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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페티시가 보여-327화 (327/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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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꿈, 그리고 행복

흠씬 얻어터지고 링을 내려온 장덕훈이 서주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주환 형니임…….”

“푸흐흐. 살만 하냐?”

“죽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쇼. 왜 저를 이런 곳에 던져두신 겁니까…….”

장덕훈은 드물게 원망스럽다는 기색으로 서주환을 보며 말했다. 그에 서주환은 낄낄거리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신작으로 용병물 쓰고 싶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저는 자료조사를 하고 싶었던 거지 죽고 싶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벌써 일주일째입니다. 이러다간 설도 못 보내고 죽겠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여기 형님들이 사람 죽이는 법 잘 알고 있거든.”

“그게 무슨 소립니까 대체?!”

“그만큼 안 죽이고 패는 법도 잘 알고 있다는 소리야.”

“형님이 처음으로 밉습니다…….”

장덕훈의 눈이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서주환이라도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들 정도로 슬픈 얼굴이었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자료조사는 확실하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장덕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자료조사를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제로 수 년 간의 용병생활 경험자다. 덕분에 생생한 경험담과 전문지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백강호가 다가와서 말했다.

“덕훈아, 작가 때려치우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 내가 잘 키워주마.”

“히익. 싫습니다. 전 싸움이라면 질색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인마. 너 스파링 할 때 행복한 얼굴이야. 비로소 살아있다는 표정이라고. 뭔 말인지 알간?”

“모릅니다!”

장덕훈이 락커룸으로 도망쳤다.

백강호는 그 뒷모습을 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아, 새끼. 진짜 재능 있는데.”

“흐흐. 싫다잖아요, 형님.”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저거 천성이 싸움꾼이라니까? 너도 스파링 할 때 저놈 표정 봤잖냐.”

“뭐, 신나 보이긴 했죠.”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우는 소리를 해도 무척이나 생기가 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서주환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도 글 쓸 때가 더 즐거워 보이던데요?”

“쩝. 그러냐?”

“예. 본인이 그게 좋다는데 어쩌겠어요.”

“에휴. 왜 마음에 드는 놈들은 하나 같이… 일주일 만에 저 정도는 진짜 물건인데.”

그때였다.

거구의 백인, 파비오가 놀란 소리를 냈다.

“What? 일주일? One week? Really?”

“응? 이 분은 아까…….”

“아, 제 일행이에요. 파비오, 왜 그래요?”

서주환의 물음에 파비오가 재차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금 그 남자, 일주일 배웠다고 했다?”

“아, 덕훈이요? 여기 다닌 건 일주일이 맞는데 옛날에 여러 가지로 좀 배웠었어요.”

“아하. 유단자. 깜짝 놀랐다.”

그제야 파비오는 놀란 기색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어지는 말에 그는 다시 경악해야 했다.

“대충 팔 년 년 전이던가? 열네 살, 아, 외국 나이로는 열세 살 때까지 주짓수랑 무에타이를 조금 했었을 거예요.”

“…열셋?”

파비오는 입을 떡 벌렸다.

그도 조금 전의 스파링을 봤다. 상당히 수준 높은 공방. 특히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남자의 실력은 가문의 경호원들과 비교해도 무척 뛰어났다. 반면 체구가 큰 장덕훈이란 남자는 다소 어설펐다.

한데, 고작 일주일로 만들어진 실력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열세 살때까지 배웠다 해도 마찬가지다.

파비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동양의 신비를 익혔다? 일인전승의 계승자?”

“아뇨. 그냥 재능충인데요.”

“재능충! 나 그거 안다! 코리안 슬랭어! 크레이지 포텐셜!”

“푸하하. 역시 재밌는 사람이라니까.”

서주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 이 사람, 한국말뿐만 아니라 영어도 야매 느낌이 난다.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 쪽 사람이라고 했었지.

백강호도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거 유쾌한 양반일세.”

그 말에 파비오가 눈을 빛내며 백강호를 바라봤다.

“당신도 무척 강해 보인다.”

“보는 눈도 있는 양반이고. 그런데 그쪽도 평범한 일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놉. 평범한 경호원이다.”

“경호원? 저 아가씨의?”

백강호의 눈이 가브리엘라를 향했다.

데구르르 돌아간 눈동자. 그 시선을 마주친 가브리엘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파비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그녀를 등 뒤로 숨겼다.

“눈에 힘 많이 들어갔다.”

“아이고, 이거 감이 좋은 아가씨구만. 미안해요, 아가씨. 겁먹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전 가브리엘라라고 해요.”

괜찮다며 고개를 젓고는 담담히 제 소개를 하는 가브리엘라.

하지만 그 속은 놀람으로 물들어 있었다.

‘뭐야, 이 남자는?’

순간 호랑이를 앞에 둔 줄 알았다. 이런 느낌은 파비오와 처음 마주했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곧 한 사람을 더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도.’

