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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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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D
크리스마스
서주환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재능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지닌 재능은 천차만별이고,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보통 잘하는 일을 좋아하게 되기 마련이라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주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강나루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루야, 너는 만화가가 되고 싶은 거지?”
“네…….”
“왜 만화가가 되고 싶은 거야? 사실 그림은 꼭 만화가가 아니더라도 그릴 수 있잖아. 표지를 그려주는 일러레도 있고, 아니면 미대에 가서 좀 더 정석적인 절차를 밟을 수도 있고.”
만화가로서의 강나루는 그림을 제외하면 만화 관련 재능이 밑바닥을 치는 수준이다. 단순히 스토리적인 면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컷을 어떤 식으로 나누고, 또 특정 장면의 컷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몰입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흔히 만화를 그려본 경험이 부족한 초보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었으나, 강나루는 이를 감안해도 정도가 심했다. 작업량에 비하면 아예 발전이 없는 수준이었으니.
하지만 그녀가 지닌 잠재 등급 A+의 그림 재능은 그 하나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 작정하고 미술계에 투신한다면 세계에 이름을 알릴지도 모르는 일. 물론 세상일이라는 게 무조건 실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운이 따라줘야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강나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창작자가 되고 싶은 거지 단순히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게 아니거든요. 만약 글에 재능이 있었더라면 소설을 썼을 거예요.”
“소설을?”
“네. 혼자 방에 틀어박혔을 때 소설이랑 만화가 엄청 힘이 됐거든요. 제가 위로 받았던 것처럼 사람들한테 웃음을 주고 싶어요.”
“…그래. 좋은 꿈이네.”
서주환은 차마 강나루에게 만화적 재능이 부족하니 그만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만화가를 꿈꾸는 이유가 남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비슷한 마음이었지.’
불행한 운명 때문에 힘들었을 적 그를 위로해준 것은 소설을 비롯한 각종 문화콘텐츠였다. 주변에 마음 터놓을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할 때면 소설부터 시작해서 만화, 애니, 드라마, 영화 등 닥치는 대로 손을 댔다. 그것이 허구에 불과할지언정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모두 잊을 수 있었기에.
이는 그가 회귀한 후 충분한 돈을 얻었음에도 웹소설 집필에 열을 올리는 이유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이 현실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쉬어가는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서주환은 차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강나루에게 다른 길을 제시할 수 없었다. 다만 응원의 말을 건넬 뿐이었다.
“응원할게, 나루야.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고마워요, 오빠.”
“만화라는 게 꼭 혼자 할 필요는 없잖아. 여차하면 글 작가를 구하면 될 일이야. 물론 직접 하는 게 더 보람찰지도 모르지만…….”
너 혼자 하면 만화가로서 대성하기는 무리일 거야.
서주환은 차마 내뱉지 못한 뒷말을 삼켰다. 이미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강나루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 시작도 하기 전이니까 혼자 도전해보고 싶어요. 그, 글 작가를 구하면 같이 협업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건 좀 무서워서…….”
서주환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강나루는 협업을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무서운 것이었다. 그녀는 중학생 때부터 이어진 왕따 문제 때문에 약간의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었다. 그나마 서주환 자신도 강나루가 좋아하는 소설의 작가가 아니었더라면 친해지는 데 훨씬 오래 걸렸을 터였다.
그는 짐짓 밝은 표정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래! 뭐하면 나루가 내 소설 그림 작가 맡아주면 되지. 나도 나름대로 그림 공부하고 있거든. 조만간 학원도 다니려고 하니까 실력 좀 오르면 내가 콘티 짜고, 나루가 그림 그려주면 되겠다.”
“저, 정말요? 저는 그럼 너무 좋아요! 오빠 소설을 제가 그린다니 상상만해도… 햐아.”
강나루는 금세 망상에 빠져서 흐물흐물 입가가 풀어졌다. 열렬한 팬인 서환 작가의 소설을 자신이 그린다니. 그야말로 성덕이 아닌가!
물론, 지금 상태로는 콘티를 짜는 것부터가 문제였기에 앞날이 요원했지만 말이다.
“오빠, 언니, 저 들어가서 그림 그릴래요!”
하지만 원동력으로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강나루는 금세 시무룩했던 기색을 지우고 의욕을 불태웠다.
강나루가 방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강필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짙은 한숨에 최미화가 움찔하며 말한다.
