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216화 (216/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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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너구리는 울고 이따.......

*

아참, 저 이번 주 금요일에 백신 맞습니다.

무사히 돌아올게요!

*

minkaqua 님, 엘라이니 님, dhe011 님, 러브7 님 원고료쿠폰 감사합니다!

*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D

병든 너구리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눴다.

맛집으로 유명한 곱창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였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서주환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전 필명이 ‘무도(武道)’라고요? 인협(人俠)의 그 무도 작가님?”

“허허. 아시나보군요.”

“그럼요! 인협 말고 다른 작품들도 모두 봤습니다. 정말 재밌게 봤어요.”

“설마 작가님께서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 꽤 오랜 전 만화인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한국 무협 만화의 거장 아니십니까! 인협은 물론이고 살협과 마협도 재밌게 봤습니다. 와, 그 무도 작가님이 제 소설의 웹툰화를 맡아주신다니!”

서주환은 흥분에 차서 무도 작가의 작품들에 대해 늘어놓았다. 중학생 때 그의 작품에 푹 빠져서 얼마나 재밌게 봤던가! 서주환이 무협이란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소설이 아닌 그의 만화를 통해서였다.

‘포트폴리오를 봤을 때 바로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떻게 그 그림체를 못 알아봤는지 모르겠다. 아니지. 생각해보면 그림체가 꽤 바뀐 것도 같았다.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걸까?

무도 작가, 지금은 화객(畫客)으로 필명을 바꾼 강필춘이 허허롭게 웃었다.

“지금은 그저 퇴물이지요. 서환 작가님의 작품을 그릴 수 있게 돼서 제가 더 영광입니다.”

“아니, 작가님! 퇴물이라니요!”

무도 작가가 퇴물이라니? 그는 30년도 전부터 한국 만화계의 무협이란 장르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한 작가다. 어째서 그런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맡게 된 건지는 몰라도 결코 퇴물 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서주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손아랫사람이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게 예의가 아닌 줄은 압니다만… 작가님, 제가 너무 팬입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요.”

그 말에 강필춘은 조금 놀란 얼굴로 서주환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좋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래 된 작품인데 서 작가님처럼 젊은 분이 알아주시니 감회가 새롭군요.”

“하하. 작가님, 말씀 낮춰주세요. 제가 그림이 아닌 글을 쓴다지만 어떻게 보면 까마득한 후배 아니겠습니까?”

서주환의 넉살에 강필춘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깔끔하게 정리된 턱수염을 쓸며 말했다.

“서 작가님의 나이가 분명 스물 셋이었지요?”

“예, 맞습니다. 한참 어린놈이니 말씀 편히 해주세요.”

“허허. 그런 의미로 물어본 건 아닙니다. 말은 아직 존대가 편하군요. 그저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여서 물어봤습니다.”

“…그런가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주환은 잠시 멈칫했다가 씩 웃었다. 10년 전으로 회귀하며 몸과 함께 정신도 어려진 감이 있었는데 어른을 앞에 두니 몸가짐이 옛날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둘 다 난데 뭐.’

불행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매사 조심하며 한껏 예의를 차렸던 서른 살의 서주환도, 회귀 후 한층 가벼워진 성격의 서주환도 모두 자신이었다.

그는 다시 넉살을 떨며 말했다.

“제가 감히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허허. 은퇴했던 게 언제인데… 그런 호칭은 낯간지럽습니다.”

“아이고, 역시 글 쓰는 놈이 대작가 무도 화백(畵伯)님에게 선배는 좀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과장되게 높여 부르니 강필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어, 어허.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일개 만화쟁이한테 화백이라니 누가 들으면 욕합니다.”

“그럼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허허……. 못 당하겠구먼. 편한대로 부르세요.”

“흐흐. 그럼 선배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눈을 찡긋하는 서주환.

