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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페티시가 보여-132화 (13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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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연참입니다.

교접몽(交接夢)

나는 조심스럽게 문지방을 지나 정하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본래라면 절차에 따라 절을 올려야겠지만, 꿈속의 어린 정하연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장 씨 아줌마로 추측되는 여인은 어느새 없어졌다.

나는 정하연은 불렀다.

“하연아.”

“…….”

이름을 부르자 내 쪽을 잠시 돌아봤지만 그저 목소리에 반응한 것뿐인 듯했다. 초점 없는 눈은 제대로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마음에 빗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서 입술을 짓씹었다. 사방이 막힌 지하인데도 바깥의 빗소리와 천둥번개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나마저 넋을 놓을 수는 없었기에 어린 정하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연아! 나야!”

“…주환이?”

거세게 흔들자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나를 본 정하연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주환아.”

“응. 하연아, 나 여기 있어.”

“엄마가 죽었어. 그런데 사람들이 안 와. 우리 엄마 외로워서 어쩌지?”

나는 잠시 숨이 턱 막혔다. 지금 이 곳에는 정하연과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문지방 밖에 있었던 수다스런 아줌마들도 없었고, 정하연의 옆에 있던 장 씨 아줌마도 사라졌다.

‘과거에도 사람이 없었던 건가.’

추측컨대 정말로 이처럼 한 명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 씨 아줌마라는 사람이 하연이의 곁을 지켰을 테고, 가끔 오는 사람들도 몇몇은 있었을 터다.

그러나 꿈속의 상황을 보건대, 그 사람들의 수는 매우 적었고, 그마저도 금방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하연이의 옆자리에는 의지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없었겠지.

꿈이란 기억과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나는 지금 하연이가 이 날 느꼈을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내가 죽고 나서도 이랬을까.’

나는 순간 회귀 전의 내가 죽고 나서도 이렇듯 사람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들었던 인연은 불행으로 끊어졌고, 후에 다가오는 인연은 쳐냈으며, 죽기 전에는 방에 틀어 박혀 글만 쓰면서 단절된 삶을 살았으니 올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하연이의 어머니가 담겨 있을 영정사진이 마치 내 것처럼 보였다. 상주 자리에는 나의 부모님과 동생이 우리 아들, 우리 오빠 외로워서 어떻게 하냐며 울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아까 그 남자… 하연이 아빠겠지?’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는 어떤 사정이 있을 터다. 사실 그 사정도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겨우 중학생 정도의 어린애가 혼자 있게 한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적어도 아빠라면 그리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넋 놓은 표정으로 울고 있는 정하연을 끌어안았다. 어린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옆에 있을게. 집에 가지 않고 계속 옆에 있을게. 끝날 때까지 계속 곁에 있을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애(愛)가 아닌 연민(憐愍)이었다. 그 연민이 정하연을 향한 것인지 회귀 전의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품에 안긴 정하연의 몸이 잘게 떨렸다. 곧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울먹임이 흘러나왔다.

“흑. 흐윽… 고마워, 주환아.”

“…….”

헤어질 때 들었던 말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당시에 귀를 막고 있지 않던 내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 당시의 나는 고맙다는 말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친구로 지내자고 했던 게…….’

정하연은 나만큼이나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정을 준 사람이 떠나지 않은 것에 고마움을 느낀 것이었다.

나는 하연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미 내 품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새 다시 교실 안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7이라는 팻말 대신 1-3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뒷자리에 17살의 정하연이 보였다. 그녀는 하얀 얼굴로 표정 없이 책을 읽는 중이었다.

“하연…”

순간 여학생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정하연 쟤 혼외자식이라면서?”

“급 떨어지게 쟤가 우리 학교에는 어떻게 들어왔다니?”

“아빠가 운성그룹 쪽이잖아.”

“아, 석찬이네? 저런 애를 왜 챙겨주나 했더니.”