“그으, 죄송해요, 어르신. 제가 말을 좀 더 부드럽게 할 걸 그랬나 봐요.”
강필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오히려 잘 말해줘서 고맙지. 사실 두 사람이 말한 건 나도 느끼고 있던 부분이거든.”
서주환은 역시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나루한테 부족한 부분을.”
“어찌 모르겠나.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게 되었어도 아직 보는 눈은 안 죽었다네.”
“사랑하는 손녀한테 쓴 소리 하기가 힘들었겠네요.”
“맞네. 그래서 부득이 두 사람에게 대신 맡겼지. 나루한테 필요한 부분을 잘 말해줘서 고마우이.”
한 세대를 풍미했을 정도로 뛰어난 만화가였던 강필춘. 그런 그가 강나루의 문제점을 모를 리 없었다.
악역을 제대로 맡았던 최미화는 조금 떨떠름히 웃다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럼 이제 저희 얘기도 좀 나눠볼까요? 곧 웹툰화 런칭인 건 둘 다 알고 계시죠?”
“어, 1월 1일이라면서. 선배님 작업속도가 생각보다 빨랐지?”
“응. 한 1년 준비해서 여름 전에나 시작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됐어.”
최미화는 새삼 대단하다는 듯 강필춘을 바라봤다.
“작업속도가 어떻게 그리 빠르세요? 태블릿 적응하기 힘드시지 않았어요?”
“허허. 우리 나루가 도와준 덕분이지. 사실 무명(武名)으로 활동할 때 연습하기도 했고.”
“그걸 감안해도 대단하신 걸요. 현역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보다도 빠른 속도세요.”
“이미 스토리가 다 있는데 어려울 게 뭐 있겠나. 글로 본 장면을 그대로 그리면 될 뿐인데. 주환 군이 직접 각색에도 참여해줬으니 더 쉬웠지.”
서주환과 최미화는 황당하다는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강필춘의 말처럼 소설을 그림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서주환이 각색에 참여했다고 해도 만화적인 콘티를 그릴 수는 없었기에 단순히 글로 설명했을 뿐이다. 그걸 그림으로 표현해낸 것은 온전히 강필춘의 능력이었다.
‘하긴, 현역이셨을 때도 그림보다 스토리에서 골머리를 썩었다고 했었지.’
강필춘은 완벽주의적인 성향 탓에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그려놓고도 전량 폐기를 했었다고 한다. 그리 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마감 시간에 늦은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필춘은 손이 빨랐다. 그나마 노년에 접어들어 약해진 게 이 정도였으니 그의 대단함을 더 말 할 필요는 없으리라.
세 사람은 런칭을 앞둔 ‘빙의사부는 무림공적’에 대해 한참이나 얘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서주환이 아직 이미지화 되지 않은 캐릭터의 그림을 꺼내들었다.
“어떠세요? 글을 쓸 때 제가 생각한 당소소의 이미지인데.”
“허어. 그림이 많이 늘었구먼. 이 정도면 주환 군이 직접 그리는 게 더 좋겠는 걸.”
“어우, 아닙니다. 그냥 그림 한 장 그리는 거랑 만화 그리는 게 다르단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취미로 일러스트나 그리렵니다. 앞에 대작가 선배님을 두고 제가 왜 그립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지닌 재능은 ‘일러스트레이터’지 만화가 아니었다. 물론 그에겐 ‘손재주’와 ‘글쓰기’ 재능 등 여러 가지 재능요소가 더 있었으니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지만 충분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만날 때마다 얼굴에 금칠을 하니 부담스럽구먼. 아무튼 그려준 건 참고해서 한 번 내 식대로 바꿔보겠네. 혹시 다른 인물들도 그린 게 있나?”
“예. 종종 그리고 있습니다.”
“그럼 그것도 넘겨주게. 내가 그리는 것도 좋지만 원작자의 설정을 참고하는 것도 좋겠지. 원작을 본 독자들이 좋아하겠어.”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 참고로 이 캐릭터 만들 때는 미화가 많이 도와줬습니다.”
“맞아요, 어르신. 어때요?”
“호오. 이 캐릭터는 나루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어머, 그래요?”
그렇게 세 사람은 일과 수다의 경계에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은 언제나 빨리 가기 마련.
어느덧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는 건가?”
“예.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요.”
“흐음. 주환 군은 주변에 사람이 많나보구먼.”