옆에 자리한 최미화는 그런 서주환을 다소 생소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얘가 이런 면도 있었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무척 예의바르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쇠파이프 하나만 달랑 들고 살인범을 잡았음에도 운이 좋았다며 겸양의 말을 전했더랬다. 공을 드러내기보단 울고 있는 자신을 먼저 걱정해주었고 말이다.

최미화는 새삼 자신이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두 분 작가님이 보기 좋네요. 호호.”

다시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간다.

그는 강필춘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필명을 바꾸신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궁금한 게 많습니다.”

“허허. 별 이유는 아닙니다. 그저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초심이요?”

강필춘은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빙글 돌렸다. 넘칠 듯 찰랑거리는 술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사실 필명을 바꾼 건 두 번째입니다. 몇 년 전에는 무명이란 필명으로 연재했었지요.”

“무명이요? 그 필명이라면 분명 3년 전에…….”

“설마 아시는 건가요?”

강필춘이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주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소설 못지않게 만화도 좋아해서요. 그 필명으로 연재한 게 남궁창천이었죠?”

“맞습니다. 혹시 끝까지 보셨나요?”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눈꼬리를 긁적였다.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강필춘은 휘휘 돌리던 술을 입에 털어 넣은 후 쓰게 웃었다.

“재미없었지요?”

“…….”

서주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때 무명의 작품은 재미가 없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무도 작가 특유의 선을 많이 쓰는 작화와 역동적인 액션을 두고도 그를 알아보는 팬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알아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내용의 재미 때문에 어설프게 작화나 따라하는 아류작(亞流作)이라고 팬들이 앞장 서 욕을 했었다.

강필춘은 그를 보고 난감하다는 듯 술잔을 채웠다.

“허허.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재미없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강필춘은 손을 내젓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때 당시의 필명은 이름 없는 무명(無名)이 아니라 굳셀 무 자를 써서 무명(武名)이었습니다. 두 작품을 내리 말아먹고 오만했음을 깨달았죠.”

“…….”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필명을 화객으로 바꾼 겁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이지요.”

“…그렇군요. 선배님의 결정이 존경스럽습니다.”

무협 만화계의 거장으로서 쌓은 이름값을 버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강필춘은 노년이다. 듣자하니 현재 나이가 65세라던가. 한데도 여전한 그림 실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강필춘은 민망한 소리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존경이라니 제가 다 부담스럽군요. 그저 늙은이의 아집입니다. 그나마도 근 30년 만에 다시 하려고 하니 한계를 느껴서 뛰어난 글작가에게 의지하려는 것이고요. 서 작가님의 작품 정말이지 재밌게 봤습니다.”

강필춘은 나이 40이 되기 전에 모종의 이유로 펜을 꺾었었다. 그리고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 다시 펜을 잡았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의 그림 솜씨는 여전했다. 퇴색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금세 전성기에 버금가는 실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큼은 되돌릴 수 없었으니.

“새로운 이야기를 떠올리기엔 제가 너무 늙었습니다. 이 판을 떠나있던 지가 오래되어 흐름을 못 쫓아가는 것도 있겠지요. 그나마 새로 바뀐 작업방식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게 고작입니다.”

손에 익은 실력은 여전했지만 늙어버린 뇌는 손을 따라가지 못했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결국 만화가 추구하는 것은 재미. 굳어버린 뇌는 재밌는 이야기를 떠올릴 수 없었다. 세월의 풍파는 그의 육신보다도 정신에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강필춘은 아쉬운 눈으로 술잔을 바라보다가 내려놨다.

“더 마시고 싶지만 참아야겠군요. 늙으면 몸 관리를 열심히 해야 하거든요.”

“아직 정정해 보이시는데요.”

“허허. 그래 보이고 싶어서 술을 끊으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너무 좋은 작가님을 봐서 조금 마신 거지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덕분에 옛 생각도 나고 좋았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편히 말씀하세요, 선배님.”

“사실은 손녀한테 혼날까봐 더 못 마시는 거랍니다. 허허.”

강필춘의 잔 주름진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일까. 마음에 드는 청년을 만나서일까.

