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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꿈, 그리고 행복
동이 트지 않은 새벽.
가브리엘라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essere rumoroso……(시끄러워……).”
부스럭.
“시끄럽다니까, 파비오. 몇 신데 이렇게… 헉?!”
가브리엘라는 순간 어젯밤 일을 떠올리고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옆을 돌아봤다.
‘꿈이었나?’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꿈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일어났냐?”
가브리엘라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를 확인한 순간, 작게 숨을 들이켰다. 남자는 어젯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조각 같은 몸매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각상이 피식, 비웃음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경험이 없다고 했지? 아니면 그것도 연기?”
“N, Non e'vero(그, 그런 거 아니에요).”
“한국말로 하자. 그리고 뭘 그리 당황해? 너도 비슷한 꼴이구만.”
“네?”
그 말에 가브리엘라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했다. 그녀 또한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꺄악!”
서주환은 급히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가리는 가브리엘라를 보곤 혀를 찼다. 어젯밤 한 침대 위에서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새삼 뭘 부끄러워하는지.
“일어났으면 대충 세수라도 해. 나가야 되니까.”
“…나간다고요? 어디를요?”
“운동하러.”
“그런데 제가 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가브리엘라.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능력 회복, 필요 없나 보다?”
“…준비할게요.”
그리 대답한 가브리엘라는 이불 안쪽에서 주먹을 꼭 쥐었다.
저 남자를 한 대만 때려줄 수는 없을까.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으니.
“빨리 준비해!”
“아, 알았어요!”
문밖에서 들려온 외침에 허겁지겁 준비를 시작하는 가브리엘라였다.
*
가브리엘라는 차가운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며 속으로 불만을 투덜댔다.
‘내가 왜 새벽부터 이런…….’
그때 앞서 걷던 남자가 불쑥 옆으로 다가왔다.
“새벽부터 깨워서 불만스럽지?”
“아, 아뇨. 저도 새벽 운동 좋아해요.”
가브리엘라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서주환이 픽 비웃었다.
“입발린 소리 하긴.”
“진심이에요.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걸요.”
“진심 한 번 참 저렴하다. 그래도 얼굴 보니까 잘 자긴 했나보네. 하긴, 누구 가슴에 기대 잤는데.”
그 말에 움찔, 가브리엘라가 입을 벌렸다.
“가슴에 기대 잤다니. 제가요?”
“너 말고 누가 있냐. 아주 코박죽을 할 기세던데.”
“코박죽…?”
“그 말은 모르나? 한자어도 잘하더니.”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거구의 백인 남자, 파비오가 말했다.
“코 박고 죽는다. 잇츠 코박죽.”
“오. 파비오. 가브리엘라보다 잘 아네요?”
“코박죽. 내로남불. 누칼협. 코리아의 슬랭어는 재밌다.”
“슬랭어? 푸흐. 좀 다르지만 재밌는 표현이 많긴 하죠.”
아무래도 파비오는 줄임말을 슬랭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크게 다를 것도 없긴 하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가브리엘라가 조금 불만스러운 투로 말한다.
“주환, 왜 파비오한테 존대를 써요?”
“응?”
“저는 파비오의 주인이에요.”
그러니까, 주인인 자기한테는 막대하면서 왜 파비오한테는 예의를 갖추냐는 뜻이었다.
서주환은 힐끗 파비오를 보곤 눈꼬리를 긁적였다.
“그냥 뭐, 마음에 들어서?”
“…설마 남자가 취향이신가요?”
“이 년 봐라? 너 왜 갑자기 까부냐? 엉?”
“까, 까불다니, 오해예요. 제가 어떻게…….”
가브리엘라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서주환은 그 가증스러움에 혀를 찼다. 그에게 여자가 몇 명이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떼기는. 그녀는 약점을 잡혔다는 생각 때문인지 하루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파비오가 눈을 꿈뻑이며 물었다.
“우리 아가씨, 어젯밤 낭군님 가슴에 코박죽 했다?”
“푸학!”
그 말에 서주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입을 떡 벌린 가브리엘라의 얼굴이 어찌나 우스워보이던지. 그는 쉽게 그칠 줄 모르는 웃음을 끅끅거리며 답했다.
