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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분량 낭낭하게 가져왔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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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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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어수선한 마음과 마음
서주환은 새벽녘 다시 찾아온 유지경과 밤새도록 몸을 섞고 다시 한번 주종관계를 확립시켰다.
‘얘가 아직도 포기를 안 했었네.’
이번엔 자기가 주인 역할을 할 거라는 말에 기겁을 했다. 또다시 속박당하고 자유를 뺏기는 건 사절이었다. 그에게 마조히스트 역할이란 너무나도 힘든 과제였으니.
사실, 서주환이 마조히스트 역할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지경의 외모가 사디스트에 어울리지 않는 사실이 지대했다. 고작 157cm의 작달만한 여자애가 무슨 주인님이란 말인가. 정하연처럼 날카로운 인상이면 모르겠다. 그러나 유지경은 눈매도 순한 편이고 얼굴도 귀염상에 가까웠다. 뭐, 눈물점 때문인지 몰라도 예상외로 섹시해 보일 때가 있었지만…….
‘너구리가 무슨 주인님이야.’
정하연과 헤어지고 몸살을 앓았을 때였던가. 꿈에서 나온 가지각색의 동물들. 그 중 너구리는 어쩐지 유지경과 꼭 닮아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꼬리 좀 만져보겠다고 손을 허우적대다가 간신히 꼬리를 잡았을 때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까 지경이 가슴을 만지고 있었지.’
그때부터 서주환의 안에서 유지경은 한 마리 귀여운 너구리가 되었다.
서주환은 옆에서 웅얼웅얼 잠꼬대를 하고 있는 유지경을 바라봤다.
“…구리… 아니거든. 노예새끼…….”
“큭큭. 아니기는.”
귀랑 꼬리만 달아주면 딱이겠구만.
서주환은 잠든 유지경의 엉덩이를 토닥이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에 불만스럽게 꿍얼대던 그녀의 얼굴이 편안해진다. 이어서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은, 영락없이 주인님의 손길을 기뻐하는 애완 너구리였다.
서주환은 ‘성스러운 손길’을 활성화시켜서 유지경의 팔다리를 가볍게 주물러주었다. 간밤에 많이 피곤했는지 몸을 주물러도 세상모르고 잠을 잔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어느새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이 귀엽게만 보였다.
그는 괜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지경아.”
“우으응?”
“깼어?”
“…….”
단순한 잠꼬대인가. 서주환은 그녀의 볼을 잡고 늘렸다가 이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는 거 맞지?”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서주환의 눈에는 따스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고 있음을 확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경아, 고마워. 나랑 친구해줘서.”
그리 말하는 서주환은 유지경을 또 다른 유지경과 겹쳐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회귀 전의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때도 네가 연초를 달라고 했었지.”
서주환은 그날을 떠올렸다.
회귀 전, 여느 때처럼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옥상. 난데없이 연초를 달라며 다가왔던 23살의 유지경을 기억한다.
“너는 나한테 고맙다고 했었지만, 정말로 고마운 건 나였어.”
23살의 유지경은 안 좋은 소문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서주환은 그녀를 둘러싼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 못지않게 그를 둘러싸고 있던 소문도 좋지 않았기에.
결국, 편견을 갖지 않고 대한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으니, 유지경이 그에게 일방적으로 고마워할 이유가 없었다.
“네가 몇 번이고 다가와준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당시의 그는, 유지경을 신경 쓰면서도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괜히 자신까지 엮이면 그녀가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은근하게 그어놓은 선을 단번에 뛰어넘어 들어왔다. 누군가에게는 불쾌한 일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당혹스러우면서도 밉지 않았다. 오히려 막무가내로 다가온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외로움에 시들어가고 있던 시기였기에, 그녀가 주는 온기에 무심코 빠져들었다.
“네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
그는 불운에 지쳐있었다. 주변에 대화를 나눌 사람 하나 없는 현실에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런 메마른 삶에서 만난 오아시스가 바로 그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네가 나를 좋아했던 것도 같고? 큭큭. 아니면 미안하다.”