가브리엘라의 시선이 한 쪽에 서 있는 서주환을 향해 돌아갔다. 어제 저녁, 화를 내던 그는 파비오와 눈앞의 남자 못지않은 위압감을 풍겼었다.

파비오가 여전히 그녀를 뒤에 둔 채 말한다.

“강호? 당신과 겨뤄보고 싶다.”

“으하하. 호전적이구만. 나쁘지 않아.”

“나랑 싸워준다?”

백강호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안 돼. 자네랑 싸우면 그냥은 안 끝날 것 같거든. 말려줄 사람도 없고.”

“으음. 이해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흐하하. 대신 이 녀석은 어떤가?”

백강호가 옆에 있던 서주환의 어깨를 턱 짚었다.

서주환은 질색하며 어깨를 털어냈다.

“아니, 형님. 왜 저를 끌어들여요?”

“인마, 너 요즘 체육관 잘 안 나왔잖아.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지.”

“파비오랑 싸우면 형님도 그냥 안 끝난다면서요!”

“그거야 실력이 얼추 맞는 사람들끼리지. 네가 어딜 비벼.”

“그럼 더 싫죠!”

“괜찮아, 괜찮아. 여차하면 내가 말려줄게. 원래 맞으면서 느는 거야.”

“제가 싸움질 더 늘어서 뭐한다고요!”

투닥거리는 서주환과 백강호.

그 사이로 파비오가 진한 흥미를 보이며 끼어들었다.

“나, 주환과도 겨뤄보고 싶다.”

“으엑?”

“주환, 무척 강하다. 어제 느꼈다.”

파비오가 눈을 번뜩였다.

어제 저녁 보였던 살기. 그리고 칼을 들이댔음에도 눈 하나 꿈쩍 않던 모습이 선명했다. 안 그래도 실력이 궁금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

서주환은 거절하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호감도 올리기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가브리엘라의 페티시는 천재 기호증인 Geniusphilia(지니어스필리아)다. 누가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별하는 여자 아니랄까봐 꼭 저 같은 페티시를 갖고 있었다.

‘적당히 하고 내려와야지.’

서주환과 파비오가 링으로 올라갔다. 이내 보호구를 착용한 두 사람이 주먹을 맞댄다.

툭.

그리고 소란이 커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링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하며 떠들어댔다.

“와씨… 저게 뭐냐?”

“저 외국인 괴물인데? 호석 형님도 일대일로는 힘들겠어.”

“피지컬이 백 대장님 급이네.”

파비오에 대한 경탄.

그리고 자연히 그와 맞서는 서주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저 새끼 뭐냐?”

“저게 주환이라고? 저 녀석 언제 저렇게 세졌어?”

“염병. 세상 불공평하게 미친놈이네. 범상치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얼굴 위로 경악이 떠올랐다.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의 출신은 대부분이 백강호와 전쟁터를 굴렀던 전직 용병들이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서주환과 한 번씩 겨뤄본 적이 있었다.

그 중 막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녀석 분명 나한테도 졌었는데…….”

그 말에 백강호 산하의 경호팀 2인자인 김호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막내야, 그게 언제냐?”

“대충 세 달 전쯤일 겁니다.”

빠악! 김호석이 막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새꺄, 그럼 막 배우기 시작할 때잖아.”

“끄으윽. 아픕니다!”

“인마, 난 쟤한테 한 달 전에 털렸어.”

“예? 부 팀장님이 말입니까?”

막내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김호석은 백강호를 제외하면 대인격투로는 팀 내 1인자였다.

김호석은 짜증난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주환이 놈은 실력 이전에 눈이 사기야. 기술은 내가 더 좋은데, 저놈은 그걸 순간적인 반응으로 대처하거든. 주먹을 뻗기도 전에 예비동작만 보고.”

*

김호석의 말대로 서주환의 강점은 ‘눈’에 있었다.

[특수능력, ‘집중: 슬로우비디오’가 발동합니다.]

[동체시력과 사고 속도가 상승합니다.]

[스킬, ‘마안(魔眼)’이 발동합니다.]

[동체시력이 상승합니다.]

특수능력과 스킬로 중첩 상승된 서주환의 동체시력은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을 뛰어넘었다. 기술이 부족해도 어지간한 건 눈으로 보고 대처하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럼에도 파비오의 공격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씹, 저 덩치에 뭐 이리 빨라.’

상대의 공격을 쉽게 볼 수 있다 해도 그의 움직임 자체가 빨라지는 건 아니었다. 보고 느낀 걸 센스로 대처해야했다.

팡! 빠바바박!

서주환의 러시가 파비오의 가드 위를 두드렸다. 중간중간 채찍처럼 휘둘러진 로우가 파비오의 다리를 가격했다. 그는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고 한 방씩 데미지를 쌓았다.

“크윽!”

파비오는 다리가 저려오는 걸 느꼈다. 스피드는 물론이고 생각보다 힘이 좋아서 데미지가 빨리 쌓였다. 그는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떨쳐내기 위해 맞으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뻐어어억!

