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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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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진실
140화 …
박도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주환을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자, 자퇴하라고 안 할게요. 그, 그냥 하연 언니한테 떨어져 주기만…”
“허. 이 미친년 봐라?”
서주환은 헛웃음을 지으며 박도희의 말을 끊었다. 이내 그가 박도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대체 네가 나랑 하연이 사이를 왜 신경 쓰냐? 사귀었다가 헤어지면 아예 모른 척하고 지내야 돼? 우리가 잘 지내겠다는데 왜 네가 지랄이야.”
“…….”
“그리고 뭐 약점을 잡아? 네 망상 때문에 내가 그딴 소리를 들어야 돼?”
“마, 망상? 그게 무슨…”
박도희는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서주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어서였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이내 같잖다는 투로 말했다.
“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지? 네가 지금 나한테 뭘 말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
“이게 누굴 병신으로 보고.”
서주환은 욕설을 씹어뱉으며 박도희를 매섭게 노려봤다. 평소에 습관처럼 웃고 다녀서일까.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무척 차가워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서늘한 눈빛, 이를 악물어 도드라진 턱이 사나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씨팔. 오랜만에 꼭지 도네.’
회귀 후 이렇게까지 화가 치솟은 건 백정기 이후 처음이었다.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봤으면 이 따위 짓거리를 계획하고 실행했을까. 아이템이 없었다면 정말 자퇴해야 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웃고 다니니까 만만해 보였나.’
회귀 전, 서주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같이 있으면 불행이 옮는 재수덩어리.
매사에 성실하고 예의바른 사람.
전자는 학교나 회사에서 같은 팀원으로 만난 사람들의 말이다. 그들은 서주환의 불운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평가에서 손해를 보곤 했기에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아했다.
반면 후자는 팀으로 만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깊게 친해지기 전에 그가 거리를 둔 사람들이기도 했다.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은 그들은 서주환을 상당히 좋게 봤다.
사실 전자의 사람들도 불행이 옮는 게 싫어서 그를 꺼렸을 뿐 사람 자체는 좋게 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가 매사에 성실했음은 물론이고, 누구에게나 예의 있는 태도와 배려하는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서주환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게 두 부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그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안 그래도 불운 때문에 재수 없는 놈으로 여겨지는데 당연히 좋은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겠는가. 그는 스스로를 마냥 착한기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나쁜 사람. 특히 자신을 선의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호구처럼 착해질 수 있고, 악의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독해질 수 있는 사람. 하다못해 학창시절 괴롭힘을 당할 때도 세 대 맞으면 최소한 한 대는 돌려주는 게 그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냐? 멀쩡한 사람을 강간범으로 만들려고 들어? 자퇴니 퇴학이니. 씨발, 아주 계획적으로 사람 인생을 조지려고 했네?"
“저, 전 하연 언니가…”
“입 다물어. 변명 들으려고 물어본 거 아니니까 주둥이 닫아.”
서주환의 서슬 퍼런 기세에 박도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순식간에 반전된 상황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서주환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다른 사람 인생 망가트리려고 했으면 네 인생 망가질 것도 각오했을 거라고 믿는다.”
“…….”
“안 했으면 내가 알려줄게. 어떻게 되나 보자.”
서주환이 말을 마치는 순간, 박도희는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죄송해요!”
“…설마 죄송하다는 말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냐?”
무릎 꿇은 모습을 봤음에도 서주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미 박도희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약점이니 뭐니 하며 제 딴에는 정하연을 위한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런 이유라면 왜 뒤에서 욕을 하고 다녔단 말인가. 저가 정하연을 좋아하니까 서주환을 욕해서 떨어트리고, 정하연을 욕해서 고립시키려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기회는 충분히 줬어.’
뒤에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바로 추궁하지 않고 집까지 따라온 것 자체가 인내였다. 화가 났지만 대화로 해결해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한데 박도희는 기회를 걷어차고 오히려 그를 함정에 빠트리려 했다.
한편 서주환의 단호한 태도에 박도희는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어떡하지?’
영상을 어떻게 찍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전 서주환이 보란 듯이 내민 폰에는 모든 증거가 고스란히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협박하는 내용까지도 모두 있었으니 그게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자퇴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이, 일단 숙이자. 그리고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박도희는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당장의 위기를 넘겨야 한다. 오늘만 기회가 아니었다.
“자, 잘못했어요! 진짜,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녀는 두 손을 싹싹 모아서 빌었다. 쉽게 용서해주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결국 서주환도 남자다. 성욕을 자극하면 틈을 보일 게 분명했다.