“엄마가 창녀였나? 가정 있는 남자랑 붙어먹었네.”

나는 마지막 말이 들린 쪽으로 훽 고개를 돌렸다.

“이 씹…!”

그러나 말을 모두 끝내기도 전에 장면이 뒤바뀌었다. 어느새 교실이 아닌 학교 건물 뒤에 나와 정하연이 서 있었다. 그 외에도 형제처럼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더 서 있었는데, 그들이 정하연에게 다가와 지껄였다.

“너희 엄마 창녀였다면서? 너는 얼마 주면 대주냐?”

“우리 부모님이 뭐하시는지 알지? 대충 말해봐. 넉넉하게 줄 테니까.”

놈들은 재수 없는 눈깔로 정하연의 몸을 훑으면서 낄낄거렸다. 열 받은 내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나보다 먼저 뛰어나간 사람이 있었다. 이석찬이 다짜고짜 한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뒤엉켰다.

“좆같은 새끼들이! 윽! 아악!”

이석찬은 한 놈을 열심히 패다가 옆에서 뛰어든 다른 놈에게 처맞았다.

“개새끼들아!”

나는 순식간에 뛰어들어서 한 놈의 아구창을 날려버렸다.

퍼억!

묵직한 손맛을 뒤로하고 다시 주먹을 날리려는데, 또 한 번 장면이 바뀌었다. 이석찬과 좆같은 놈 두 명 모두 유리처럼 깨져나가는가 하더니 교실 안으로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명백히 다른 점이 있었는데, 욕하던 계집년들과 재수 없게 웃어대던 형제 대신 나와 이석찬, 유지경과 장덕훈까지 정하연의 주변에 있었다는 점이다.

“아.”

정하연이 이제까지와 달리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하연이가 바라던 모습이구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함께 웃고 싶었구나.

문득 정하연이 나를 바라보더니 빨리 오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른 나가가서 그 손을 붙잡았다. 설마 잡을 줄은 몰랐는지 그녀가 화들짝 놀라더니 샐쭉한 얼굴로 옅게 웃었다.

정하연은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주환아,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다른 애들은 괜찮은데, 너만 보면 표정 관리가 안 돼. 솔직히 어색해서 죽을 것 같다?”

“…….”

“그렇다고 모르는 척 하고 싶지도 않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나도 모르겠더라…….”

어느새 정하연은 내 품에 등을 기댄 채 안겨 있었다. 장소도 교실이 아닌 익숙한 공간이었는데, 사귀었을 적 가끔 찾아갔던 그녀의 방이었다. 옷차림도 최근에는 보지 못한 끈 나시에 돌핀팬츠를 입은 편한 차림이었다.

정하연이 내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그냥 헤어지지 말 걸 그랬나? 대화하고 맞춰나갔으면 괜찮았을까?”

“…글쎄.”

“미안. 사실 아직도 그대로 있었으면 더 안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 다시 사귀는 건… 말도 안 되고.”

“그건 왜?”

“또 헤어지면 아예 끝이잖아.”

“…그러려나?”

“응. 내가 널 볼 자신이 없어.”

꿈속이기 때문일까. 정하연은 속에 있는 말을 숨김없이 말했다. 필터링이 없어진 느낌이다.

“있잖아. 우리 사귀었을 때 엄청 해댔잖아?”

“…그치?”

“솔직히 그때 내가 무슨 리얼돌? 그거라도 된 기분이어서 나 가끔 울었다?”

“…….”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구나. 지은 죄가 있으니 땀만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그때 정하연이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헤어지자고 한 건 그거 때문만은 아니야. 솔직히 할 때는 나도 기분 좋았거든. 너무 좋아서 나중에는 같이 즐겨놓고서 우울해하는 것도 어이가 없더라고.”

“그, 그럼 뭐 때문인데?”

“사실 이미 말한 적 있어.”

내 머리가 기억을 찾으려고 맹렬하게 회전했다. 말한 적이 있다고? 언제 말했지? 잠시 후 정답을 찾아낸 내가 중얼거렸다.