회귀 전의 그는 유지경을 여자로 보지 않았다. 아니, 여자로 볼 수 없었다. 그저 사람에 굶주려 있었기에, 감히 그녀를 이성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다만 정에 굶주려 있던 그에게 사람의 관심이란 너무나 청량한 것이어서, 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유지경을 밀어내지 못하고 점점 물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끝은 다가오는 법이었으니.
‘불행’이란 단어에 매몰되어 있던 그는 다시 유지경을 밀어냈다. 그녀의 일이 풀리지 않는 게 자기 때문인 것만 같아서 지레 겁을 먹고 말았다.
“그거 알아? 나 죽을 때까지 네 번호 안 지웠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매몰차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번호를 지울 테니 연락해도 소용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번호를 지우지 않았다.
‘힘들 때 네 전화번호를 보고 버텼거든. 나한테도 친구 하나는 있다면서.’
너도 나를 친구로 여겼을까.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하하. 알면 좀 소름 돋으려나?”
서주환은 지난날을 떠올리며 낮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한번 잠든 그녀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밀어내지 않을게. 내가 너 많이 좋아한다.”
*
잠들어 있던 유지경은 머리맡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의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속삭이듯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깊게 잠들어 있던 그녀를 조금씩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네가… 다가와준… 기뻤는지…….”
무어라 말하고 있는 걸까. 잘 들리지 않는다. 또렷한 발음이었음에도 뭉개져서 들려왔다. 귓가가 어지럽다.
“…버틸 수 있었어.”
버틸 수 있었어? 뭐를? 힘든 일이라도 있는 걸까. 잠결에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과거형임에 조금 안심한다. 그렇게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네가 나를 좋아했던 것도 같고? …미안하다.”
좀 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들려오는 음성.
깊게 침잠하려던 의식이 반사적으로 끌려올라간다.
“…아? 나 죽을 때까지 네…….”
죽을 때까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한 번만 더 말해줘. 짙은 피로감이 의식을 짓눌렀다. 이건 꿈결에 들리는 음성일까, 아니면 지금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하하. 알면 좀 소름 돋으려나?”
드디어 목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물먹은 솜뭉치처럼 몸이 무거웠다. 다만 유지경은 목소리에 더욱 집중했다.
‘꿈이겠지? 그럼 좋아한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그녀는 내심 사심을 잔뜩 담아 바라면서 다음에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쪽, 하고 입술에 부드러운 뭔가가 맞닿았다. 목소리가 다시 이어진 것은 감촉이 사라진 뒤였다.
“…밀어내지 않을게. 내가 너 많이 좋아한다.”
순간, 유지경은 정신을 완전히 차렸다.
‘조, 좋아한다고? 잘못 들었… 아니,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서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조금 전 입가에서 느껴졌던 감촉이 그의 입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에 키스 이후 들려왔던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오빠도 날 좋아하고 있었어?’
유지경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급작스레 높아진 심박수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저, 정신 차리자.’
지금은 설레서 굳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놓친단 말인가. 그녀는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 했다.
‘오빠 나…’
그러나 유지경의 생각은 말로써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지경아.”
그보다 먼저, 서주환의 목소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열었던 입을 굳게 다물고, 눈도 다시 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말했다.
“넌 나 좋아하면 안 된다.”
…이게 무슨 소리지?
유지경은 순간 자신이 잘못들은 줄 알았다. 아무려면 조금 전 좋아한다 말해놓고 자신에게는 좋아하지 말라니. 너무 이상한 말이지 않은가.
서주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내가 있지… 개쩌는 시스템을 얻었는데… 아니, 시발… 다 변명이고, 그냥 내가 존나 쓰레기 새끼지. 그런데 어떡하냐. 나도 내가 이렇게 욕심 많은 새끼인 줄 몰랐는데 진짜.”
…뭐라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눈을 감은 유지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소리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서주환은 다시금 홀로 중얼거렸다.
“에휴. 어, 나도 알아. 나 존나 우유부단한 새낀 거 안다고. 그런데 어떻게 하냐. 포기할 수가 없는데.”
