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290화 (2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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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참고로 채희 눈나는 33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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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되는 일상

배성근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군요.”

사실은 일전에 이석찬에게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이석찬이란 사람은 진심으로 내뱉은 말에 한해선 어떻게든 이루고야 마는 인종이었기에.

그럼에도 장시간 엔터와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서주환이란 사람이 아까워서였다.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는 서주환에게서 이채희와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이석찬이 아닌 서주환 본인을 설득시키고자 노력한 것이다.

“하하… 예상보다 더 단호하시네요. 제 말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군요.”

“미리 말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죄송할 필요는 없죠.”

서주환은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그를 보며 눈꼬리를 긁적였다.

‘쩝. 괜히 미안하네.’

거절할 거라면 진즉에 했어야 했는데, 그가 들려주는 연예계 이야기가 재밌어서 대답이 늦고 말았다.

‘하지만 갑자기 연예계물이 땡기는 걸 어떡해.’

연예계 관련 소설은 언젠가 한 번 써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디테일을 살리기에는 그가 아는 배경지식과 정보가 적어서 나중으로 미뤄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생겼다. 어떻게 듣지 않고 배긴단 말인가! 그래서 적당히 거절하라는 이석찬의 말도 무시하고 배성근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실은 연기라는 일에 아주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서주환은 안타까워하는 배성근을 보며 쓰게 웃었다.

‘가끔은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다는 게 허무하단 말이지.’

그는 시스템 덕분에 자신이 가진 재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연기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물론 시스템에 표기되지 않은 C+급 이하의 재능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배성근이 기대하는 정도의 배우로써 대성할 수 없을 터였다.

‘물론 배우 관련 재능을 얻게 되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당장 노력할 생각은 들지 않아.’

어찌 보면 스스로의 재능을 수치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임과 동시에 일종의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잠재등급이 C정도에 불과하지만 현재등급을 B 혹은 그 이상까지 높인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종사한 사람에게서 간혹 그런 능력치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노력으로 재능을 뛰어넘었다.

‘난 그렇게 못해.’

자신의 한계를 모를 때는 언젠가 빛나는 미래가 올 것이라며 노력할 수 있지만, 명확한 한계를 알고 있으면 시작도 전에 의욕이 꺾여버리는 법이다. 죽자고 한 가지에만 매달려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어정쩡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서주환은 현재 보유하고 있지도 않은 연기 재능보단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발하는 데에 마음이 갔다.

“주환 씨, 거절하신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요? 제가 너무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배성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는 본인의 말처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서주환을 바라봤다.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서주환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우선은 제가 본업이 따로 있다는 게 이유입니다.”

“본업이요? 대학생 아니신가요?”

“음. 대학생은 맞는데 따로 하는 일이 있어요. 오히려 대학 다니는 게 취미죠.”

“그럼 하시는 일이…?”

“제 본업은 웹소설 작가입니다.”

“웹소설이면 그, 판타지 맞죠? 달빛을 그리는 여인의 원작 같은.”

“맞아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제가 그쪽 판에서 꽤 잘나가는 작가거든요.”

“그, 그렇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이석찬이 거들었다.

“이 자식 진짜 잘 씀. 나도 얘 때문에 소설 보기 시작했다니까? 얘가 작정하면 드라마 작가도 가능할 걸. 필명이 서환이니까 나중에 함 보셈.”

“그, 그래.”

배성근은 어색하게 대답하면서도 내심 필명을 속으로 되새겼다. 저렇듯 자신하는 이석찬의 말은 흘려듣기보다 기억해두는 게 좋은 경우가 많았다.

서주환은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른 이유는 제가 할 줄 아는 게 많아서예요.”

“…네?”

“제가 욕심이 좀 많거든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습니다. 글 쓰는 것 외에도 최근에는 격투기랑 그림을 배우고 있고, 조만간에는 춤도 건드려볼 생각이고… 아무튼 그렇다보니 어딘가에 소속되기엔 시간이 부족하네요.”

“…다재다능하시군요. 대단합니다.”

배성근은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제 자랑을 저만큼 뻔뻔하게 늘어놓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저리 많은 관심사 중에 왜 연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인지 안타까웠다.

서주환은 그런 배성근의 속내를 짐작했다. 좀 전의 말이 어지간히 재수 없게 들렸을 터다.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는 픽 웃으며 세 번째 손가락을 들었다.

“마지막은 석찬이 놈 때문입니다.”

“석찬이요?”

배성근이 눈을 빛냈다. 직감적으로 마지막 이유가 제일 중요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서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랑 같이 사업을 하기로 해서 배우 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결국은 셋 다 비슷한 이유네요.”

“사업이요…?”

“예. 몇 달 전부터 농담식으로 얘기하던 건데 갑자기 어젯밤에 정식으로 제의를 하더라고요. 자기랑 사업해야 되니까 소속사 들어가서 시간 뺏기면 안 된다나?”

그 말에 배성근이 놀란 눈으로 이석찬을 돌아봤다. 그에 술을 홀짝이고 있던 이석찬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얘 내 사업 파트너니까 뺏어갈 생각하지 마셈. 공동대표 할 거임.”

“…진심이야? 사업하겠다는 것만도 놀라운데 공동대표라고?”