“맞아요, 파비오. 이 여자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하던데요.”
“대, 대체 누가요!? 파비오, 듣지 마! 헛소리다!”
“오, 내 말이 헛소리라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오우, 아가씨가 많이 사랑하나보다, 낭군님을. 하루 만에 함락. 역시 카드에 나온 대로 대단한 능력.”
“아니라니까! 애초에 안 했다고!”
“푸흐하핳!”
“나, 이거 안다. 코리안 슬랭어로 자박꼼이라고 한다.”
“푸크흐흫흑! 아, 파비오. 그만 좀 웃겨요!”
서주환은 도저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가브리엘라는 자박꼼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급격한 수치심을 느끼고 버럭 소리쳤다.
“파비오! 이번 달 월급은 삭감이야!”
“Oh, Nooooooooo-!”
파비오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서주환을 향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브리엘라가 깨기 전 찾아와 그냥 넘어가줘서 고맙다 말하던 파비오가 떠올랐다.
‘경호원에, 친구노릇, 아비 노릇까지. 고생 많구만.’
저 아가씨는 알까.
파비오가 허리까지 숙여가며 부탁하지 않았다면…….
이래서 인복이 중요하다는 거다.
*
리본 피트니스에 도착한 서주환은 상의를 탈의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뒤쪽에서는 파비오와 가브리엘라도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원, 투, 쓰리. 아가씨, 배에 힘을 줘야한다! 힘 안 주면 허리가 다친다!”
“알고 있어. 흡!”
서주환은 한 쪽에서 파비오에게 PT를 받고 있는 가브리엘라를 바라봤다. 그저 귀하게 자란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세가 제대로였다.
그가 빤히 바라보자 가브리엘라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원래 운동 좋아한다니까요.”
“흐. 그러시겠지.”
“정말인데…….”
“아무렴. 무려 메디치의 아가씨께서 하시는 말씀인데.”
서주환은 놀리듯 말하곤 자신의 운동을 위해 몸을 돌렸다.
‘Fuck!'
가브리엘라는 그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가운데 손가락 곧추세우고 혀를 내밀었다.
얄미운 남자 같으니. 역시 어제 하루 동안 제 성격을 다 들킨 듯했다. 그래도 입장이 입장이니 내숭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본래 예쁜 여자가 하는 내숭은 알면서도 당하는 법이다.
그때 삐리리- 하는 전자음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가브리엘라가 급히 중지를 접는다.
“서주환-!”
여자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서주환에게로 달려들어 끌어안았다.
“왔어?”
서주환은 예상했다는 듯 그녀를 마주 안아주었다. 이 시간쯤 올 거라고 연락을 받았기에 그도 평소보다 더 빨리 나온 것이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누나 안 보고 싶었고?”
“보고 싶긴 네가 더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흐히히. 재수 없게 말하는 건 여전하네!”
“사람이 한 결 같아야지.”
“으휴. 한 마디를 안 져요.”
장덕자는 얄밉다는 듯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서주환은 낄낄 웃으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전보다 체지방이 떨어졌는지 손끝에서 느껴지는 근질이 선명했다.
“살이 좀 많이 빠진 것 같다?”
“그야 감량 중이니까. 시합 잡혔다고 했잖아.”
“너무 무리하진 말고.”
“무슨 소리! 복귀전인데 무리해서라도 이겨야지!”
장덕자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그 모습에 서주환은 걱정이 들었다.
‘벌써 복귀전이라니,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그녀가 격투기를 다시 시작한 건 겨우 한 달 남짓이다. 한데 벌써 복귀전을 한다? 일반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경우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장덕자는 이를 기회로만 봤다. 남자에 비해 선수풀이 적은 여성 격투계는 제의가 왔을 때 잡는 게 좋다나. 그녀는 오히려 시합이 안 잡힐 것을 걱정하는 게 마땅하다고 말했다.
“히히. 오늘은 티켓 주러 왔어. 꼭 보러 와야 된다? 운 좋게 꼽사리 낀 거긴 하지만 꽤 큰 매치거든.”
벌써부터 시합이 기대된다는 듯 환히 웃으며 말하는 장덕자.
