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194화 (19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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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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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님들 모두 즐거운 연휴 되시기를 :D

덧칠하는 기억

우르릉!

화창했던 전날과 달리 아침부터 번개가 하늘을 수놓았다. 그럼에도 먹구름만 잔뜩 끼고 비 한 방울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소리가 무척 잘 어울렸다.

먹구름은 어두컴컴한 하늘 외에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학생들 대부분의 얼굴에 거뭇한 다크써클과 함께 짙은 피로감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특히 새벽시간까지 여자 방에서 술을 마시며 놀았던 남자들의 눈가가 퀭했다.

“주환이 넌 어떻게 멀쩡한 거야?”

책상에 엎어진 배준호가 거뭇한 눈자위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취중에 고백을 성공한 그는 축하주라면서 따라주는 술을 넙죽넙죽 다 받아 마셨었다.

“이 새끼 원래 말술임…….”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이석찬의 신색은 더 특이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눈 밑이 거무스름한 것은 물론 뺨 한 쪽이 묘하게 부어있는 느낌이었다. 듣자하니 항공과 박은지와 떡을 친 후 고백을 거절한 탓에 맞은 거라나.

서주환은 남자들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난 방에 늦게 들어갔잖아.”

어젯밤 그는 주경은과 관계를 가진 후 뒤늦게 방으로 올라갔다.

떡은 떡이고 노는 건 노는 것.

루시도 최대한 인생을 즐기고 많은 경험을 쌓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경험 하나하나가 시스템의 레벨을 올리는 경험치고, 특히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 오가는 욕망 에너지는 성장 촉진제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뭔 상관임. 들어오자마자 지각했다고 존나 맥였는데.”

“맞아. 분명 주환이 네가 나보다 두 배는 더 마셨을 걸? 너 진짜 술 세다.”

서주환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술이 센 것도 있지만 이렇듯 멀쩡한 이유는 아이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전 강의가 끝나면 곧장 운전을 해야 하는데 속이 뒤집어진 채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이템에 여유분이 있으면 좋으련만 얼마 남지 않아서 나눠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반면 여자들의 신색은 제법 멀쩡했다. 은근슬쩍 흑기사를 자처하는 남자들에게 술을 대신 준 여우들이 저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흑기사는 어물쩍 넘어가는 분위기에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유별만큼은 어젯밤 정식으로 임명한 자신의 기사를 토닥였다.

“자기야, 속 많이 안 좋아? 나 때문에 어떡해…….”

“하하. 괜찮아, 별아. 이 정도야 뭐.”

남자친구를 걱정하는 유별과 여자친구 앞에서 괜히 강한 척하는 배준호.

“쯧.”

“옘병.”

“시발, 솔로 서러워서 살겠냐.”

“커플 죽어…….”

막 탄생한 닭살 커플의 행각에 주변에서 혀 차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하지만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소꿉친구 커플은 주변이 눈에 들어오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은혜를 모르는 건 아닌지 서주환만큼은 의식 하는 둘이다.

배준호의 등을 토닥이던 유별이 문득 마주친 서주환에게 헤헤 웃으며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제 배준호의 관상을 볼 때는 불 같이 화를 내더니만 사귀게 된 이후로는 그와 눈만 마주치면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따로 사과까지 한 시점에서 그럴 필요도 없었건만.

서주환은 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남자친구랑 닭살이나 마저 떨라는 뜻이다. 이제 막 사귀었으니 한창 좋을 때였다. 둘을 보고 있으니까 정하연과 사귀었을 때가 생각날 정도다.

그때 돌연, 창밖이 번쩍였다.

잠시 후 우르르릉! 거친 뇌성벽력이 귓가를 때렸다.

“꺄아아악!”

“엄마야!”

“으악!”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학생들의 비명이 터졌다.

“별아 괜찮아?”

“응! 난 오빠 있으니까 괜찮지!”

이 와중에도 풋내기 커플은 지치지도 않고 꼭 붙어서 닭살을 떨었다.

한편 서주환은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번쩍임과 굉음 이후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가 싶더니 폭우가 되어 쏟아졌기 때문이다.

“야, 쭈환. 까톡이라도 하나 보내봐. 나보단 네가 나을 거임.”

이석찬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하게 메시지를 작성해서 보냈다.

“왜 하필 오늘 비가 오는 거냐고!”

“야, 그나마 어제 안 와서 다행이지.”

“으아아.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더 쳐지네.”

학생들의 소란이 가라앉은 것은 주경은이 들어오고 난 후였다.

“자자, 모두 조용히 해요~!”

어제와 같은 검정색 마이와 셔츠,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스커트를 입은 차림새. 하지만 얼굴빛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더욱 활기가 넘치는 게 몇 년은 젊어보였다.

그녀를 본 학생들이 저마다 옆자리의 친구들과 수군댔다.

“강사님이 원래 저렇게 예뻤나?”

“원래도 엄청 예쁘시긴 했지. 그런데 오늘은 더 예뻐 보인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본데?”

“우리보다 서너 살 많은 선배라고 해도 믿겠다.”

학생들의 생각은 그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성스러운 씨주머니’의 버프 효과를 받아 일시적으로 체력과 매력이 상승된 상태였다.

주경은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학생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내 생글 웃은 그녀가 스크린에 화면을 띄우며 말했다.

“자, 오늘이 마지막 강의에요. 오전만 넘기면 끝이니까 모두 힘내 봐요!”

“느에에~.”

학생들의 힘 빠진 대답이 맥아리 없이 강당을 울렸다.

*

우중충하게 먹구름 낀 날씨.

쏟아지는 폭우와 하늘을 수놓는 빛줄기.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찾아 온 아버지.

