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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페티시가 보여-197화 (197/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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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한 편 쓰는 데 역대급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네요.

몇 번을 지웠다가 다시 쓴 건지...

이게 현재 제 최선입니다아!

제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글쟁이가 되게 해주세요, 하연이네 어머님...!

대신 딸내미 소원 이뤄드렸습니다.

(대충 원숭이 손이 소원 들어주는 짤)

*

엘라이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루아v 님, 아래스 님, Kasu 님, 엘라이니 님, 실라렌 님 원고료쿠폰 감사합니다!

*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D

덧칠하는 기억

서주환은 문득 느껴지는 눈부심에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덧 먹구름이 걷히고 맑게 갠 하늘이 보였다. 곧 구름 사이로 나온 따스한 햇빛이 공동묘지 곳곳에 내려앉았다. 정선애의 묘비도 햇빛에 밝게 비춰졌다.

서주환은 돌연 씩 웃으며 개수작을 부렸다.

“어머님도 허락해주신 것 같은데?”

정하연이 곧장 소리쳤다.

“뭐래, 이 미친놈아!”

“날씨 봐. 먹구름 다 걷혔다. 이게 축복이지.”

“아니,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황당하다는 듯 말하는 정하연이었으나 실실 웃으며 바라보자 그녀도 곧 웃음을 흘렸다. 물론 어이가 없어 나오는 헛웃음이었지만, 아무튼 웃었다는 게 중요했다.

“어머님한테 드릴 말씀 더 있어?”

“…있었는데 너 때문에 까먹었어.”

“그럼 내려갈까?”

“하아. 그래. 여기 더 있으면 우리 엄마 무덤에서 뛰쳐나오겠다.”

너 죽이려고,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사납게 노려보는 눈빛에 서주환도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불륜 때문에 외롭게 사셨던 어머니 앞에서 딸을 그와 비슷하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한 형태로 옆에 두겠다고 선언했으니 저승에서도 통곡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진정 우스운 건 정하연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서주환에게 미친놈이니 또라이니 하며 욕을 해댔지만, 결국은 입만 툴툴 거릴 뿐 부정의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물론 긍정의 말도 없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여전히 깍지 낀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이미 정신 차리기는 글렀음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손깍지를 낀 채 내려가던 중이었다. 정하연이 다급히 맞잡은 손을 풀더니 놀란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아버지…?”

정하연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적잖게 당황한 듯 눈가를 떨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낯설지 않은 얼굴.

서주환은 곧 자신이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장례식장에서 봤던… 역시 하연이네 아버지였구나.’

정확히는 ‘교접몽’을 통해 들어갔던 정하연의 꿈속에서 봤었다. 꿈에서보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긴 했지만 동일인이 확실했다.

“오랜… 만이구나.”

“…안녕하세요.”

부녀는 더할 수 없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직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답답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서주환이었다. 그래도 친구 아버지인데 사정이 어떻든 간에 인사는 드리는 게 예의라는 생각에서였다. 좀 더 솔직한 마음으로는 빨리 인사하고 자리를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하연이 친구 서주환입…”

“내가 왜 자네 아버님인가.”

“…네?”

남자, 이주철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서주환을 노려봤다.

그는 서주환을 알고 있었다. 물론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아들인 이석찬에게서 정하연의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은 뒤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봤다.

‘실제로 보니 더 뺀질거리게 생겼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제비 같은 얼굴로 딸을 꾀었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마음부터 올라왔다.

실상 서주환의 외모는 제비라기보다는 사내답게 강직한 생김새였다. 성격은 몰라도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랬다. 하지만 이주철에게는 그가 딸의 남자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달리 보였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부르지 말게.”

단호한 즉답에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눈꼬리를 긁적였다. 어째서인지 첫 만남에 바로 밉보인 듯했다. 혹시 손잡고 있는 걸 봤나?

그가 가만히 있자 침묵하고 있던 정하연이 앞으로 나섰다.

“인사하는 사람한테 뭐하시는 거예요?”

딸의 눈초리에 이주철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게 아니라, 괜히 나랑 이야기하면 불편할 것 같아서 그런 거란다.”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더 불편하죠.”

정한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훨씬 싸늘한 느낌을 주었다.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이주철이 당황한 얼굴로 서주환을 돌아봤다.

“그, 불편했나?”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다.

서주환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버님.”

“…아무래도 아버님이란 호칭은 불편하군.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어.”

“하하…….”

어색한 웃음을 끝으로 다시 말이 끊어졌다. 슬슬 각자 갈 길 가면 안 되나,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정하연이 힐끗 이주철의 손을 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선애를 보려고.”

“하. 이제 와서요?”

정하연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이 쳤다.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8년 만에 왔단 말인가.

그녀는 시간이 지나며 아버지의 사정을 헤아렸지만, 그건 이성의 영역이었을 뿐, 감정의 납득은 아니었다.

그녀는 비죽, 고소를 머금고 이주철의 손을 가리켰다.

“하필 사와도 엄마가 싫어하는 꽃으로 사오셨네요.”

“…….”

“무슨 생각으로 아카시아를 사온 거예요?”

아카시아의 꽃말은 숨겨진 사랑이라.

그런 꽃을 무덤에 바치는 것은, 죽기 전까지 숨겨줘서 고맙다는 뜻인가? 아니면, 왜 끝까지 숨기지 않았냐는 비난인가.

정하연은 그런 의미가 아니리라 생각하면서도, 이제 와 태도를 바꾸려는 아버지가 야속해서 빈정거리고 말았다.