서주환은 그 모습을 보곤 픽 웃어버렸다. 이제 와 걱정해서 어쩌겠는가. 당사자가 이렇게 기대하고 즐거워하는데.
그리고 사실, 장덕자는 이미 충분히 만들어진 몸을 갖고 있었다. 아니, 헬스를 통해 격투기를 할 때보다도 체계적으로 관리한 걸 생각했을 때, 감량만 잘한다면 복귀 이전보다 좋아진 피지컬을 선보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문제라면 무뎌진 감각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주환은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승리의 주문을 건넸다.
“응원하러 갔는데 지기만 해봐. 앞으로 안 할 거야.”
“뭐어?! 너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기겁하는 장덕자.
그는 낄낄 웃으며 되물었다.
“질 생각이야?”
“아니! 이길 건데!”
“그럼 됐네.”
“그런…가? 뭐, 아무튼 이기면 되는 거니까!”
그녀는 반드시 이겨야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다 슬쩍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주환을 돌아봤다.
“저기, 주환아. 말 나온 김에 지금…….”
“안 돼.”
“왜!?”
서주환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장덕자는 그제야 가브리엘라와 파비오를 발견하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안 되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런데 외국인? 되게 예쁘다. 네 친구야?”
“친구는 아니고, 내 스토커야.”
“스토커?”
“아니에요!”
그 말에 가브리엘라가 놀란 목소리로 항변했다. 스토커라니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불명예스런 호칭이었다.
서주환은 어이없다는 듯 뒤돌아봤다.
“너 잘도 아니라고 말한다? 결혼해달라면서 집까지 찾아와놓고선.”
“윽. 그건…….”
가브리엘라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본능적으로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실제로 그녀는 스토커나 다름없었다.
장덕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잠깐, 잠깐. 뭐라고? 결혼? 주환이 너 결혼해?”
“아니, 당연히 거절했지.”
서주환의 즉답에 장덕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우. 난 또 앞으로 못하는 줄 알았네.”
“…그게 중요하냐?”
“당연하지. 격투기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야.”
서주환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가.
장덕자가 씩 웃으며 발걸음을 물렸다.
“어쨌든 오늘은 그른 것 같으니 가볼게.”
“운동도 안 하고?”
“티켓 주러 온 거라니까. 그리고 체육관 가서 해야지.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스파링이거든.”
“그래, 파이팅 해.”
“땡큐. 그쪽도 운동 열심히 해요!”
장덕자는 가브리엘라와 파비오에게 붕붕 손을 흔들며 건물을 나섰다. 파비오는 기운 찬 아가씨라며 마주 손을 흔들었고, 가브리엘라도 엉거주춤 손을 들어올렸다.
띠리리- 다시 문이 닫힌다.
가브리엘라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신없느…은이 아니라, 기운 찬 분이네요.”
“흐흐. 저래 보여도 엄청난 천재야.”
“네? 천재요?”
서주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쾌변과 소화의 천재. 네 점술 못지않게 엄청난 재능이지.”
“What…?”
아무튼 천재다. 그것도 S급 잠재 능력을 가진.
*
아침 식사를 마친 가브리엘라는 테이블 위에 카드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카드를 번갈아보며 작게 입을 벌렸다.
‘힘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아주 약간이지만 분명 회복됐다.’
어째서? 몇 년 동안 떨어지기만 하던 능력이 돌연 회복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젯밤 일 때문에?’
지난밤에 보낸 낯선 시간.
생전 처음으로 남자에게 몸을 맡겼던 경험.
‘하지만 끝까지 안 했는데?’
그래도 그것 외에는 짚이는 바가 없었다.
결국 그녀가 내린 결론은 그 행위 자체가 유의미하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내심 ‘섹스를 하면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서주환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따른 것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몸을 사용해서라도 읍소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 말이 진짜였다니.
가브리엘라의 시선이 막 샤워를 하고 나오는 서주환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서주환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뭘 훔쳐봐? 이 변태가.”
“벼, 변태라뇨?!”
“사람 알몸을 빤히 쳐다보는데 변태지 뭐야. 언제까지 보려고? 고개 돌려라.”
“…….”
그럼 당신 집에 가서 씻으면 되잖아! 라고는 차마 소리칠 수 없는 가브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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