지나치게 조용한 장례식장.

그리고 검은 옷의 어린 상주.

15살, 어린 정하연의 옆자리에는 아버지가 아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장 씨 아줌마가 보호자로 있었음에…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돌아가신 엄마가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라면서!’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찾아왔다. 딸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걸까. 정하연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아버지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아저씨, 우리 엄마 장례식 해주세요.’

‘…….’

‘그러면 아빠라고 부를게요.’

바람대로 어머니의 장례는 치러졌다. 그러나 아버지란 사람은 장소를 제공하고 구색을 갖추어줬을 뿐 끝까지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당시의 아버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일 터였다. 이미 가정이 있음에 자신을 집에 들인 것만으로도 무리를 한 것이겠지. 굴지의 대기업 사장이니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5살의 어린 정하연은, 피붙이를 떠나보낸 어린아이는 그런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했다. 그녀는 아버지라며 나타난 사람이 가증스러웠고, 끝내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엄마…….’

그렇게, 생전 자신만 보며 외로이 살던 어머니께서는, 끝내 가신 이후에도 적막하게 장례를 마치었다.

“아.”

8년이란 시간은 길다고 하면 길지만, 트라우마가 희석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다시 8년이 지나도 여전할 테니 시간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툭, 투둑, 쏴아아아-

폭우가 쏟아진다. 창문에 부딪친 빗방울이 요란하게 튕기며 타닥거리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느지막한 오전, 정하연은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창밖으로 채찍처럼 빗발치는 빗줄기에 연이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왜 하필 오늘…….”

짜증스럽게 뇌까려 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요 며칠간 간헐적으로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비 때문이다. 아무리 장마가 시작됐다지만 올해는 유독 지랄맞은 날씨였다.

“하아…….”

정하연은 침대를 내려와 움직였다.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욕실에 들어가 꼼꼼하게 몸을 닦아낸다. 종종 멍한 기색으로 반복하는 동작이 많아져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밖으로 나와 시간을 확인한 정하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비가 내리는 마당에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사실 특별히 정해진 시간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늦장부리기를 싫어하는 성격상 계획했던 일정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싫었다. 이미 악몽 때문에 늦잠을 잔 것마저도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음에, 날씨는 먹구름 끼고 컨디션까지 나빠서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은 휴대폰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이미 두 시간도 전에 온 까톡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했다.

- 서주환: 비 온다고 괜히 울적해하지 말고 소설이라도 보고 있어. 어제 세 편 올렸다.

- 서주환: 오전 강의 끝나면 금방 돌아갈 것 같아. 이따 점심이나 같이 먹자.

- 서주환: 아, 강의 시작했다. 다시 연락할게.

“…밥 이미 먹었는데.”

괜히 먹었나? 어차피 늦은 거 점심 정도는 같이 먹고 갈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작게 웃으며 메시지를 곱씹었다.

“그래도 친구밖에 없네.”

간단한 문자 한 통으로 가슴 한 편이 따스해졌다.

정확한 날짜를 말한 적은 없으니 오늘이 어머니의 기일임을 아는 것은 아닐 터다. 다만 비 오는 날씨가 싫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곧 기일이라고 생각하여 더 신경 써주는 것일지도.

정하연은 조금은 나아진 기분으로 옷을 챙겨 입었다. 역시 연인보다는 친구라고, 이렇듯 깊은 속내까지 주고받을 수 있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이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인연으로 남아 훗날에도 여전하게 웃는 얼굴로 볼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바랐다.

‘밥은 저녁에 먹자고 해야겠다.’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괜히 지금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아무리 특별한 친구라지만 어머니의 무덤에 같이 가자고 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차라리 다녀와서 함께 식사를 하면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빠트린 게 없나 소지품을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철컥, 하고 문이 열렸다.

“아오. 비 엄청 오네.”

남자 한 명이 젖은 머리를 털면서 들어왔다.

키가 크고, 다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강직해 보이는 생김새의 남자.

그녀가 잘 아는 남자였다.

“…서주환?”

“응? 야, 같이 밥 먹자니까 벌써 가려고? 맛있는 거 사왔는데. 어우, 좀만 늦었으면 허탕 칠 뻔했네.”

씩 웃으며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는 행동이 능청스러웠다. 그 여상한 태도에 정하연은 당황스런 마음으로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아니, 너 왜 벌써 왔어? 캠프는?”

메시지를 보낸 게 두 시간도 전이라지만 벌써 도착하는 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아무리 자차를 가져갔더라도 그랬다. 분명 막 강의가 시작됐다고 하였는데.

서주환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쨌어.”

“뭐?”

“쨌다고. 아프다고 엄살 좀 피웠지.”

“…그래도 돼?”

“흐흐. 강사님이랑 친해져서 괜찮아. 수료증 몰래 받아왔다. 아, 석찬이 놈은 거기 떨구고 왔다.”

쌤통이라는 듯 낄낄거리는 서주환.

“밥 벌써 먹었어? 그럼 나 먹는 거 구경하던가. 배고프다.”

그를 본 정하연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밥은 저녁에 먹자. 나 가야할 데가 있…”

“같이 가.”

“어?”

“어머니 뵈러 같이 가자고.”

정하연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뜨였다.

“어떻게 알았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해준 적은 있다. 그러나 여름이라고만 했을 뿐 정확한 날짜는 말하지 않았었다. 한데 어떻게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어느새 자기 집처럼 상을 펴고 방바닥에 걸터앉은 서주환이 말했다.

“일단 밥이나 먹자. 딱 보니까 부실하게 먹었구만.”

그 말에 정하연은 어쩐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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