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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꿈, 그리고 행복
옷을 갈아입은 서주환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카드를 보며 말했다.
“타로 점?”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뭘 확인하고 싶은데?”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시면 말해드릴게요.”
“음? 내가 화낼 짓 했어?”
“아,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말해봐.”
가브리엘라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한다.
“아까 그 여자요. 헬스장에서 봤던.”
“장덕자? 덕자가 왜?”
“시합 나간다고 했잖아요. 그 시합, 결과가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아.”
서주환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근거 하나 없는 말이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가브리엘라라서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란 건 복귀전 날짜가 급하게 잡혔을 때부터 알고 있었잖은가.
“뭐, 질 수도 있지.”
“음? 생각보다 쉽게 납득하시네요?”
“어떻게 항상 이기고만 사냐. 파이터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지. 가능하면 이겼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 여자가 천재라고 하시길래 안 믿을 줄 알았어요.”
그리 말한 가브리엘라가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할 말은 거기까지라는 듯 그냥 그렇구나 하는 태도.
서주환은 작게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 연기는 완벽했지만, 실체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속내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나본데?”
“…….”
“해봐. 내숭 그만 떨고.”
가브리엘라가 조금 망설이다가 눈을 마주쳤다.
“그 여자, 주환의 말과 달리 천재가 아니에요.”
“계속해.”
“오래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칠 거예요. 어중간한 재능 때문에 남들보다 배로 고생할 거예요.”
“신기하네. 카드로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대략적인 정도라면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벽을 만날지는 모른다. 그러나 성공의 크기와 앞날의 긍정 여부 정도는 추측이 가능했다.
서주환은 재차 고개를 끄덕이곤 질문했다.
“격투기로 한정해서 점친 거지?”
“네. 질문이 구체적이어야 답의 정확도가 올라가거든요.”
“그럼 그거, 피트니스 쪽으로 다시 해봐.”
“?”
가브리엘라는 의문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서주환의 말을 따랐다.
잠시 후.
“어…?”
그녀의 입에서 당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주환은 씩 웃으며 물었다.
“어때, 아직도 아니라고 나와?”
“…….”
가브리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드의 결과가 조금 전과 전혀 달라졌다.
세계에 이름을 남길 수준. 천재라기에 모자람이 없는 재능이다.
서주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덕자 걔는 피트니스 쪽에 더 재능이 있거든.”
장덕자가 가진 상위 재능은 쾌변(A/S), 소화(B+A+), 운동 (B/B+)이다.
처음 봤을 때는 무슨 이런 짐승 같은 재능이 있나 싶었지만, 잘 먹고 잘 싼다는 것은 몸을 만드는 데 있어 엄청난 이점이었다. 거기에 운동에 대한 재능도 평범한 수준을 넘었으니 피트니스 쪽으로 계속 나간다면 세계적인 보디빌더가 될 수 있으리라.
잠시 말이 없던 가브리엘라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그 여자, 왜 격투기를 하는 거예요?”
“그야 헬스보다 격투기를 좋아하니까.”
“…….”
“이해 못하겠지? 왜 잘할 수 있는 걸 두고 어려운 길을 가는지.”
“솔직히, 네, 잘 하는 걸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글쎄.”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잘 하는 걸 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더 행복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은 자신이 잘 하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재미를 느끼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분명 장덕자 같은 사람도 존재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피트니스에 더 재능이 있음을 알면서도 불확실한 격투계에 다시 뛰어들었다.
가브리엘라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건.”
“응?”
“그런 건 평범한 사람의 자기위로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테이블 위의 카드를 바라봤다. 분명 범상치 않은 재능과 성공을 의미하는 카드가 나왔다. 심지어 장덕자는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장덕자의 행동은 이제껏 그녀가 알고 있던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다.
문득 어젯밤 서주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난 재능과 행복은 별개라고 봐.
구태여 따지진 않았지만,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가치란 능력으로 정해지는 것이니까.
분명 그러할진대.
‘그 여자는 왜…?’
가치관이란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가브리엘라는 서주환에게 이미 답을 들었음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을 들어 서주환에게 물었다.
“이것 때문인가요? 같이 운동을 가자고 한 이유가.”
“눈치는 좋네.”
서주환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브리엘라의 가치관은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본인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닮아간다니. 끔찍한 일이야.’
아버지를 ‘그 인간’ 이라 부르며 적대감을 드러냈으면서, 정작 말하는 방식이나 사고관은 저가 싫어하는 아비를 닮아있었다.
얼마나 지랄맞은 일인가.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님에 단순히 길러졌다는 이유로,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저도 모르는 새 주입을 받아버렸으니.
“그래봐야 고작 한 명…….”
저 보라.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벌써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 어찌 그의 주위에는 하나같이 사연 있는 여자들만 꼬이는 건지.
