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115화 (115/501)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후기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우위가 정해진 관계는

우르르릉!

현관문을 열자마자 천둥 울리는 소리가 요동쳤다.

쏴아아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랄. 날씨도 안 따라주냐.”

술을 깔 때만 해도 운치가 좋다는 둥 헛소리를 해댔으나 지금은 짜증만 났다. 그는 우산을 하나 펼쳐 들고 정하연의 집까지 뛰어갔다.

“허억. 훅. 후우.”

애초에 그리 먼 거리도 아닌지라 전력으로 뛰었더니 순식간에 도착했다. 서주환은 잠시 숨을 고르고 침을 삼켰다. 막상 문을 열려고 하니 지난 정신 나간 행각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아니, 수습이 가능하긴 한가?

‘일단 얼굴 보고 사과부터 하자.’

망설여봐야 가는 건 시간 밖에 없다.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되돌리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문을 두드렸다.

“하, 하연아. 나 주환이야. 문 좀 열어줘.”

…….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는 어떤 답도 없었다.

‘개빡쳐서 안 열어주는 건가?’

그럴 듯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걸 제대로 듣지도 않고 멍 때리고 있다가 제 할 말만 하고 나왔으니.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연아, 문 좀 열어줘! 내가 미안해! 얼굴 보고 다시 얘기하자!”

외치고 있으려니 쪽팔림이 몰려왔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그러다 아직도 쪽팔림을 느낄 정신이 있구나 싶어서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는 더 목청을 높였다.

“하연…!”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작용합니다.]

“어우. 시끄러.”

“……?”

정하연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낯선 목소리도 아니었다. 말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석찬이 보였다.

그가 혀를 차며 말한다.

“너희 깨졌냐?”

“…어.”

“쯧. 얼마 못 갈 줄 알았다.”

“…….”

“야, 깨진 김에 셤 끝나고 펜션이나 가쉴?”

“…미친 새끼세요?”

어이가 없어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석찬은 욕을 먹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낄낄거렸다. 그러다 픽 웃더니 다시 한심한 놈 바라보듯 하며 말한다.

“아무려면 너보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냐.”

“지랄. 내가 말해서 들을 상태였으면 진작에 했지. 그리고 난 남의 연애 참견하는 거 질색이야.”

서주환은 뭐라 대꾸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어서 인상만 구겼다. 확실히 그는 같잖은 과거에 매몰되어서 뭔가 말을 해줘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이야 정소라한테 욕 처먹은 후 아이템 기능까지 사용해 정신이 든 것이고.

이석찬이 다시 낄낄거리다가 말했다.

“정하연 집에 없다. 아까 나가던데.”

“…뭐? 그럼 어디 있는데? 몸도 안 좋으면서 어딜 나간 거야.”

“내가 우째 알겠음?”

“언제 나갔는지는 알아?”

“글쎄? 한두 시간은 된 것 같은데 안 들어오네.”

“미친. 두 시간?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몰?루. 잠깐 비 그쳤을 때 우산도 없이 나가던데?”

이석찬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서주환은 인상을 구기고 폰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정하연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부재중 전화가 여러 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부 정하연에게서 온 전화다. 시간대를 보니 정소라와 통화하기 이전부터 쌓인 연락이었다.

‘시발. 전화 온 줄 몰랐는데. 이거 씹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크게 좆됐음을 느끼고 정하연에게 통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갈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하니까 이석찬이 말해왔다.

“야, 벨소리 방 안에서 들리는 거 같은데?”

“어?”

다시 전화를 걸고 귀를 기울였다. 정말로 방 안에서 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석찬이 쯔쯔 혀를 찬다.

“폰 두고 갔나보네.”

“아니 씹…….”

폰은 또 왜 놔두고 간단 말인가.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작용합니다.]

‘이제 안 믿어, 시발!’

헤어지는 게 어떻게 행운이냐. 아니, 더 좆되기 전에 헤어졌으니 행운이라고 봐야 하나? 그래도 기껏 정신 차리고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폰 두고 나간 게 행운은 아니지 않은가.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작용합니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작용합니다.]

연신 울리는 알림에 서주환은 씨근덕대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일단 여기 있지 말고 움직이라는 소리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려니 뒤에서 이석찬의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쭈환! 정하연 걔 빈혈 있다? 혹시 어디 쓰러져 있으면 구급차 부르셈!”

울컥! 서주환은 뒤돌아 소리쳤다.

“아니 미친놈아! 그딴 소리 할 거면 같이 찾으러 가던가!”

“으엑. 귀찮음.”

“친구라는 새끼가 할 말이냐?”

