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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꿈, 그리고 행복
백강호가 서주환의 목에 거대한 팔뚝을 걸고서 말했다.
“이 자식, 한동안 안 나오길래 조만간 납치한 다음 조질려고 했는데!”
“히익?!”
“오늘 보니까 실력이 더 늘었다? 엉? 혼자 열심히 했네. 이 기특한 새끼!”
“그, 그렇죠, 뭐.”
“조만간 형이랑도 함 붙어볼까?”
“허어어억!”
“그런데 너는 어떻게 기술보다 센스가 급상승하냐? 아니지, 눈이 더 좋아진 건가? 궁금한데 한 쪽만 뽑아서 확인해볼까?”
“흐어어어어억! 형님들 누가 저 좀 살려줘요!”
“으하하! 반응이 왜 이리 격해, 인마! 당연히 농담이지.”
“그 얼굴로 말하면 농담처럼 안 들린다고요!”
“뭠마?!”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서주환은 인상 쓴 백강호의 얼굴을 보고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물론 진심은 아니고, 친해서 칠 수 있는 장난이었다.
그때 시스템 음성이 울렸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백강호가 그를 놔주며 말했다.
“장난은 이만하고. 주환아, 점심 먹게 따라와라. 혜리가 데려오란다.”
“예? 지금요?”
“그래, 인마.”
“일행이 많은데 괜찮으시대요?”
“어, 괜찮아.”
“형수님 힘드실 것 같은데…….”
“짜샤, 내가 아니라 혜리가 먼저 제안한 거야. 몇 명인지도 다 알아. 오랜만에 이탈리아식으로 요리한다더라.”
“아하, 그런 거면 저야 감사하죠. 형수님 요리는 언제든 환영이에요.”
“어이, 파 씨! 그리고 거기 아가씨도 같이 갑시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가브리엘라가 손을 내저었다.
“전 괜찮……”
“거 잔말 말고 먹고 가요. 내 와이프가 요리를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아니 전…….”
“메디치 가문의 요리장 못지않을 걸?”
“…어떻게 그걸?”
가브리엘라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파비오가 한 걸음 그녀에게로 가까워졌다.
백강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우리 파 씨가 재밌어서 좀 알아봤지. 너무 경계하지 마요. 그냥 천사님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의 말과 달리 가브리엘라와 파비오의 경계심은 진해졌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건 물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불리는 천사라는 별칭까지도 언급했기 때문이다.
서주환이 두 사람을 재촉했다.
“배고파 죽겠다. 괜한 걱정 말고 빨리 가자, 좀.”
백강호는 장덕훈에게도 손짓했다.
“덕훈아, 얌마! 너도 데려오란다.”
“예? 저를 말입니까?”
“으하하. 나한테 시달린다고 맛있는 것 좀 먹여야겠다나? 내 덕분에 오늘 입 호강하는 줄 알암마.”
일행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가브리엘라와 파비오는 서로를 마주봤다.
“가실까요, 아가씨.”
“그, 그래.”
저 긴장감 없는 대화를 보니 경계하는 게 어쩐지 바보 같이 느껴졌다. 카드도 위험을 경고하진 않았으니 괜찮으리라.
*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저마다 배를 두드리거나 감탄하며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역시 형수님 요리가 최고네요. 맛있어서 폭식해버렸어요.”
“저,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봤습니다!”
“베리 딜리셔스! 본국의 맛! 어썸 그레이트 이태리 퓨전 푸드!”
서주환과 장덕훈, 파비오의 반응에 당사자인 이혜리보다도 백강호가 자부심을 드러냈다.
“으하하하하! 그치? 우리 혜리 요리 실력이 더 늘었다니까?”
“어머, 부끄럽게 왜 당신까지 그래요?”
이혜리는 웬 주책이냐는 듯 말했지만 사실 백강호의 말은 정확했다. 상태창으로 확인한 그녀의 ‘요리’ 재능이 이전보다 랭크업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리 재능이 A랭크를 찍으니까 장난 아니구나.’
어지간한 5성급 호텔에서도 이 정도 수준의 요리를 맛보기는 힘들다. 일행들이 빈말로 칭찬을 하는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가브리엘라조차 크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겠는가.
서주환은 툭툭 가브리엘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어때, 오길 잘했지?”
가브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좀 과장하면 가문의 요리장이 떠오르는 솜씨였어요. 저 분은 어디 소속된 셰프인가요?”
“뭐?”