“아카시아의 꽃말은 알고 사온 건가요?”

“…우아(優雅).”

“네?”

이주철은 어딘가 그리운 눈으로 꽃을 내려다보았다.

“우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상하고 기품 있는 아름다움. 선애가 자기한테 부족한 거라면서 좋아하던 꽃이지.”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이상한 의미로 사온 게 아니야. 아무렴 사랑하는 여자가 좋아했던 꽃의 뜻을 모를까.”

씁쓸히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서 죽은 여인을 향한 애정이 엿보였다.

정하연은 벌겋게 물든 얼굴로 아버지를 노려봤다. 그녀는 어머니가 아카시아를 좋아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눈에 띄기만 하면 재수 없다 말하곤 하여 싫어하는 꽃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이주철은 정하연의 표정을 살피고 덧붙였다.

“선애가 아카시아를 싫어한다 말한 건 나 때문인 것 같구나. 다른 꽃을 생각해봐야겠어.”

“…여기는 언제부터 오셨어요?”

“처음부터. 하연이 네가 날 보기 싫어할 것 같아서 일부러 좀 늦게 왔었단다.”

“…….”

정하연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이주철을 따라 집에 들어갔다. 거기서 새어머니를 만나고, 이석찬을 비롯한 배다른 형제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집은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가 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그녀의 잘못이 아닌 죄책감 때문에 필요한 일 외에는 숨죽여 지냈다. 당연히 아버지와도 형식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둘이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구나. 하연아, 너만 괜찮다면…….”

그래서 알지 못했다.

이주철은 정하연에게 있어 어머니를 버린 사람,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사람일 뿐이었다. 자신을 집에 들인 것 또한 스스로의 마음이 편하고자,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마음이 편하고자 멋대로 생각하고 재단한 것은 그녀였다. 이주철은 그녀의 어머니, 정선애를 사랑했노라 말했다. 기일 또한 처음부터 빠짐없이 챙겼다 말하고 있었으니.

정하연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물기 어린 눈으로 이주철을 노려봤다.

“거짓말.”

“…….”

“그럼, 그럼 왜 엄마 장례식에는 안 왔어요?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안 왔잖아요!”

“그건…….”

이주철은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당시의 그는 지난날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과 있는지도 몰랐던 딸, 그리고 이미 이루고 있던 가정을 생각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유부단했다.

그런 우유부단함은 정하연은 물론 이미 현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상처가 되고 말았으니. 그 어떤 말을 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저 갈게요.”

정하연은 나직이 말하고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에 손을 뻗었으나 이주철은 차마 딸을 붙잡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아니, 아저씨라고 불러야 되나요?”

“…….”

“다시 인사드릴게요. 하연이 친구 서주환입니다.”

“…들어서 알고 있네.”

“석찬이에게 말이죠?”

이주철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좀 전의 대화만 듣고 유추한 것은 아닐 터. 정하연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들었단 말인가?

멍하니 있는 그에게 딸의 친구가 말한다.

“하연이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저래도 애가 워낙 착해빠졌잖습니까. 좀 지나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다행?”

“아저씨가 자기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거 말이에요.”

“…….”

서주환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참고로 하연이는 튤립 좋아한다더라고요. 그럼.”

작게 인사하고 몸을 돌리는 서주환.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주철이 말한다.

“이름이 서주환이라고 했나?”

“예? 아, 맞습니다.”

“하연이랑 사귄다고 들었는데…….”

“…….”

서주환은 눈꼬리만 긁적였다. 아무래도 석찬이 놈이 알려준 모양인데, 이후 헤어졌다는 말은 안 한 듯했다. 이걸 무어라 답해야 하나.

그가 고민하는 사이 이주철이 다시 질문했다.

“하연이… 많이 좋아하나?”

아, 차라리 이런 질문이라면 다행이지.

서주환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아합니다.”

거짓말은 안 했다.

*

입구까지 내려와도 정하연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전화를 걸어보니 차 앞이라고 한다. 키가 없어서 못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아저씨는 자기가 좋아하냐고 물어봐놓고.’

대답하니까 곧장 ‘그래도 내 딸은 안 돼!’를 외치시더라. 그러면서도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거 보면 그도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쪼그려 앉아 있는 정하연을 발견했다. 한숨을 쉬고 다가가서 축 처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연아, 타.”

“응…….”

“기분전환하게 드라이브나 좀 하자.”

“…초보운전자가?”

“어쭈. 딴지 걸 힘은 남아있네? 나 아까 운전하는 거 못 봤어?”

“바보.”

“갑자기 왜 바보래?”

“멍청이! 개새끼!”

“야, 나 상처 받는다?”

그리 말하자, 정하연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녀는 이내 눈가를 씰룩이더니 말했다.

“상처는 내가 받아야하는 거 아냐? 사귀지도, 결혼하지도 않을 거면서 옆에 두고 따먹겠다고 했잖아?”

서주환은 입을 쩍 벌렸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미, 미친.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뭐가 다른데.”

“…….”

그럼 또 제가 할 말이 없지요.

서주환은 냉큼 정하연을 끌어안고 말했다.

“사랑해.”

“야 이, 쓰레기 새끼야!”

“응, 사랑한다고.”

“…개새끼. 진짜 개쓰레기 새끼…….”

정하연은 욕설을 끊임없이 웅얼거리며,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고 서주환은 참 오랜만에 안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생각했다.

‘오늘도 착실히 쓰레기에 한 걸음 다가섰구나.’

아직 재활용은 될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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