“뭐든지 할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박도희는 그리 말을 내뱉고 티 나지 않게 서주환의 눈치를 살폈다.
“뭐든지?”
“네, 네!”
박도희는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남자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친구의 말이 맞았다. 뭐든지 해주겠다고 하니까 바로 반응이 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런 인간과 몸을 섞는 건 싫었지만, 일단은 위기를 넘겨야 한다.
*
서주환은 무표정한 눈으로 박도희를 바라봤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마안’의 능력을 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홍색은 완전히 사라졌고, 회색이 추가됐네.’
회색은 갈등, 혼란이다. 짐작컨대 조금 전 망상이라고 지적한 부분에서 발현된 듯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낀 걸까.
‘붉은색이 두 줄. 노란색도 두 줄.’
어째서인지 적대감을 뜻하는 붉은색이 하나 줄었다. 기세가 꺾여서인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본인의 생각에 의심이 들어서일 수도 있다.
반면 존경심을 뜻하는 노란색은 여전했다. 무얼 존경한다는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서주환은 잠시 갈등했다.
‘어떻게 할까.’
쉽게 용서해줄 생각은 없다. 사람 인생을 망치려다 실패했으면 본인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게 말도 안 되는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서주환이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일단 폰 내놔봐.”
“네? 아… 네.”
“잠금 풀고.”
“여, 여기요.”
폰을 받아든 그는 갤러리와 녹음 파일을 살폈다. 조금 전의 음성 녹음을 제외하면 특별한 파일은 없었다. 그는 일단 녹음된 파일을 지웠다.
“클라우드 파일도 열어봐. 메일이랑.”
“…네.”
예상대로 연동된 클라우드 계정에 파일이 올라가 있었다. 파일을 모조리 삭제했다.
“더 없어?”
“어, 없어요. 정말이에요.”
“사실 있어도 상관은 없어. 내 쪽에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까.”
“…….”
“방 안에 카메라 있다고 했지? 카메라 가져와.”
박도희는 바로 움직이지 않고 우물쭈물한 기색을 보였다. 그에 서주환이 인상을 사납게 찌푸리자 그녀가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어, 없어요.”
“뭐?”
“…카메라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음성만 있다고 하면 약해 보일 것 같아서 한 말이었어요.”
“허.”
서주환은 헛웃음을 지었다. 당당하게 소리치더니 그게 다 거짓말이었다고? 그가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박도희는 믿어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서주환은 섣부르게 박도희를 믿을 생각이 없었다. 물론 카메라가 있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조심할 뿐이다.
그는 옷을 챙겨 입고 박도희의 집을 나왔다. 물론 옆에는 그녀도 같이 걷고 있었다. 그는 1번가 근처의 모텔로 들어갔다. 혹시 몰라서 계산은 박도희가 하도록 했다.
“…씻고 올게요.”
박도희는 스스로 말한 ‘뭐든지 할게요’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생각으로 말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부감이 드는 것은 별개였다.
‘남자 물건 따위를…….’
박도희는 남자와의 경험이 없었다. 같은 여성과만 관계를 가져왔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 BL, GL 취향을 밝히고 따돌림을 당했었다. 이후 학년이 바뀌며 새로운 친구들을 몇 만났는데, 그 친구들을 통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자각했다. 단순 취미였던 동성애가 확실한 성관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리고 박도희의 친구들은 현실의 남자 같은 건 더럽고 이기적인 생물일 뿐이라고 말해왔다. 그녀는 유일한 친구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受容)했다. 실제로도 남자의 우락부락하거나 배불뚝이 몸보다는 여성의 몸이 훨씬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남자 몸이 왜 예쁘지?’
박도희는 벗은 서주환의 몸을 보고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봐온 남자의 몸이란 과하게 우락부락하거나 살이 쪄서 둔해 보이는 몸이었는데, 눈앞에 있는 서주환의 몸은 근육이 선명했음에도 전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보기 좋게 잡힌 근육 덕분에 날렵한 느낌마저 살아 있었다. 마치 만화책에서나 보던, 현실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몸이었다.
박도희는 순식간에 옷을 벗고 다가오는 서주환에게 말했다.
“…오빠는 안 씻고 오세요?”
서주환이 코웃음 쳤다.
“내가 지금 너랑 연애질 하러 온 줄 아냐? 굳이 너 때문에 씻을 생각은 안 드는데.”
“…….”
“씻는 건 끝나면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꺼.”
“…네.”
서주환이 침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알아들었으면 올라가서 다리나 벌려.”
“…….”
그가 비웃듯 내뱉은 말에 박도희는 모멸감을 느꼈다.
‘역시 남자는 더럽고 저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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