“한국에서 본국의 맛을 이만큼 살린 요리를 먹게 될 줄은 몰랐네요. 기회가 되면 꼭 방문해보고 싶어요.”
“큭, 푸하하하!”
서주환은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폭소하는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는 백강호와 이혜리에게 가브리엘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크으, 조금 전에 못 들으셨어요? 형수님의 요리 솜씨가 인정받았어요.”
“응? 무슨 소리니, 주환아?”
“가브리엘라가 형수님이 어디 소속된 셰프냐고 물었거든요.”
“뭐어? 호호. 가브리엘라, 칭찬 고마워요.”
가브리엘라는 그들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귀족적인 몸짓으로 예의를 갖췄다. 이 정도 실력의 요리사는 능력을 인정받아 마땅했다.
“천만에요, 마담. 무척 오랜만에 혀가 즐거워지는 식사였어요.”
“어머. 메디치 가문이라더니 가브리엘라는 굉장히 우아하네요.”
“감사합니다. 마담께서도 자연스러운 기품이 고아하세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에게 다시 한 번 마담의 요리를 즐길 기회를 주시겠어요?”
“호호. 그럼요. 한국에 있는 동안이라면 언제든 놀러오세요.”
“?”
가브리엘라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이혜리는 자신의 말을 오해 한 듯했다.
“제가 잘못 말했군요. 이런 요리를 또 그냥 즐길 수는 없지요. 소속된 호텔을 알려주시면…….”
“호호호. 가브리엘라, 저는 호텔에서 일하지 않는 걸요?”
“아, 그럼 식당을 하는 건가요?”
레스토랑을 하는 듯했다. 이 정도로 본국의 맛을 살린 솜씨면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이혜리는 그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더니, 다소 부끄러워하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가브리엘라,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하지만 전 그냥 주부예요.”
“…네?”
가브리엘라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주부라면 집안에서 살림살이를 꾸리는 안주인을 말함이다. 그녀는 순간 말을 잘못 들었거나, 자신의 한국어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서주환이 큭큭 웃으며 말했다.
“형수님은 전업주부이셔.”
“그럼 이 요리 솜씨는…?”
“취미로 배우신 거야. 요리하는 걸 좋아하시거든. 아, 그게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에게 항상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싶어서였던가요?”
서주환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백강호와 이혜리 부부를 돌아봤다. 이혜리는 실제로 백강호에게 더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싶다며 운성그룹에 속한 요리사들에게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었다.
백강호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혜리의 어깨를 감쌌고, 이혜리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괜히 서주환을 나무랐다.
“주환아, 어른을 놀리면 못 써.”
“하하. 형님이 부러워서요.”
“얘가 정말…….”
그를 나무라면서도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짓는 이혜리다.
가브리엘라는 그런 이혜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혼란으로 물든 보랏빛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이런 솜씨를 가지고 가정주부라고? 왜?’
하다못해 호텔이나 레스토랑이 아닌 개인 식당을 한다고 했어도 어떻게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가정주부라니?
그녀가 보기에 이혜리는 재능을 시궁창에 처박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도.’
새삼 얼빵한 얼굴로 배를 두드리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인임에도 파비오에게 밀리지 않는 덩치를 가진 남자다.
장덕훈. 서주환의 대학 친구 중 한 명. 제자를 자칭.
여자들을 위주로 조사했기에 자세한 정보는 없었다. 다만 하류 문화인 웹소설 쪽으로 서주환의 제자를 자칭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체육관에 왔던 것도 웹소설의 자료조사를 위해서라고 했으니.
‘하지만 저 남자의 재능은 소설이 아니라…….’
체육관에서 장덕훈을 본 파비오가 경악하던 모습이 선명했다. 파비오는 장덕훈이 훈련을 시작한 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되었다는 걸 알고선 그를 연신 크레이지 몬스터라 불렀다.
물론 서주환과 스파링을 한 뒤에는 잠잠해졌지만 말이다.
“가브리엘라?”
“…….”
“가브리엘라?”
“아.”
가브리엘라는 그제야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고 얼른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마담, 저를 부르셨나요?”
“네. 이이가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요.”
“미스터 백? 그러고 보니 제게 부탁할 게 있다고 했었죠.”
가브리엘라의 시선이 백강호를 향했다. 그가 곧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봤다. 아까 체육관에서 봤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무척 강렬한 눈빛이었다.
“아가씨, 점을 하나 봐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
마담 리와 달리 산적처럼 생긴 남자. 그러나 격투 능력만큼은 파비오에게 견주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불현 듯 가브리엘라는 깨달았다.