“하하. 감사하게도 제가 인복이 있나봅니다. 선배님이랑 작업할 수 있게 된 것만 봐도 그렇죠.”
“흘흘. 이리 말을 예쁘게 하는데 누가 안 좋아하겠나.”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었다. 옆에서 최미화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며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Narratophilia(넬레토필리아)를 가진 그녀와는 부드러운 말보다 막말, 욕설, 선정적인 말을 더 많이 주고받았다.
잠시 서주환을 흘겨본 그녀는 예쁘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도 가볼게요, 어르신. 담당 작품 몇 개 검토하고 정리 좀 하려고요. 저번에 말씀 드렸다시피 곧 이직을 하게 되어서요.”
“아쉽구먼.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는데. 특히 미화 처자가 퇴사한다니 아주 아쉬워. 요즘 처자처럼 열정적인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최미화는 본래 강필춘과 만날 일이 거의 없다. 그녀는 웹툰 편집자가 아니라 소설 편집자였기에 굳이 강필춘까지 신경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여기까지 온 것은 일 외적으로도 작품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하. 종종 들리겠습니다, 선배님.”
“어르신, 저도 협객 시리즈 다 찾아보고 팬 됐어요. 퇴사해도 우리 서 작가님이랑 종종 같이 올게요. 그때 가서 이제 편집자 아니라고 무시하시면 안 돼요?”
“허허. 내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고맙지.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려서 보기 좋거든. 내 젊었을 적 같아.”
그 말에 넉살좋게 말하던 최미화가 당황했다.
“네, 네? 어, 저랑 서 작가님은 그런 사이가 아닌데요…….”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에 강필춘이 의아한 얼굴로 서주환을 돌아봤다.
“두 사람 교제하는 게 아니었나?”
“그게, 뭐, 특별히 친한 사이긴 합니다만… 친구입니다, 친구.”
“이런, 내가 오해했었나 보구먼. 난 당연히 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흐음. 그럼 우리 나룬한테도 기회가 있는가?”
“하, 할아버지!”
인사하기 위해 나온 강나루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서주환은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님. 제 나이가 스물 셋입니다. 나루는 아직 열여덟이고요.”
“그러니까 딱 좋지 않나. 다설 살 차이면 궁합도 안 본다지? 어린 게 문제라면 좀 기다렸다가…….”
“아이고. 나루는 저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야지요. 그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주환은 끝까지 예의를 지키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말에 깃든 태도가 얼마나 확고했는지 옆에서 같이 듣던 강나루가 울상을 지을 지경이었다.
‘민짜는 안 된다. 아니, 나중에 성인이 돼도 마찬가지야.’
강나루가 미성년자라는 건 둘 째 문제고, 그의 취향이 아니라는 건 셋째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강필춘이라는 좋은 선배님의 손녀라는 점이었다.
‘지인 가족 건드리다가 좆 되는 수가 있다.’
한수아의 집안만 해도 시한폭탄 같은 상태였다. 혹여 그가 한수아와 관계를 가진 사실이 양가 부모님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결혼 독촉을 해올 게 분명했다.
서주환의 단호한 태도에 강필춘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수염을 쓸었다. 이쯤 되니 더 말하기도 민망스러웠다.
“알겠네. 그럼 또 오시게.”
“예.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 뵙겠습니다. 나루도 안녕.”
“어르신, 건강히 지내셔요~.”
“그려. 조심히 들어가게나.”
“아, 안녕히 가세요!”
강나루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땅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몇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열여덟 소녀의 첫 사랑은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끝을 맺었다.
*
돌아가는 길, 최미화가 툭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나루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그걸 모르겠냐.”
서주환은 당연히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그대로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모르는 척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최미화가 그를 비난했다.
“으. 로리콘.”
“내가 왜!?”
“여고생 꼬셨잖아.”
“미친. 꼬시긴 누가 꼬셔! 가만히 있어도 좋아하는 걸 어쩌라고.”
“와, 진짜 개 별로다. 존나 재수 없어.”
“허…….”
서주환은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꼬시기는 누가 누구를 꼬셨단 말인가. 그는 강나루에게 어떤 호감 표현도 한 적이 없었다.
“너 설마 질투하냐?”
“…아니? 질투는 누가? 내가? 어린애 상대로?”
“오호. 어린애가 아니면 질투하시겠다?”
“…….”
최미화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봤다. 은테 안경 속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내 그녀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 왜! 질투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우,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개새끼야! 소리 안 지르게 생겼냐? 이 카사노바 새끼가 일 얘기 아니면 잘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이씨!”