“친구일 때보다 못한 관계 같아서…?”

정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친구 이상이 되고 싶었는데 친구 이하가 된 기분이었거든. 그대로 사귀면 친구 미만이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친구로 돌아가자고 한 거야?”

“…응. 미안해. 내가 말해놓고 어색하게 굴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꿈속의 말일 뿐이었지만 그래서 더 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미안할 문제가 아니야.”

“푸흐. 또 네가 잘못한 거라고 하게?”

“아니, 그냥… 당연한 거지.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생각해.”

정하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루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정하연이 깨어나려고 합니다. 지금 관계를 맺지 않으면 곧 일어날 거예요.]

‘…관계를 맺으면?’

[꿈에 취해서 더 유지될 겁니다. 정하연이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한다면 장소와 시간도 더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무심코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주인님?]

루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가만히 정하연을 안고 있었다. 꿈속에 들어오도록 해준 아이템의 이름은 ‘교접몽’ 이었으나 아이템의 능력과 별개로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온전히 내 마음이었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적도 있지 않던가.

‘꿈속에서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피로를 풀어주겠다고 들어왔지만, 사실 변명이 맞았다. 그저 기회가 왔으니 꿈속에서라도 정하연과 몸을 섞어볼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아이템으로 하려고 하지 말자.’

실수로 관계가 틀어지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지금 정하연과의 관계는 아이템 없이 해결하고 싶었다.

그리 결심하는 순간, 꿈속 세계가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정하연이 깨어나려 합니다. 1분 뒤 현실로 돌아갑니다.]

*

엎드려 자고 있던 정하연의 몸이 크게 떨렸다.

덜컹!

“흐학?!”

그녀는 화들짝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봤다. 하도 많이 왔더니 서주환의 방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내 상에 놓인 프린트 물을 보자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다.

“아, 공부하고 있었… 미친, 미친 년. 내가 무슨 꿈을 꾼 거야…!”

순간 정하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 드문드문 스쳐지나가는 장면 때문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꺄아아악! 미친년아! 아니, 으아악!’

마음 같아서는 입을 열어 소리치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 서주환이 자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미친 듯이 질러댔다. 꿈의 내용이 모두 기억나는 게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일부 장면만으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하연은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이 되어서는 괜히 자고 있는 서주환을 노려봤다.

‘돌겠네… 내가 아직도 얘를 좋아하나? 아닌데. 아니어야 하는데… 아으으. 미쳐버리겠다, 진짜.’

그때 어깨를 감싸고 있던 이불이 툭 떨어졌다. 정하연은 그를 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축 처진 눈으로 서주환을 바라봤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사귀는 것도 안 되고, 친구로 지내자고 했으면서 그것도 똑바로 못하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 지내는 건 더 싫고.

정하연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귀찮은 년이다 싶어서 한숨이 나왔다.

“에휴. 이제 네가 덮고 자.”

그리 중얼거리며 떨어진 이불을 그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 순간, 서주환의 손등에 있는 문신이 환하게 빛났다. 동시에 그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좀 전의 그녀처럼 몸이 크게 뜰썩였다.

덜컹!

“흐악?!”

우당탕!

“어억!”

잠에서 깨어난 서주환은 비몽사몽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눈을 뜨자마자 몸이 기우뚱 쓰러지더니 땅바닥에 뒤통수를 박아버렸다.

“어으. 무슨… 하연이?”

눈을 뜨니까 정하연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하연이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탄 자세였다. 그녀가 잔뜩 당황해서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 어, 미안! 지금 비킬게!”

그때 다시 손등의 문신이 번쩍 빛나더니,

덜컹!

“힉!”

미끌!

상에 걸린 정하연이 미끄러지며 서주환의 몸 위로 완전히 엎어졌다.

쪽.

절묘하게도 입술이 맞닿는 각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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