“느엥? 찬이는 스물 두 쨜이라서 친구 아니고 동생인데욤. 뿌우.”

이석찬은 볼에 바람을 처집어넣고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은 면상이었다.

“도라이 새끼가…….”

서주환은 침을 탁 내뱉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거리를 뛰었다.

이석찬은 난간에 서서 뛰어가는 서주환을 바라보며 낄낄댔다.

“븅쉰. 나간 지 오 분밖에 안 됐는데.”

좀 전에 한 말은 순전히 엿 먹으라고 한 말이었다. 정하연이야 어디 편의점을 갔거나 담배라도 한 대 피고 있는 게 아닐까.

“쩝. 나중에 죽탱이 맞는 거 아냐?”

일단 꼬와서 지르고 봤는데 훗날이 걱정됐다. 백정기 패는 거 보니까 싸움 잘하던데. 아니, 그래도 꼬운 걸 어떡해. 얼굴만 보면 욕을 박는 사이라지만 정하연과 알고 지낸 지가 어언 8년이었다. 그 찐따가 8년 전 그날처럼 우는 꼬라지를 보니까 속이 뒤틀렸다. 하여간 그년, 누가 찐따 아니랄까 봐서. 그냥 친구나 많이 만들라니까.

이석찬은 이내 귀찮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아 몰랑. 때리면 우리 하연이 눈나 뒤에 숨지 뭐. 설마 패게 놔두겠어?”

*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작용합니다.]

이 놈의 행운은 길잡이 역할도 해주는 모양이다. 갈림길에 들어가 방향을 잘못 고르면 거기가 아니라는 듯 미친 듯이 울려댔다.

그렇게 뛰어가다 보니 어디로 가야하는지 대강 방향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주택가를 나와 삼거리 쪽으로 뛰고 있었다.

‘거기구나.’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서주환은 이제 알림에 의지할 필요도 없이 달렸다. 생각한 장소가 맞는지 연신 울려대던 알림이 잠잠해졌다.

곧 익숙한 흡연부스가 눈앞에 보였다.

“허억, 훅. 후으.”

서주환은 근처에 멈춰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흡연부스로 걸어갔다. 부스 안에는 검정색 집업을 걸친 긴 생머리의 여자가 멍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연아.”

“누구? 어?”

이름을 부르자 흠칫하며 소매로 얼굴을 훔치는 여자. 이내 그를 본 정하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당황했다.

“주, 주환아? 여기는 왜… 아, 너도 담배 피우러 왔어?”

전에 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는 정하연.

서주환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만나자마자 사과부터 할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무어라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게 되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붉게 물든 눈시울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설마… 울었나?’

정하연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직전까지도 눈물을 흘린 건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기도 보였다.

서주환은 멍청하게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하연이가 운 적이 있었던가?’

없다. 사귀는 중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다. 그녀는 백정기가 주먹을 휘둘렀을 때조차도 도리어 반격할 정도로 강단이 센 여자였다.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직 많이 화났어?”

“…….”

“저기,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자기 말했었지. 나 그래도… 아니, 미안.”

우물거리며 말하는 정하연을 보니 속이 터졌다. 잘못한 건 그인데 왜 그녀가 사과를 한단 말인가.

서주환은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주환아? 어? 어?”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러 번 안아봤음에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녀의 몸이 유독 가녀리게 느껴졌다.

“미안해.”

“…어?”

“미안해, 하연아. 내가 미안해.”

*

5분 전, 정하연.

“훌쩍. 아씨, 눈 아파. 왜 계속 나오고 지랄이야.”

너무 많이 울었는지 눈가가 쓰라렸다. 담배 연기 때문인가. 겨우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따끔한 아픔에 또 한 방울 새어나왔다. 오늘은 위에서도 짜고 아래서도 짜고 골고루 하는구나.

“지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질질 짜기는… 씨이.”

울어도 차인 사람이 울어야지 이게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이유도 제대로 못 대면서 뜬금없는 이별통보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먼저 고백하고, 먼저 차고. 지랄 났다, 정하연.”

그래놓고는 친구로 지내고 싶다면서 어물거리는 꼴이라니. 저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떠나는 걸 봤더니 눈물이 나오더라. 안 울려고 해도 지 맘대로 나오는 게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후우.”

오늘처럼 울어보는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질질 짜는 건 8년 전에 이미 졸업한 줄 알았는데.

그리 생각할 때였다.

“…하연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연은 흠칫하며 다급히 눈가를 닦아냈다. 고개를 돌리니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서주환이었다.