최미화는 분한 듯 서주환의 어깨를 때렸다. 여자가 많은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열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에 만나자고 하니 다른 약속 있다면서 거절하는데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말로는 친구들과의 약속이라고 하지만 거짓말 하고 다른 여자랑 노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자신은 그의 안에서 몇 번째인지 같은 생각을 하면 없던 질투심도 마구 솟아올랐다.
“내가 오늘 너 만나고 싶어서 없는 시간 쪼개 온 건 알아? 씨, 그런데 놀려먹기나 하고!”
…아니, 네가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되삼켰다.
원래 인간관계라는 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남녀 사이에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져 줄줄도 알아야 한다. 물론 서주환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겨먹었지만 말이다.
그는 쩝 입맛을 다시며 최미화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깨를 때리던 그녀는 양손이 붙들린 채 억울한 눈으로 서주환을 노려봤다.
“이거 안 놔?”
“응, 안 놓을 건데?”
“너…….”
“손을 잡아야 반지를 끼워주지. 왜, 혼자 끼우게?”
“…뭐?”
서주환은 품에서 반지를 꺼대 최미화의 손가락에다 끼워주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씩 웃으며 말한다.
“약지에 끼우고 다녀. 누가 안 찝쩍대게.”
“미, 미친놈아. 이런 건 화내기 전에 주라고. 나만 나쁜 년 같잖아.”
“괜찮아. 내가 훨씬 나쁜 놈이거든.”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 말에 반지를 받은 최미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몇 명 줬어?”
“한 백 명?”
“내 반지는 몇 번째로 비싸? 설마 다 똑같은 걸로 돌려막기한 건 아니지?”
“야 이, 날 뭐로 보고. 전부 다른 거 줬어. 가격은 한꺼번에 주문 제작한 거라 뭐가 얼만지 몰라. 뭐 평균내면 하나당 오백 정도 되겠네.”
“오, 오백? 다 합쳐서지?”
“아니, 그거 하나가.”
“미친! 뭔 돈을 그렇게 썼어?!”
당연히 비싸도 몇 십 정도 할 줄 알았다. 그 정도가 최미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서주환은 월에 억을 넘게 벌어들이는 스타 작가였다. 그녀와는 금전감각이 다른 게 당연했다.
서주환은 잔뜩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픽 웃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건 신경 쓰지 마.”
“…칫. 나도 그냥 해본 말이었다, 뭐.”
최미화는 입을 삐죽이며 반지를 만지작댔다. 다행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내 핸드백에서 곱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이거, 나도 선물.”
“오. 준비했었어?”
“너처럼 비싼 건 아니지만…….”
“가격이 무슨 상관이야? 마음이 중요하지. 지금 봐도 돼?”
“상관은 없는데… 아, 내가 먼저 줄 걸 그랬어. 너무 볼품없을 것 같아.”
아무려면 그가 수백만 원짜리 선물을 바랐겠는가. 솔직히 케이크 하나만 줘도 고마워할 터였다.
서주환은 곧장 선물을 개봉했다. 안에는 편지 하나와 상당히 비싸 보이는 지갑이 들어있었다.
“뭐야, 비싼 거 아니라면서? 이거 명품 아니야?”
“네가 준 거에 비하면 그렇다는 소리지. 나도 나름대로 큰 맘 먹고 산 거야.”
월급쟁이 편집자가 버는 돈이야 아무리 일을 잘해도 뻔하다. 한데 수십을 호가하는 명품 지갑이라니. 이 정도면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산 게 맞았다.
서주환은 곧장 이전 지갑의 내용물을 옮겨 담으며 말했다.
“나 안 그래도 지갑 다 헤졌는데 고마워. 잘 쓸게.”
“그리고 편지는 집에 가서 읽… 으라고! 야!”
“어디 보자. 사랑하는 주환이에게…….”
서주환은 편지를 활짝 펼치고 소리내어 읽었다. 그를 본 최미화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야아! 읽지 마! 내놔! 찢어버릴 거야! 개새끼야!”
“으하하학! 좀 더 자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아이구, 우리 미화 내가 그렇게 좋았어?”
“씨발놈아아악!”
서주환은 흠씬 뚜드려 맞았다. 그리고 반지 낀 손으로 때리면 여자 주먹도 남자 주먹 못지않게 아플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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