서주환은 가브리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네?”
“한 명으로 납득이 안 가면 더 보여줄게. 그러니까 네가 직접 보고, 듣고, 생각해서 판단해. 가문에서 배운 건 잊어버리고.”
“…….”
가브리엘라는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빤히 바라봤다.
“왜… 이렇게까지 해요? 주환은 절 싫어하잖아요.”
“안 싫어하는데?”
가브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어제는 분명…….”
“어제까지는 싫어했지. 화도 났고.”
앵무새처럼 부와 명예, 권력을 말하는 모습이 답답했고, 사람한테 가치를 매기는 태도가 역겨웠으며, 그의 친구들을 제 아래로 보는 말투에 화가 났다.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 듣고 난 후에는 화가 난다기보단…….
“불쌍하더라.”
“…제가요?”
“그래. 진짜 존나 불쌍해서 못 봐주겠더라. 앞으로도 그러고 살 거 생각하니까.”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가치를 늘어놓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에는 화만 났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능력을 잃는다는 두려움에 질린 모습이었다.
“…….”
가브리엘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이 불쌍하다니.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어렸을 적 가문의 고용인들이 주로 했던 소리였다. 그들은 무엇 하나 인정받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불쌍하다며 가십거리로 삼았다.
하지만 점술 능력을 깨우친 뒤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딴 말을 주워섬겼던 것들은 모두 쳐내버렸기에.
가브리엘라는 손을 뻗었다.
‘오지랖 넓은 남자.’
그리 생각하며 서주환의 손을 맞잡았다. 능력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그의 마음에 들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적절한 변명은 변화의 계기가 된다.
“아, 그런데 착각하지마라? 싫어하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결혼은 안 해.”
울컥.
“그건 어젯밤에 포기했어요.”
“그럼 다행이고. 혹시라도 좋아하면 곤란하거든.”
가브리엘라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 정말 짜증난다고.
*
서주환은 목적지로 이동하며 가브리엘라의 상태창을 띄웠다.
성별: 여성
나이: 23살
키: 171cm
호감도: C
현재 성욕: C
몸무게: 54kg
페티시: Geniusphilia(上)
보유 재능: 점술(A+/S), 매혹(A/A+), 충동(B+/A), 안목(B+/A)
‘호감도가 C로 올라갔네. 떨어졌던 점술 재능도 다시 A+가 됐고.’
분명 A랭크로 떨어졌던 점술 재능인데 하루 만에 수치가 복구됐다. 아무래도 막 떨어진 후 바로 ‘성교사’의 효과를 받았기 때문인 듯했다.
호감도 C로 받을 수 있는 숙련도 버프는 140%.
이 정도 버프로 떨어진 수치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재능이 하락하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는 의미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열병을 앓은 것은 19살. 지금이 23살이니까 4년간에 걸쳐 조금씩 약화된 것이었다.
‘관계를 가지면 추가 버프가 100%, 호감도를 A까지 올리면 200%. 내가 점술을 직접 가르쳐줄 수는 없으니까 총 300%인가? 이 정도면 오래 안 걸릴 것 같은데.’
가브리엘라가 본래 지니고 있던 점술의 숙련도가 S급이었다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복구가 가능할 듯했다.
그는 힐끔 옆에서 따라오는 가브리엘라를 곁눈질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퀘스트는 완수해야지.’
어제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마음을 바꿨으니 퀘스트 또한 완수할 셈이었다. 보상이 한두 푼도 아니고 30만LP였으니 얻을 수 있는 욕망 에너지도 적지 않을 터. 루시가 돌아오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 가브리엘라가 그를 돌아봤다.
“저기요, 주환.”
“왜?”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장소는 알려줘도 되잖아요.”
“응? 내가 안 말해줬나?”
“안 말해줬거든요!”
가브리엘라가 작게 볼을 부풀리며 투덜댔다. 그에 서주환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안 어울리니까 하지 마라.”
“…….”
이 남자가 진짜. 고자도 아니고 자신을 이딴 식으로 대해? 다른 남자들이었으면 벌써 홀랑 넘어왔을 텐데.
가브리엘라는 속내를 숨기고 간신히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럼 주환이 생각하기에 저는 뭐가 어울릴 것 같은데요? 혹시 이런 쪽이 취향?”
가브리엘라가 짐짓 도발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요사하게 일렁였다.
서주환은 고개를 저었다.
“응, 그냥 하지 마.”
“…….”
다시 고개를 돌리는 서주환.
결국 어디로 간다는 말은 설명도 없었다.
가브리엘라는 빠득 이를 갈며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중지를 들어올렸다.
*
서주환이 찾은 곳은 꽤 연식이 오래된 허름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안쪽은 외관과 달리 깔끔하고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는 체육관이었다.
