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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소라 눈나... 헤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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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셨길 바라고, 내일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D
어수선한 마음과 마음
희미한 달빛 아래로 희뿌연 담배연기가 퍼진다.
자욱하게 퍼진 연기는, 누군가의 마음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트러졌다.
정하연은 심란한 마음으로 다시 한 모금, 연기를 빨아들였다. 연기는 곧 자조어린 헛웃음과 함께 또 다시 흩어졌다. 그녀는 조금 전, 서주환의 집에 있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이잉, 하고 진동음을 내던 스마트폰.
서주환은 갑작스런 연락에도 반가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의 얼굴에는 해맑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가 그렇게 아이처럼 웃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사귈 적 보아왔던 미소와도 다른 느낌에, 그녀는 무심코 화면 속의 여자를 확인했다.
군복을 입은 짧은 머리의 여성.
얼핏 보기에도 여자는 미인이었다. 그다지 꾸민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그러했다. 나이는 자신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을까. 서주환의 ‘누나’라는 호칭에서 그녀가 연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표정과 말투에서부터 여유가 느껴졌고,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무척 가까운 사이라는 게 묻어나왔다.
정하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모르는 친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그리고 두 사람이 얼마나 친하든 간에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정하연은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최근 열심히 보고 있는 소설이나 읽을 심산으로 말이다.
- 오, 다시 사귀는 거야?
하지만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의지와 상관없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쫑긋, 하고 올라간 귓가로 ‘친구로 잘 지내고 있어’ 라는 서주환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친구.’
그 말대로, 정하연과 서주환은 친구였다. 이전에는 사귀는 사이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친구가 되었다. 한동안은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지만, 그마저도 서로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모두 털어냈다. 그리고 끝내는 깊은 속내까지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정하연은 그 관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헤어지고도 몸을 섞는 게 일반적인 친구관계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누구보다 서로를 깊이 아는 특별한 친구가 아닐까.
통화를 끝내고 온 서주환에게 질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저 친한 친구의 인연이 궁금해서 질문한 것뿐이다. 사심이 담기지 않았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여상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많이 친했나 보네.’
‘여자 분이셨구나.’
별 거 아닌 질문이었다.
그저 단순한 궁금증 때문에 물어본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 좀 추하네.’
정하연은 허탈하게 웃었다.
분명히 평소와 다름없이 여상한 목소리에 별 거 아닌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일지라도 감정이 섞인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저 아래에 꾸욱 눌러놓았던 감정이 아주 조금, 새어나오고 말았다.
감정 섞인 그 말이 서주환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정하연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건, 조금 곤란한 기색으로 물든 그의 표정을 보고서였다.
‘사심이 없기는.’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지금 와서 냉정히 생각해보면 ‘질투’라는 감정이 스며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난 아직도 주환이를 좋아해.’
정하연은 스스로의 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찾아가서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거야. 너도 나 맘대로 했으니까.’ 일전에 했던 말이 있으니 그는 간단히 품을 허락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같은 마음으로 하면 주환이가 더 좋아지겠지.’
그렇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눌러 담았다. 고무공처럼 튀어 오르려는 감정을 꾹꾹 눌러서 작게 만들었다.
‘티 내지 마.’
질투하지도 마.
이제 연인이 아닌 친구니까.
…친구로 있고 싶으니까.
*
그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를 좋아하는 건 어느새 정하연에게 당연한 일이 되어있었다.
처음 그에게 가진 관심은 단순히 친구로서였다. 이석찬을 제외하고 처음 사귄 이성 친구, 그것도 내숭 따위가 필요 없는 편한 친구.
그 친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 날 그의 방에서 영화를 보다가 일어난 해프닝 때문이었다.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손을 헛짚고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그녀는 바로 사과하고 일어나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세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묘해진 분위기에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급히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그와는 이후로도 친구였다. 다행히 장난스럽게 넘긴 게 통한 듯했다. 그러나 해프닝 이후 그가 조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복남매인 이석찬을 제외하면, 호감을 가진 남자와 그리 가까이 붙어본 건 처음이었기에.
사실 그가 정말로 신경 쓰이는 이유는 묘하게 그녀와 닮은 행동 때문이었다. 밝고 활발한 성격으로 아이들과 어울리지만, 종종 드러나는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눈에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어딘가 필사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녀가 여학생들과 어울리기 위해 흡연 사실을 감추고 이상한 화장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듯 학과생들에게는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주제에, 그는 어째서인지 자신을 친근하게 대했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이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와는 입학 전에도 흡연장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상한 태도였다. 유독 자신에게만 더욱 친절한 것 같은 건 단순히 착각인 걸까.