그녀의 기준에서,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명백히 ‘천재’였다.
- 세상에 가치 없는 사람은 없어. 사람들은 저마다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으니까.
- 재능으로 천재임을 판단한다면, 모든 사람이 천재겠지.
머릿속에서 그녀의 가치관을 부정하던 서주환의 목소리가 울렸다.
훽, 훽!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털어냈다. 귀족적이지 못하고 난잡한 동작이었다. 이내 그녀는 그린 듯 예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무엇이 궁금한가요?”
“오, 봐주는 건가?”
“물론이죠. 맛있는 식사를 대접 받았으니까.”
“으하하! 고맙구만! 그, 지금 우리 혜리가 임신 중인데, 혹시 성별을 알 수 있을까? 아직 몇 개월 안 돼서 초음파 검사로는 알기 힘들다더라고.”
“당신도 참. 물어볼 게 그거였어요? 아들이 분명하다니까요?”
“난 당신 닮은 딸이면 좋겠는데. 아, 물론 아들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호호. 아무려면 어때요. 건강하게 태어나주기만 하면 되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 가브 아가씨, 그래서 우리 혜리 배 속의 아이는 아들이야, 딸이야? 응?”
가브리엘라는 카드를 확인했다.
“아들일 것 같네요.”
이혜리가 백강호의 어깨를 찰싹이며 말했다.
“그거 봐요, 여보! 제가 아들일 거라고 했죠?”
“으하하하! 아들? 아들이란 말이지!”
“어머? 딸이었으면 좋겠다면서?”
“어허! 쉿! 우리 아들이 듣고 서운해할라! 그리고 성별이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당신 닮아서 예쁘고 잘생겼을 텐데!”
“호호. 이이 말 바뀌는 것 좀 봐. 얘들아, 너무 귀엽지 않니?”
“으음. 아무리 형수님 말이라도 그건 동의하기가 좀……”
“저, 저는 무조건 혜리 이모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접을 떠는 백강호와 무지막지한 질문을 하는 이혜리. 곤란해 하는 서주환과 백강호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장덕훈.
가브리엘라는 그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스터 백, 그리고 마담.”
화기애애하게 떠들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왜 그래, 아가씨?”
“어머, 그러고 보니 인사를 깜빡했네요. 감사해요, 가브리엘라.”
“아, 그렇군. 고마워, 아가씨.”
가브리엘라는 그런 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한데? 뭐든 물어봐.”
“호호. 편히 말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질문을 하나 할게요.”
가브리엘라는 가라앉은 눈으로 백강호 부부를 바라봤다. 반개한 보라색 눈동자에서 미미한 광채가 일렁였다.
보는 사람이 빨려 들어갈 듯한 신비로움.
이어진 목소리는 청자의 귀를 간질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앞으로 태어날 아드님은 두 분이 바라는 재능을 갖고 태어날 거예요. 그렇게 가정해보죠.”
“호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백강호 부부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집중했다.
가브리엘라의 말이 이어진다.
“바라는 게 어떤 재능이든 상관없어요. 아이는 소위 천재라 불릴 만한 재능을 갖고 태어납니다.”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미래를 상상했다. 이혜리는 아직 크게 부풀지 않은 배를 쓰다듬었다.
서주환은 그런 부부와 가브리엘라를 번갈아봤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묘한 표정을 짓고선 말을 잇는다.
“하지만 아이는 재능과는 다른 걸 하고 싶어 해요. 재능을 잘 키운다면 훗날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임에도, 불확실한 길을 걸어가고 싶어 하죠.”
““…….””
“그 상황에서 두 분은 어떻게 하고 싶나요? 아이는 결국 부모님의 말을 따를 거예요. 재능과 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주세요.”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부부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내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이혜리였다.
“아이도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나요?”
그 말을 들은 가브리엘라의 눈동자가 힐끗 움직인다. 장덕훈을 본 그녀는 오늘 새벽에 본 여자를 떠올렸다.
불확실한 격투기의 길을 택한 여자. 아이러니하게도 격투기에 대한 재능은 동생에게 있다. 그러나 동생은 정작 작가를 꿈꾼다.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브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여보, 당신은 어때요?”
이혜리가 백강호를 돌아본다.
백강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당연히 당신이랑 같은 생각이지.”
“그렇죠?”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 두 사람.
가브리엘라는 미간을 모으며 재차 질문했다.
“재능과 꿈. 어느 쪽인가요?”
부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꿈.”
그리 말할 줄 알았다며.
“흐.”
서주환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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