유지경은 울컥 치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꼈다. 저 말은 분명 정하연과 자신 중 누구도 포기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어쩌면 다른 여자도 끼어 있을지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큭큭. 그럴까? 내 생각에는 이미 연애고 결혼이고 그른 것 같거든. 어차피 그럴 거면 루시가 내 본처 해도 되지 않나?”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왔다.
‘본처? 루시는 또 언년이야!’
이름을 듣자하니 외국인인 듯했다.
대체 어디까지 다리를 걸치고 있는 걸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질이 나빴다. 그는 아주 글로벌하게 노는 카사노바였다.
‘개새끼!’
유지경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웅크렸던 몸을 활짝 폈다. 동시에 다리를 힘차게 뻗었다.
퍽!
어디에 맞은 걸까.
적중과 동시에 숨 막히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커헉…!”
꼴좋다, 나쁜 새끼.
질끈 감긴 유지경의 눈에서 찔끔,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
서주환은 어째서인지 화가 잔뜩 난 유지경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했다.
‘아니, 맞은 건 난데 왜…….’
무척 억울했지만 무어라 항변할 수는 없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유지경이 무서워서였다. 사실 무섭다기보다는, 따지는 순간 정말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눈치껏 사렸다.
“그, 먹고 싶은 거 있어?”
“…….”
“하하……. 내가 알아서 맛있는 거 해줄게.”
전력을 다해 요리했다. 천만 다행히도 ‘낮은’ 확률인 손재주의 특수능력이 펑펑 터졌다. 덕분에 고급 음식점에서 내다 팔아도 될 정도의 퀄리티 있는 요리가 완성되었다.
맛있는 건 평화를 가져다 준다. 과연 유지경은 화가 난 것도 잊고 연신 감탄하며 식사에 열중했다.
“너굴아 화 풀렸어?”
“너구르륵…….”
“…안 풀렸구나.”
이상하다. 맛있는 거 먹이면 풀려야 되는데. 오늘따라 너구리의 기분은 쉽게 풀어질 줄을 몰랐다.
‘뭔가 방법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가 좋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너굴… 아니, 지경아.”
“왜, 뭐.”
갑자기 정하연 말투를 쓰고 그러냐, 무섭게.
서주환은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하하. 밖에 나가서 기분전환 할까?”
“…….”
“에이, 그러지 말고. 쇼핑할래?”
“…둘이?”
“응? 애들 부를까?”
“캬아악!”
“둘! 둘이 갈게. 날씨도 좋은데 같이 데이트 하자. 어때?”
끄덕끄덕. 그제야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
서주환은 이왕 나온 김에 유지경의 기분을 완전히 풀어줄 생각이었다.
“내가 아는 옷가게 있어. 거기로 가자.”
“옷… 나 지금 돈 없어. 나중에 갈래.”
“응? 알바비는?”
“그건 다음 학기 등록금이랑 생활비 해야 돼.”
서주환은 더 묻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도 유지경의 집안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가 알기로는 자취도 고등학생 때부터 꼬박꼬박 모아온 돈으로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줄게.”
“오빠가? 됐어, 나중에 내가 살게.”
“어허. 따라오기나 해. 나 잘 버는 거 알잖아.”
“그래도…”
“쓰읍. 너구리는 주인님 말이나 잘 들으면 된다.”
“…너구리 되게 좋아하네.”
기분이 풀린 걸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서주환은 꽤나 부담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반쯤 억지로 옷을 선물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지경에게 옷 몇 벌 정도야 아깝지도 않았다.
“미용실도 가자. 내가 잘 아는 미용실 있어.”
“그럼 거긴 내가 낼게.”
“셧업. 가난한 대학생 돈 안 뜯어먹는다.”
“나도 미용실 정도는…”
“지금 가는 곳 다른 데 보다 훨씬 비싸.”
“…….”
유지경이 입을 다물었다.
서주환은 갑자기 소심해진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아악. 머리 만지지 마!”
“그럼 너도 부담스러워하지 마. 네가 먼저 말한 게 아니라 내가 해주겠다는 거잖아.”