괜스레 던진 농에 청년은 눈을 끔뻑이더니 쾌활하게 웃었다.

“괜찮으시면 나중에 인사 한 번 드리러 가겠습니다. 손녀 분이 계시다니 선물도 사가야겠네요.”

“허허.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오면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손녀가 알면 좋아하겠군요.”

“손녀 분이 절 아시나요?”

“아무렴요. 제게 서 작가님의 작품을 알려준 사람도 제 손녀인 걸요. 작가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하하. 손녀 분께 재밌게 봐줘서 고맙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저…….”

말끝을 흐린 서주환은 품에서 주섬주섬 펜을 꺼냈다.

“싸인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까 말했다시피 제가 작가님의 팬이라서요. 하하.”

“물론 해드려야죠. 워낙 오랜만이라 어색하지만… 허허.”

서주환은 식당 직원에게 말해 종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싸인을 하려는 강필춘에게 말했다.

“선배님, 필명은 화객으로 부탁드립니다.”

강필춘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괜찮겠습니까?”

서주환은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었다.

“무도의 싸인은 많지만 화객의 싸인은 제가 처음이지 않습니까? 저는 화객도 무도 못지않게 대단해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대작가 화객의 첫 번째 싸인은 제가 받아가겠습니다.”

“…….”

강필춘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가라앉는다. 꾹 다문 입매를 따라 허연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싸인을 하며 말한다.

“젊은이가 늙은이에게 부담을 주는군요.”

“아, 절대 그런 의도는…….”

“덕분에 의욕이 샘솟네요.”

고개를 든 강필춘이 우묵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종이를 건넸다.

“여기, 화객의 첫 번째 싸인입니다. 그리고 서 작가님의 싸인도 두 장 부탁합니다.”

“제 싸인을요? 저는 싸인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럼 저도 1호 싸인이군요. 하나는 제 것이고 하나는 손녀에게 줄 겁니다.”

“…하하, 이것 참. 알겠습니다.”

서주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던 최미화가 은근히 끼어들며 말한다.

“저기, 저도 싸인 좀…….”

*

강필춘이 돌아갔다.

서주환과 함께 그를 배웅한 최미화가 옆구리를 콕 찌르며 말한다.

“싸인 내가 먼저 받았어야 했는데.”

“흐. 그러게 진작 안 받고 뭐했어?”

“맨날 글 읽느라 깜빡했단 말이야! 아악! 억울해!”

그녀는 머리카락을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이내 안경이 흐트러진 채로 그를 보며 말했다.

“싸인은 뺏겼어도 팬은 내가 첫 번째인 거 알지? 내가 첫 팬이고, 첫 번재 편집자야!”

“아, 알았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무섭게.”

“씨이. 억울해서 그런다, 왜!”

어떻게 여태 싸인 하나를 안 받았는지. 억울하고 억울해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녀는 한참 씩씩거리다가 흐트러진 옷매무세를 정리했다. 안경까지 마저 고쳐 쓴 후에야 어색하게 웃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싸인도 못 받았는데 다른 거라고 받아야겠어.”

“다른 거? 뭘? 참고로 비축분은 이미 너한테 다 넘겨줬다?”

“그거 말고. 다른 거 있잖아.”

“그게 뭐냐니까?”

“그, 그걸 말로 해야만 아냐?”

그리 말한 최미화는 은근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살살 긁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응?”

“아아. 흐, 많이 그리웠어?”

짓궂게 웃으며 물으니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밤에도 생각나더라. 장난감으로는 안 돼.”

“어우. 빠꾸없는 거 봐라.”

“치. 톡이랑 전화로는 더 한 얘기도 하면서.”

“흐흐. 그렇긴 하지.”

최미화의 페티시는 음란물 중독 Pictophilia(픽토필리아)와 음담패설이라 할 수 있는 Narratophilia(넬레토필리아)다. 덕분에 둘은 수위 높은 섹드립을 거침없이 날리곤 했었다.

서주환은 씩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갈… 아.”

“응? 왜?”

“…미안.”