“주, 주환아? 여기는 왜… 아, 너도 담배 피우러 왔어?”

정하연은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먼저 친구로 지내자고 했는데 어색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제대로 답을 주지 않았지만, 여기서 자신까지 어색한 모습을 보인다면 정말 친구로도 못 지내게 될 터였다.

하지만 말없이 응시하는 그를 보니 흠칫 생각나는 게 있었다. 헤어지자 말하며 그 이유에 대해 어설피 설명할 때, 그는 굳은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

충격을 받은 듯도 했고,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차갑게 굳은 얼굴에서 진한 외로움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한때는 그녀 자신이 늘상 짓고 다니던 표정이었다.

정하연은 차마 서주환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시선을 살짝 내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많이 화났어?

“…….”

“저기,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자기 말했었지. 나 그래도…”

정하연은 변명을 하려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그에게 고백했을 때가 떠올라서다. 그는 한 번 고백을 거절했었다.

‘…하연아, 나는 사귄다는 게 좀 무서워. 나중에 헤어지게 되면…….’

그는 사귀기도 전에 헤어짐을 걱정했다. 크게 상처받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잘 맞을 거라고 막연하게 확신했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듯 고백을 성사시켰는데-

‘우리 헤어지자.’

그걸 먼저 끊어냈다. 제대로 된 이유도 대지 못하고, 맞출 자신도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그녀 자신이야 몇 번이고 생각하며 결국 이전으로 돌아갈 거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에게는 갑작스럽고 이기적인 통보였을 뿐이리라.

“…아니, 미안.”

그래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사과의 말을 읊조렸다. 여기서 더 말해보아야 자신을 이해해달라는 변명이었으니까.

저벅.

그런데 그가 다가왔다. 시선을 내리고 있던 정하연은 눈앞에 드리워진 발을 보고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주환아? 어? 어?”

와락, 그가 몸을 끌어안았다. 몇 번이고 안겼던 그 품이었다. 유독 크게 느껴지는 그의 몸이, 팔이 단단하게 자신을 끌어안았다.

정하연은 당황해서 무어라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이걸 놔달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몸부림쳐 밀어내야 하는지.

‘정신 차리자.’

이미 헤어지자고 말했다. 어설픈 마음으로 있어봐야 이도 저도 안 된다. 그녀는 살며시 그의 몸을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이 먼저 들려왔다.

“미안해.”

“…어?”

정하연은 멍청히 되물었다. 그러나 서주환은 계속해서 말했다.

“미안해, 하연아. 내가 잘못했어.”

“어? 어? 아니, 네가 왜…”

당황스러웠다.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 찬 건 자신일진대 어찌 그가 사과하는지.

“미안해.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어. 내 생각만 해서, 나 아픈 것만 생각하느라 너한테 못할 짓을 했어.”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내가 잘못한 건데.”

“아니야. 넌 잘못 없어. 내가 나잇값 못하는 병신이라 그런 거야. 미안해, 하연아.”

“…….”

정하연으로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동갑인 주제에 왜 나잇값을 운운하는지도 모르겠고, 뭐가 이기적이었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못할 짓이라는 것도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섹스만 했던 나날을 말하는 건 아닌 듯한데.

‘내가 잘못한 건데. 내가 멍청하게 줏대없이 행동해서 그런 건데. 나 때문인데-’

그런데 설움이 북받치는 건 왜일까. 자기 때문이라며 되뇌는 그의 말이 왜 위로가 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간신히 진정되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오려 하는 게 짜증이 났다.

“흑… 읏.”

정하연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흐느낌을 되삼켰다. 헤어지자 해놓고 그의 품에 안겨 울기는 싫었다. 다시 되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그럼에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그녀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야, 서주환.”

“…응.”

“솔직히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모르겠어. 추궁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모르겠어. 잘못한 건 나잖아?”

“그건… 어쨌든 내가 잘못한 거야. 넌 잘못 없어.”

서주환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녀는 존재유무조차 모르는 아이템에 대해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그랬던 건 모두 아이템 때문이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정하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게 헤어지자는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던 게 떠올라서다.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모질이끼리 사귀었었구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서주환을 밀어냈다.

“알았어. 그럼 네가 잘못한 걸로 하자.”

“…응.”

“그럼 한 대만 때려도 되지? 왠지 그래야 될 것 같거든.”

“어? 으응. 윽?”

정하연은 주먹으로 서주환의 복부를 쳤다. 별로 힘도 실리지 않았는데 아픈 척하기는. 가볍게 그의 배를 두어 번 토닥이며 말한다.

“뒤돌아.”

“어? 뒤?”