서주환은 회귀 전의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지만, 회귀하지 않은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하연은 점점 대학생활에 적응하는 그를 보고 역시 모두에게 친절한 거였구나, 하고 납득했다. 본격적으로 조별활동이 시작되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엠티 중, 다시 한 번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여자에게 예쁘다느니 하는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여장 준비를 위해 둘이 남은 후에는 그가 바람둥이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게, 또다시 이상한 분위기를 잡고서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게 아닌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싶어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이석찬처럼 마구잡이로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바람둥이인 걸까. 생각해 보면 처음에 그를 헌팅남으로 오해했었지. 오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는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모태솔로였다. 영락없는 바람둥이인 줄 알았는데 자신과 같은 모태솔로라니. 무척이나 의외였다.
백정기, 당시의 2학년 과대가 술에 취해서 성희롱을 하고 깽판을 부리더니 주먹까지 휘둘러댔다. 주먹을 피하고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그가 끼어들어 주먹을 막아냈다. 다친 곳은 없냐고 묻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제야 정하연은 자신이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고백했다. 그 또한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역시, 짐작대로 그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는 사귀기도 전부터 헤어짐을 걱정했다. 헤어짐을 두려워하기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놓치기 싫었기에 다소 억지를 부렸다. 남자와 사귀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능숙한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끝내 그와 사귀게 된 순간에는 너무 기뻐서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집이었다면 배게를 껴안고 침대 위에 굴러다녔을 것이다.
그렇게 성사된 연애는 무척이나 짧게 끝을 맺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친구 이상이 되고 싶어서 고백한 것인데, 그대로 있으면 친구 미만이 될 것 같아서 그에게 헤어짐을 ‘통보’했다. 통보, 그래. 그것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리했다. 그때는 무언가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만이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진 그날, 홀로 눈물 흘리며 담배를 태우고 있던 그날, 빗속에서 그가 달려와 눈앞에 섰다. 그녀는 그를 본 순간, 반가운 감정에 앞서 화가 많이 나지는 않았을까, 그런 걱정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사과를 해왔다. 자기가 어설프고 모자라서 이렇게 된 것이라며, 못할 짓을 했다며 사과했다. 먼저 고백하고서 일방적인 헤어짐을 통보한 것은 그녀일진대.
그날 눈가가 부을 정도로 울어서일까. 그와는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소 어색했지만, 사귈 때보다 더 편안하고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착각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그의 집에서 모여 공부를 하기로 한 날, 다른 친구들이 오지 않아 단둘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과 같은 친구 사이가 아니구나. 어색한 공기에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다음에 볼 때는 더 어색해질 걸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와 그녀는 적막이 맴도는 침묵 속에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어색한 공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공부에 집중하였다. 한데 너무 피곤했던 걸까. 그녀는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8년 전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15살의 어린 정하연은 울고 있었다. 유일한 피붙이인 어머니가 떠나갔음에 슬펐고, 텅 빈 어머니의 장례가 안타까워서 울었다. 혼자서 자신을 키우느라 이리 되셨다는 생각에 괜히 죄스러웠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서러움이 올라왔다.
울고 있는 어린 소녀를 달래준 것은 그 시절에 있을 리 없는 그, ‘서주환’이었다. 심상이 만들어낸, 어린 서주환은 언제까지고 계속 옆에 있겠다며 소녀를 안아주었다.
모든 것은 꿈에 불과했으나, 심상은 정하연의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부끄러움이 몰려왔지만, 가슴 한편이 따스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잠들어 있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애틋한 감정이 담기었다.
넘어졌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몸 위로였다. 입술이 부딪쳤고, 화들짝 놀라서 떨어졌다. 그는 떨어지는 그녀를 다시 끌어당겨 입을 맞췄고, 없던 일로 하자며 도망치려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당황스러움에 그녀는 욕을 내뱉었지만, 결국에는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은은하게 남은 미온이 주변을 맴돌았다. 신기하게도 숨 막힐 듯 어색했던 공기가 몽글몽글 풀어져 있었다.
그의 손길을 기억한다. 못해준 남자친구 노릇을 하겠다며 젖은 머리를 말려주던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몸을 주무르는 손길도 따스했다. 처음 몸을 섞었을 때를 제외하면 받아본 적 없는 마사지. 정하연은 그가 해주는 마사지가 좋았다. 따스한 손길이 정성스럽게 몸을 어루만지면, 마치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기에.
밤새도록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은 뜬금없이 시작된 과거사는 연인이었을 적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겪었던 불행을 일부나마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사귀기전부터 헤어짐을 걱정했는지도, 어째서 그렇게 섹스에 집착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도.
정하연은 다시 한 번 헤어짐에 사과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헤어짐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가 꽁꽁 싸매고 있던 트라우마와 속내를 모두 털어놓았기에, 그녀 또한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과거사를 얘기했다. 이석찬과 이복남매라는 비밀까지도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아니, 비로소 친구 이상이 되었다.
‘주환아, 너를 좋아해.’
그래서 정하연은 마음을 꾸욱, 내리눌렀다. 튀어나오려는 마음을 꾹꾹 뭉쳐서, 가슴 한편에 떨어트렸다.