“어?”

서주환은 눈꼬리를 긁적이다가 두 손을 모으고 사과했다.

“오늘 빨리 가봐야 돼.”

“…정말? 그냥 갈 거야?”

“진짜 미안해. 나중에 먼저 연락할게.”

최미화는 불만어린 얼굴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집을 나올 때부터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기대했는데 빨리 들어가야 한다니.

하지만 슬쩍 고개까지 숙여 보이는 그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쉬운 쪽은 그녀였으므로.

최미화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물어봤다.

“왜 빨리 가야 되는데? 무슨 약속 있어?”

“약속이 있는 건 아니고.”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너구리가 좀 걱정돼서.”

“…너구리?”

최미화는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요즘은 너구리도 애완동물로 키우나?

*

집으로 돌아온 강필춘에게 한 소녀가 뛰어와 안겼다.

“할아부지!”

“어이쿠. 우리 강아지, 잘 있었어?”

“내가 앤 줄 알아? 당연히 잘 있었지!”

“허허. 그렇지, 우리 강아지가 이제 애는 아니지. 이렇게나 무거워졌는 걸?”

“아이! 할아부지! 나 살쪘다고 놀리는 거지?”

“으응? 이 할애비는 우리 나루 키가 많이 컸다고 말한 건데?”

“치이. 거짓말.”

강나루는 볼을 부풀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좋게 봐도 통통을 넘어선 뚱뚱이다.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살 빼야 되는데… 힝.”

“허허. 잘 먹고 건강하게 크는 게 최고란다. 할애비가 나루 좋아하는 치킨 사왔는데 안 먹으려고?”

“치, 치킨?”

강나루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하지만 이내 급히 고개를 젓는다. 지금 중요한 건 치킨이 아니었다.

“치킨은 나중에 먹을래. 그보다 할아부지 서환 작가님 만나고 온 거지? 어땠어? 같이 작업 할 거지?”

강나루는 ‘빙의사부 무림공적’의 엄청난 팬이었다. 보노보농이란 닉네임으로 팬아트를 꾸준히 선물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강필춘은 오늘 만난 청년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연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스물 셋의 어린 나이로 벌써부터 성공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 열정 가득한 눈빛. 그럼에도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넉살까지 좋았던 청년.

절로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강나루는 할아버지의 미소를 보고 킥킥 웃었다.

“마음에 들었구나?”

“그래. 참 건실한 청년이었지. 아, 여기 싸인도 받아왔단다.”

“싸인?! 호, 혹시 그럼 내가 첫 번째 싸인인 건가?”

그 말에 강필춘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첫 번째는 이 할애비가 가져갔단다.”

“에엑! 그런 게 어디 있어! 저 주면 안 돼요?”

“어허험. 두 번째로 만족하려무나.”

“할아부지 너무해!”

강필춘은 허허 웃으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18년간 애지중지 키운 손녀라도 이 싸인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냥 싸인이 아니라 의미가 담긴 물건이었으니.

‘으음. 참 건실한 청년이었어.’

잠깐이지만 손녀딸의 배필로 삼고 싶었을 정도였다.

*

서주환은 먹거리를 사들고 유지경의 집을 찾았다. 지금쯤 자고 있으려나 싶기도 했지만 잠깐 얼굴이라도 볼 셈이었다.

‘잘 먹고 다니긴 하려나.’

방학 중에 다시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던데 설마 안 챙겨먹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르바이트를 그렇게 하면서 부실하게 먹으면 몸이 버티질 못할 텐데.

그는 노크를 하는 대신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에 들어갔다.

“너굴아, 주인님 왔다~!”

인사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불이 모두 꺼져있는 게 아무래도 자고 있는 모양.

서주환은 쩝 입맛을 다시며 먹거리를 상에 내려놨다. 자고 있는 모양이니 얼굴만 잠깐 보고 가야할 듯했다.

“응? 방에는 불이 켜져 있네?”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아직 깨어 있는 걸까?

그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굴… 지경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유지경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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