바다 건너 여기까지 왔다? 목적은 능력의 회복을 위해서고? 지가 초능력자야,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정하연은 말을 아꼈다. 사실 그녀도 미리 백강호와 이석찬에게 가브리엘라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유지경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유지경도 납득할 수 있는 쪽으로 얘기를 돌렸다.

“그냥, 주환이를 믿는 거지.”

“…치. 우리 오빠만큼 못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다 진짜 우리 버리고 결혼하면 어떡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는 유지경.

하지만 말과는 달리 더 이상 따질 생각은 사라진 모양이었다.

“주환이가 우릴 버릴 리가 없잖아. 약속했는걸.”

정하연은 유지경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듣자마자 바로 거절했다고도 했고. 그리고…….”

“그리고?”

“소개할 때, 우리를 여자친구라고 했잖아?”

유지경은 기가 차다는 눈으로 정하연을 바라봤다.

“참 내! 속도 좋다, 언니는!”

이 미련한 언니의 앞날이 걱정이었다. 어쩌다 콩깍지가 그렇게 씌어서는.

‘쳇. 내가 또 봐줬다.’

안 봐주면 어쩔 건가. 이쪽이 더 좋아하는데.

유지경은 누가 누구 신세를 걱정하는 거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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