“등 내놓으라고.”

“어어.”

서주환은 시키는 대로 뒤돌아섰다. 그녀는 그제야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의 등을 쳐다봤다.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애였던가? 그간 혼자 마음 졸이며 고생했던 게 너무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옛적에 타들어간 필터를 버리고 새로 담배를 꺼냈다.

칙. 치익.

불을 붙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끝에서 올라온 연기가 매캐했다. 퉁퉁 부은 눈가가 연기로 따끔거린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며 입을 열었다. 서주환의 등에 기대면서였다.

“등 좀 빌린다?”

“…응.”

“돌아보지 말고 있어.”

“응.”

“귀도 막고.”

“응.”

“들려?”

“…응.”

“귀 막으라고.”

“…….”

“들려? 안 들리는 척 하는 거면 죽어.”

“…….”

“안 들리지?”

“…….”

“…흑. 흐윽. 읏… 씨이… 흑.”

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봄비였음에 장마철 소나기처럼 빗방울이 굵었다. 빗소리에 울먹임이 삼켜진다.

“흐윽. 고마워, 주환아.”

어설펐던, 이기적이었던, 그래서 더 안타까웠던.

쏴아아아-

모자란 두 사람의 연애가 끝났다.

비 내리는 4월의 저녁이었다.

*

<오류>

욕망 시스템의 관제인격.

주인 된 사람이 작명해주기를 일컬어- 루시(Lusy).

“등신 같은 게… 이러니까 헤어지자고 하지.”

루시는 홀로 자책하는 주인을 바라봤다. 그녀에게는 눈이 없었으니 본다는 표현은 이상했지만, 시각 정보를 토앻 보이는 주인은 괴로워보였다.

그녀는 주인의 정신파장을 느꼈다. 현재 그녀의 주인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주인은 죄책감에 스스로에게 욕을 쏟으며 자책하고 있었다.

루시는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의 탓이 아닙니다. 모두 제가 아이템을 잘못 만들어서 그런 거예요. 제 잘못입니다.]

그러나 루시의 의사는 주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시스템 측에서 그녀의 말을 차단한 탓이었다.

관제인격이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는 정보는 흘릴 수 없다. 그녀를 만든 창조주 러스트가 걸어둔 락 때문이었다. 그녀의 주인인 서주환이 그 사실을 알고 시스템의 허점을 악용해서는 안 되니까. 즉석에서 급조한 시스템에는 불합리한 오류가 다수 존재했다.

루시가 다시 말했다.

[욕망 시스템의 아이템은 상황에 따라 관제인격인 저, 루시가 만들기도 합니다. 페로몬 부스트 또한 제가 만든 아이템이에요.]

욕망 시스템의 아이템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시스템의 창조주인 ‘러스트’가 미리 만들어둔 아이템.

관제인격인 ‘루시’ 그녀가 상황에 따라 주인에게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만드는 아이템. 형편 좋게 나오는 아이템은 대부분 루시가 만든 것이다. 『페로몬 부스트』또한 루시가 서주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아이템이었다.

[잘못 만든 아이템입니다. 제가 인간의 감정을 알지 못해서, 아니, 어설프게 알게 되어 잘못 만든 실패작이에요. 시스템 레벨이 오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본래 관제인격에게 감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루시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감정을 배워가고 있었다. 욕망 에너지를 흡수하며 감정의 씨앗이 움텄다. 급조하여 조잡한 시스템의 오류 중 하나였다.

[주인님,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세요. 단지 조그마한 실수가 있었을 뿐입니다. 제가 모자라서 일어난 일이에요.]

『페로몬 부스트』가 주인의 관계를 망칠 줄은 몰랐다. 일부러 5중첩의 최대 효과조차 ‘약한 중독’, ‘약한 복종심’으로 제한을 걸어두었다. 과도한 명령을 내리면 상대가 반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인은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정하연이란 여자가 반발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약한 복종심’ 효과만으로도 정하연의 성격이 생각 이상으로 달라졌다.

인간의 감정을 알지 못해서 일어난 실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3Lv이 된 루시는 미약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싹틔웠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루시는 감정을 배웠으니까요.]

전달되지 못할 것을 알지만, 루시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녀는 러스트 시스템의 관제인격.

주인에게 하사 받은 이름은 루시.

루시는 주인님의 기도를 떠올렸다.

‘주님, 아니 러스트님. 부디 제가 정의로운, 아니 욕망 그득한 섹무새가 되게 해주세요.’

루시는 주인을 위해 절치부심 노력한다.

주인님의 행복한 섹스 라이프를 위하여.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