“치이. 어쨌든 오빠가 내는 거잖아. 어떻게 안 부담스러워?”
“어허. 둘은 엄연히 다른 거야. 주인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제멋대로에 못된 주인님이네.”
“멋진 주인님이겠지.”
서주환은 낄낄 웃으며 유지경을 바라봤다.
검정 곱슬머리에 날갯죽지 아래까지 내려오는 애매한 장발. 이대로도 어울리긴 하지만 그는 더 예쁜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음. 어디 보자. 분명 예전에 잘 어울리는 머리가 있었는데.’
오래됐음에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지만 대충 형태를 알아도 무슨 컷이라던가 무슨 색이라던가 정확한 명칭을 알지는 못했다.
“대충 말하면 알아서 해주겠지.”
미용사가 무려 잠재등급 A+, 현재등급 A의 신하늘이었으니 적당히 말해줘도 될 것이다.
혼잣말을 들은 유지경이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무슨 말이야?”
“으음. 지경아, 너 머리 좀 자를 생각 있어?”
“그러려고 미용실 가는 거잖아?”
“아니, 좀 많이 자를 생각 있냐고. 살짝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중단발 정도?”
유지경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치면 오빠가 책임져야 돼.”
“그건 걱정하지 마.”
그는 유지경을 이끌고 오랜만에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
미용실을 나올 때, 서주환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뭔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려…….”
그는 간단히 커트만 해서 금방 끝났다. 덕분에 혼자서 유지경을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다. 한 번도 염색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기에 생긴 실착이었다.
“오빠. 어, 어때? 어울려?”
“말이라고 해? 몇 시간을 들였는데 안 어울리면 안 되지.”
“치. 말하는 게 밉상이야.”
“큭큭. 엄청 예뻐. 평일에 학교 가면 애들이 못 알아보겠다.”
옷과 머리 스타일을 바꾼 유지경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날갯죽지까지 내려왔던 머리는 어깨 아래 정도로 짧아졌고, 두 번의 탈색과 한 번의 염색을 더한 머리색은 고급스러운 갈색 빛을 띠고 있었다.
모카브라운이라고 했던가? 신하늘의 설명에 따르면 베이스를 갈색에 두고 애쉬한 느낌을 더해서 ‘튀지 않는 고급스러움’을 발하는 색이었다.
‘들어도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스타일에 관한 미적 감각에는 영 재능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머리색이 꼭 너구리의 털 색깔을 연상시켜서 마음에 들었다.
서주환의 생각을 알리 없는 유지경은 마냥 좋다고 웃었다.
“예쁘단 말이지? 헤헤.”
“나중에 펌도 해서 웨이브 넣으면 더 예쁠 거야. 한 번에 못해서 아쉽네.”
“한 번에 하면 완전 개털 돼. 펌은 내가 나중에 알아서 할게.”
“혼자 하지 말고 불러.”
“싫어. 오빠가 또 돈 내려고 그러지?”
“쓰읍. 주인된 도리로 당연한 거지.”
“메롱이다.”
유지경은 혀를 쏙 내밀었다가도 금세 다시 웃었다.
서주환은 피식 웃으며 옆에 서서 발걸음을 맞췄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작게 흔들면서였다.
“가자, 너굴아.”
“…그거 그만 좀 하면 안 돼? 지겨울 때도 됐는데.”
“안 지겨우니까 빨리 장단 맞춰라.”
유지경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은 그가 원하는 대로 소리를 내며 장단을 맞춰준다. 귀찮다는 듯 대충 중얼거리는 태도였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감출 수 없었으니.
“너굴여우.”
“그렇지.”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게?”
“응? 너굴너굴이라고 했잖아.”
“맞아.”
“싱겁긴.”
픽 웃는 그를 보며, 유지경은 알게 모르게 미소 지었다.
너굴너굴. 이 오빠는 모르고 있다. 너구리는 종종 여우와 같은 굴에서 살기도 한다는 것을.
‘당분간은 너구리로 있을까.’
여우보단 너구리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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