“강호 형님! 저 왔습니다!”
이 체육관은 그가 한동안 백강호의 집에 얹혀 살 때 자주 들러서 무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고, 사람 죽이는 이상한 수련을 받은 곳이었다. 죽이는 법을 잘 알아야 안 죽이고 잘 팰 수 있는 법이라던가. 언젠가 ‘살인’ 재능을 얻은 후 휘둘릴 때 여기서 교정을 받았다.
“오, 왔냐?”
체육관으로 들어가자 키가 2m 가까이 되는 거구의 털복숭이 남자가 반갑게 인사해왔다.
서주환도 마주 인사하며 안부를 물었다.
“안녕하세요, 형님. 요즘도 잘 지내시죠?”
“말해 뭐하냐. 요즘 행복해서 살겠다. 다 네 덕이야, 인마.”
“다행이네요. 형수님은 어때요? 입덧 같은 건 안 심하세요?”
남자는 이석찬의 개인 경호원이자 그에게 발기부전을 치료받은 백강호였다.
백강호가 씩 웃으며 답했다.
“다행이 아직은 없더라. 아직 몇 달 안 됐으니까 지켜봐야겠지만.”
“하하. 나중에 영양제 좀 챙겨드릴게요.”
“자식이, 형님 민망하게 어린놈이 뭘 계속 챙겨준대?”
“흐흐. 저 돈 잘 버는 거 아시잖아요.”
백강호도 만만찮은 고소득자였지만 서주환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백강호는 이내 호쾌하게 웃으며 서주환의 등을 두드렸다.
“고맙다, 짜샤. 그보다 집에 한 번 들러. 혜리가 너한테 식사대접 하고 싶다더라.”
“저야 언제든 좋죠. 형수님이 또 요리를 끝내주게 잘 하시잖아요. 생각만 해도 군침 도네요.”
“그럼 오늘 점심에 오던가.”
“그래도 돼요? 아, 그런데 오늘은 일행이 있어서…….”
그는 뒤에 따라온 가브리엘라를 가리켰다. 그녀의 옆에는 백강호 못지않은 덩치의 파비오도 함께 있었다.
백강호는 가브리엘라의 얼굴을 확인하고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또 새 여자냐? 너 그러다 진짜 천벌 받는다. 하연이 울리면 주철 형님이 가만 안 있을 걸.”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전 독신주의라니까요.”
“허이구, 그러시겠지. 너 몸 사려라. 형님은 하연이가 너랑 사귀는 줄 아니까.”
“…….”
서주환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이주철은 정하연과 이석찬의 아버지다. 정하연의 어머니를 뵈러 산소에 갔다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사귄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정하연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했었다.
‘나중에 정말 사지가 찢어지는 게 아닌가 몰라.’
서주환이 ‘서/주/환’으로 찢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자음 모음 단위로 갈라져버릴지도.
서주환은 섬뜩한 생각을 뒤로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덕후는요?”
“아, 장덕훈이? 저기서 스파링 하고 있다.”
백강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링 위에서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남자 두 명이 보였다. 한 사람은 장덕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일전에 흑곰파를 치러 갔을 때 본 적 있는 백강호의 부하 김호석이란 사람이었다.
한데 놀라운 점이 있었으니.
뻐어어억!
“끄으윽. 이 어린노무새끼가……!”
장덕훈이 날린 리버블로우(간장치기)가 김호석에게 작렬했다. 이내 그는 옆구리를 감싸 쥐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장덕훈은 기겁하며 바로 사과했다.
“헉, 죄송합니다!”
“쿨럭, 죄송할 거 없다! 전부 되돌려 줄 테니까!”
“으아아악! 살려주십쇼! 강호 형님! 강호 형님!”
빠아아악! 뻐억! 퍼억!
다시 일어선 김호석의 진심어린 공격이 장덕훈을 몰아쳤다. 그는 백강호가 주도하는 용병부대에서 생사를 넘나든 몸. 특히 대인 격투에서 두각을 보인 인물이었다. 방심해서 일격을 허용했다지만 아직 덜 여문 장덕훈 정도는 손쉽게 요리가 가능했다.
백강호는 그 광경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서주환을 돌아봤다.
“덕훈이 저놈 저거 소질 있더라. 나 주면 안 되겠냐?”
“푸흐. 덕훈이가 제 물건인가요?”
“네 제자라던데?”
“뭐 틀린 말은 아니죠. 격투기가 아니라 소설이지만.”
그 말에 백강호의 인상이 구겨졌다.
“덕훈이도 작가냐? 아니, 너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그 육체를 가지고 왜 소설을 쓰는 거야? 내 밑으로 들어오면 인간병기로 만들어줄 자신이 있는데…….”
서주환은 백강호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인간병기 같은 거, 별로 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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