서주환은 피하기 늦었음을 인지하고 팔뚝을 들어 막았다.

‘더럽게 아프네!’

레프트를 막은 팔뚝이 욱신거렸다. 분명 주먹을 막았는데 둔기에 맞은 것만 같았다.

부우우웅!

순간 서주환은 파비오의 어깨 움직임을 보고 고개를 틀었다.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주먹이 섬뜩한 바람소리를 만들어내고 스쳐지나갔다.

‘한 방 맞으면 골로 가겠네. 어제 끝까지 안 가서 다행이다.’

맨주먹으로도 이 정도인데, 칼을 들고 있었던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모르긴 몰라도 피를 봤을 것이다.

‘뭐, 죽진 않았겠지만.’

그 정도 확신은 있으니까 세게 나간 거였다.

그도 그럴 게.

[스킬, ‘마안(魔眼)’의 세 번째 효과가 발동합니다.]

그에겐 다른 사람에게 없는 스킬이 있었으니까.

‘마안’의 세 번째 효과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주는 힘’이다. 이 애매한 설명이 쓰인 힘은 여러 분야에서 알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지금과 같은 전투 상황에서는.

[일정 확률로 상대의 투로를 예지합니다.]

‘온다.’

서주환은 눈앞에 나타난 붉은색 선을 보고 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예비동작 없이 날아온 킥이 배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킥을 피한 순간 곧바로 뛰어들었다. 파비오의 안면에 유효타를 먹이고 끝낼 생각이었다. 휘두른 주먹이 파비오의 얼굴에 직격한다.

백강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만!”

우뚝, 주먹을 멈췄다.

동시에 횡으로 날아오던 파비오의 훅도 멈췄다.

서주환은 눈동자를 굴려 바로 앞까지 다가온 푸른색 글러브를 확인하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강호 형님도 그냥은 안 끝날 것 같다더니.’

맞기 직전에야 주먹이 지척까지 날아든 걸 깨달았다. 멈추지 않았다면 한 방에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반면 파비오도 섬뜩함을 느끼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impazzire(미쳤군).”

정말이지 미친 재능이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체육관에서 훈련받은 게 서너 달 정도라고 했었나? 장덕훈이란 청년을 봤을 때도 경악했는데 이건 대체…….

‘귀신에 홀린 느낌이야.’

동체시력이 말도 안 된다. 분명 기술이나 피지컬은 그가 더 뛰어남에도 유효타를 가져갈 수가 없었다.

마치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아는 듯한 움직임.

제대로 한 방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뼈를 내주고 맞교환을 하는 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링 위로 올라온 백강호가 말했다.

“둘 다 여기까지 하고 끝내지. 내가 판단을 잘못했구만. 계속하면 누구 하나 크게 다치겠어.”

짧은 스파링이 끝났다.

밑에서 구경하던 가브리엘라의 벌어진 입에서 침 한 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

파비오 칸나바로.

그는 25세의 나이로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다. MMA계의 공식적인 대회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룰이 없는 무차별 지하격투기였기에 더욱 위험한 무대다. 숱하게 생사를 넘나든 그는 가문 내의 경호인력 중에서도 독보적인 대인격투 능력을 자랑했다.

그런데…….

“파비오!”

“예썰!”

한데, 그런 파비오가 격투계 프로도 아닌 웹소설 작가와 동수를 이뤘다. 비록 실전이 아니라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가브리엘라는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말이 되나? 아니, 저 남자가 문화예술 분야 외에도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체감이 달랐다. 심지어 아직 꽃피우지 못한 재능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주환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Mi scusi, signorina. Era molto più forte di quanto pensassi.(죄송합니다, 아가씨. 저 남자 생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녀의 부름에 달려온 파비오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가브리엘라는 못마땅한 눈으로 파비오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몸 상태는?”

“도중에 멈춰서 괜찮습니다. 아가씨를 모시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다행이네. 솔직히 걱정했어.”

“예. 역시 아가씨의 반려가 될 사람이라 그런지 엄청났습니다.”

“반려… 그건 이미 그른 것 같은데.”

가브리엘라는 시선을 돌려 서주환을 바라봤다. 그는 곰처럼 생긴 남자에게 붙잡혀서 시달리고 있었다. 보통의 남자들이었다면 벌써 그녀에게 다가와 본인을 어필하고 있었을 텐데, 그는 전혀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능력은 회복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상관없지만.’

새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 남자의 능력이 있다면 훗날 가문을 장악하기 수월할 텐데.

- 반려는 개뿔. 난 너한테 있어 사랑이 아니라 수단이잖아?

흠칫.

“Shit……."

가브리엘라는 문득 떠오른 말에 욕설을 내뱉었다.

‘사랑’이 아니라 ‘수단’.

서주환이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랑이 뭔데.’

답을 내지 못하는 물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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