배성근은 이석찬과 꽤 오래 알고 지냈다. 덕분에 그가 후계경쟁을 포기한 괴짜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듯 귀찮다는 이유로 운성그룹에서도 손을 떼고 주식이나 굴리던 녀석이 이제 와서 사업이라니? 심지어 공동대표를 하겠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석찬은 그의 반응에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사업이라고 해도 취미 같은 거야. 적당히 해도 굴러가도록 판 만들어놓고 놀 거거든.”

“뭘 하려는 건지 물어봐도 돼?”

이석찬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플랫폼 하나 만들려고.”

“플랫폼?”

“웹소설이랑 웹툰 플랫폼. 일단 웹소설로 시작해서 웹툰도 같이 할 거임. 아, 출판사도 겸할 거고. 나중에 커지면 애니메이션 같은 것도 런칭할 수 있겠네.”

“허…….”

배성근은 황당하다는 듯 이석찬을 바라봤다.

‘웹소설 플랫폼? 아니, 웹툰도 포함하고 애니메이션 얘기까지 얘기 했으니까 모바일 컨텐츠 플랫폼이라고 봐야하나?’

뭐가 됐든 간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게 책과는 담 쌓고 지내던 녀석이 아니던가. 그나마 억지로 보던 경제학이나 인문철학 등도 후계경쟁을 포기한 뒤로는 해방됐다면서 드럼통에 넣고 불태워버리던 녀석이었다.

그 뿐인가? 그는 중, 고등학교 시절 이석찬과 친해져보려고 만화책 하나를 추천했다가 ‘너 씹덕이야?’ 라면서 면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주환 씨 때문인가?’

본업이 웹소설 작가라고 했던가. 혹시 서주환을 도와주려고 플랫폼을 설립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 대가도 없이 도와주려고 돈까지 써가며 일을 벌린다? 그건 이석찬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석찬은 그의 기색을 알아채고 낄낄 웃으며 말했다.

“뭘 복잡하게 생각함? 말했잖아, 그냥 취미라고. 돈 많은 재벌집 망나니가 돈지랄 좀 하는 거임.”

“…너 이득 없는 일은 안 하잖아.”

“이득이 왜 없음? 내 덕질 생활이 윤택해진다는 큰 이득이 있는데. 그리고 내가 보기엔 IP사업은 돈이 돼.”

“그거 얼마나 한다고.”

“글쎄. 취미생활 하면서 부수입 올리기엔 괜찮게 보이던데?”

그 능청스러운 태도에 배성근은 고개를 내저었다.

“너 많이 변했구나…….”

“놉. 난 원래 이랬음. 형이 몰랐던 거지.”

“…그렇다고 치자.”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쩔 건가. 그냥 그렇구나 하는 수밖에. 대신 그는 이석찬의 말에서 가능성을 보고 덥석 물었다.

“그 플랫폼. 알아서 굴러가게 둔다고 했지?”

“엉.”

“그럼 주환 씨가 할 일도 별로 없는 거 아니야? 충분히 배우활동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쟤가 싫다잖음. 직접 설득해보던가.”

훽, 하고 돌아가는 고개.

서주환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쓰게 웃었다.

“주환 씨…!”

“안 합니다. 이유는 다 말씀드렸잖아요? 시간 없다고.”

“사업은 알아서 굴러가게…!”

“그거 말고 다른 일도 있다니까요.”

“…….”

“제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모를까 어디 소속돼서 할 생각 없습니다. 계약하고 바로 주연자리 꿰찰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연습생 생활도 해야 할 거고 배역 따내려면 오디션도 봐야 할 텐데 당장 감당이 안 돼요.”

“끄응.”

배성근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간단한 배역 정도야 기획사의 힘으로 꽂아 넣을 수 있었지만 말한다고 대답이 바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어제 안 받으셨죠?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저 배우 안 할 건데요?”

“윽. 그거랑은 별개로 드리는 겁니다.”

“?”

“석찬이랑 친하잖습니까. 저랑도 친하게 지내주시면 좋겠네요.”

그 말에 서주환은 배성근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이 사람도 안목이랑 직감 재능이 있네.’

이석찬의 미친 재능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배성근의 재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이석찬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뭔가 있다고 느낀 게 아닐까 싶었다.

서주환은 명함을 받았다.

“그러죠, 뭐. 아참, 죄송하지만 저는 명함 없습니다.”

“그럼 번호 찍어주세요.”

“어째 사기당하는 기분인데…….”

“기분 탓입니다.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남자가 친해지고 싶다니 사양이다.

서주환은 그리 말할까 하다가 결국 번호를 찍어줬다. 연예계 쪽에 대한 의문이 생기면 정보수집용으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래도 이석찬보다는 이 사람이 더 생생한 경험을 말해줄 수 있을 듯했으니.

그는 짐짓 친근하게 웃으며 배성근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럼 형이라고 부를게요. 일 얘기도 끝났으니까.”

“네? 아, 네. 좋아요.”

“자, 형. 술 받아. 그만 한숨 쉬고,”

“반말하라고는 안 했는데…….”

“에이, 친하게 지내자면서? 자, 자. 그런데 형, 나 궁금한 게 있는데.”

“?”

“그, 연예인들도 뒤에서 연애 같은 거 다 하지? 자, 이거 마시고 썰 좀 풀어봐. 디x패치 같은 거에 안 걸린 것도 많지 않아?”

“…….”

배성근은 어쩐지 서주환과 이석찬이 친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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