이미 친구 이상이 되었음에, 더 이상은 연인이 될 필요가 없었으므로.
연인이란, 언제고 헤어질 수 있는 관계였으므로.
친구로 남아야만,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었으므로.
*
유지경은 벌써 세 개비 째 담배를 태우고 있는 정하연을 힐끗 바라봤다.
‘이 언니는 무슨 생각인지.’
아까 했던 말을 후회하는 걸까.
‘바보 같긴.’
유지경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보기에 정하연은 답답한 사람이었다. 질투 좀 하면 어떤가. 헤어졌다고 해도 서로가 싫어져서 헤어진 게 아닌데. 심지어 서주환도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쁜 건 그 오빤데 말이지.’
참 못된 남자였다. 정하연은 서주환을 좋아하지만, 서주환은 정하연도 좋아하고, 자신도 좋아하고, 다른 여자도 좋아한다.
유지경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분명 아까 통화하던 그 여군도 좋아할 테지. 아니면 좋아했었거나.
‘투정 좀 부리면 어때.’
그런 이기적인 남자에게 눈치 좀 주고 투정 좀 부리면 어떠한가. 그 정도라도 하지 못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뭐, 그마저도 결국은 그런 남자를 좋아하게 된 자신을 탓해야겠지만.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
정하연을 바보 같다고 했지만, 유지경은 자신도 만만치 않게 바보라고 생각했다. 결국, 끝이 무서워서 고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자신 또한 비슷했으므로.
‘도와줄까?’
유지경은 정하연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내가 주환 오빠 좋아하는 걸 알고 있겠지.’
어쩌면 그 때문에 접근한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을지라도 어느 순간 깨달았겠지. 그녀가 아는 정하연은 인간관계에 서투를지언정 눈치가 없는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정하연은 그녀에게 정을 주고 친한 동생으로 대해주었다.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고 무언가.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자신은 단 둘이 있을 때 기회를 잡아 단단히 꼽을 주었을 것이다.
덕분에 이쪽에서도 정말로 정하연이란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곤란할 정도였다.
유지경은 힐끗, 혼자서 청승을 떨고 있는 정하연을 바라봤다.
모델 같이 큰 키와 백설처럼 하얀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긴 속눈썹. 펑퍼짐한 옷 안에 감춰진 볼륨감 있는 몸매.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분위기까지.
정하연의 외형은 그녀가 내심 바래왔던 워너비(wannabe)였다.
‘음. 역시 싫어.’
친한 언니라는 이유로 도와주기에는 너무 불공평하게 생겨먹었다. 애초에 연적(戀敵)을 도와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아무리 좋아하는 언니일지라도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었다.
‘나중에. 좀 더 나중에 한 번쯤은 도와줄게, 언니. 지금은 내가 너무 불리하잖아?’
그리 생각하면서도 유지경은 마음이 콕콕 아려왔다. 먼저 정하연의 바보같이 착한 심성과 어설픈 대인관계 능력을 이용한 것은 그녀였으므로.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었다. 누가 누구를 동정해서 도와준다고. 그 인간은 지금 자신을 한 마리 애완 너구리로 여기고 있는데. 거기에 불만을 표하지도 못하겠는 게, 원하는 대로 너굴너굴 거려주면 아주 좋아서 죽으려고 한다. 이 불공평한 언니한테 비비려면 귀여운 척이라도 해야 되는 게 그녀의 현실이었다.
유지경은 삐죽 입을 내밀었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칫. 하연 언니, 그렇게 계속 피우면 폐 썩어요.”
“아, 으응. 나도 그만 피우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왜 존대해?”
“그냥 지금은 그러고 싶어서요. 그보다 언니, 저 먼저 들어갈게요.”
“혼자 가도 괜찮겠어? 내가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그럼 나중에 봐요, 언니!”
“으응. 조심히 들어가, 지경아.”
“언니야말로 조심히 들어가요!”
유지경은 힘차게 걸음을 옮기다가 도중에 방향을 꺾었다. 서주환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너구리는 무슨! 오늘부터는 내가 주인님이야!’
조교해주마!
*
채찍과 양초를 든 서주환이 수갑에 묶인 유지경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내 입술을 떼어낸 그가 붉게 물든 그녀의 살결을 손끝으로 쓸어내며 읊조린다.
“누가 주인님이라고?”
낮게 파고든 음성에 유지경은 다리를 꼬았다. 물이 주륵, 흘러내린다. 그녀는 애타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주, 주환 오빠요.”
“너는 뭐지?”
“주인님의 노예입니다아…….”
“노예는 어떻게 운다고?”
유지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나 하부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손이 빨리 말하라는 듯 살결을 뭉그러트리며 재촉했다.
그녀는 이내 다시 한번 이어진 입맞춤에 풀어진 눈가로 답했다.
“너굴…….”
너구리는 이미 주인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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