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88화 (88/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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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정하연은 민초단입니다. 참고로 하와이안 피자는 극혐합니다.

서주환은 민초에 별 생각이 없습니다. 하와이안 피자에도 별 생각이 없습니다.

본 글쟁이는 민초단은 아니지만 별로 불호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굳이 하와이안 피자가 아니더라도 피자에 파인애플이 올라가는 걸 극혐합니다. 따끈한 파인애플은 싫어!

187cm의 근육빵빵 장덕훈은 씹덕입니다. 페그오를 좋아합니다.

참고로 저는 모바일겜 안 합니다ㅋㅋ;;

오로지 로아!

...요즘 글 쓰느라 숙제도 제대로 못해서 슬프네요 ;ㅅ;

이러다 길드 강퇴 당할 듯.

*

벚꽃이지는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도 모두 감사합니다!

*

오늘도 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 한 번만 부탁드려요 :D

저는 현실 여자한테 관심 없슴다

엠티 때의 사건이 출판콘텐츠학과에 퍼지는 건 금방이었다.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학과 내에 소문이 파다했다.

당연하게도 백정기에 대한 여론은 바닥을 쳤다. 이후 학교에 온 백정기는 자신을 향한 시선에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정하연에게 사과를 하러왔지만, 그녀는 싸늘하게 한 마디 할 뿐이었다.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꺼져.”

백정기는 무어라 항변이라도 하려는 듯 시뻘게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서주환을 보고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술에 취했을 때야 앞뒤 분간 못하고 일을 쳤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은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 맞은 기억이 선명했다. 그는 서주환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갔다.

백정기가 사라짐으로써 공석이 된 2학년 과대표는 본래 부과대였던 민혜영이 맡게 되었다. 한편 그녀가 맡고 있던 부과대는 압도적인 추천에 힘입어 조경준이 되었다. 엠티 장기자랑에서 활약을 한 탓이었다. 부과대가 된 그는 서주환을 원망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른 소문 하나가 돌았다.

“백정기 휴학했다더라.”

“휴학이 아니라 자퇴라던데?”

어떤 게 진실인지는 모른다. 다만 자퇴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게, 백정기는 2학년이고, 소문의 근원지는 1학년이었다. 지금의 1학년은 백정기가 군대를 갔다 온 후 복학을 해도 남아있었으니, 소문이 사라지길 바란다면 앞으로 적어도 4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느니 다른 대학을 알아보는 게 빨랐기에 백정기에 대한 소문은 자퇴로 굳어졌다.

백정기에 대해 얘기하던 사람들은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응. 그냥 그 꼰대 얼굴 볼 일 없으면 좋겠다.”

“꼰대가 문제니. 성추행범이잖아, 그 인간.”

“으. 진짜 싫어.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무슨 생각으로 사람 다 있는 데서 그랬다니?”

“범죄자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재수 없으니까 그 인간 얘기는 그만하자.”

“하긴. 우리가 얘기 안 해도 아는 사람 천진데. 에크에도 올라갔더라. 학과 망신이야, 진짜.”

“그만 공부 좀 합시다~. 시험 기간이에요, 이년아.”

“윽. 이제 개강 시작했는데 뭔 시험기간? 징한년. 또 장학금 타려고 그러지? 어차피 혜영이가 일등 할 텐데.”

“너 일루 와!”

소문은 생각보다 더 넓게 퍼졌다. 대학생들이 주로 쓰는 ‘에브리위크’에 당시 사건을 요약한 게시글이 올라간 탓이었다.

“하연아, 잘됐다. 그치?”

덕분에 백정기는 서주환이 무언가 손을 쓰기도 전에 알아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응. 진짜로.”

정하연은 정말 기쁘다는 듯 드물게 활짝 웃었다. 서주환이 그녀를 보고 마주 웃으며 말한다.

“너 웃는 거 진짜 예쁘다.”

“…아, 쫌.”

“왜.”

“학교에서는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싫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정하연은 스스로 예쁜 걸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예쁘다며 칭찬을 해대니 민망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 아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이 말해주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으니까.

한편 두 사람이 꽁냥대는 장면을 본 유지경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에브리위크에 사건을 공론화시킨 게 바로 그녀였다. 혹시라도 백정기가 수작을 부려 서주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으. 닭살. 괜히 도와줬나.”

헤벌레 하고 있는 서주환을 보니 조금 후회가 되었다.

‘치. 상준다고 했으면서.’

까맣게 잊은 듯한 그가 야속하기만 하다.

*

서주환은 엠티의 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출판콘텐츠학과 유명인사가 되었다. 13학번이면서 1학년 복학생이라는 특이한 점과 여장대회, 장기자랑, 백정기와의 다툼 등 단시간에 눈길을 끄는 일이 많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쏟아진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별로 불편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관심이라 생각하고 지내는 수밖에.

그래도 좋은 점이 있긴 했는데, 1학년뿐 아니라 2, 3학년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족보나 달라고 해야지.

‘우리학과는 딱히 족보가 필요 없던가?’

전생에 혼자 다녔던 서주환은 족보의 존재유무조차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가 새삼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푸근한 인상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주환.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러게. 마주 칠 일이 별로 없었네. 그런데 너 부과대 됐다면서?”

“너 때문이잖아….”

“흐흐. 네가 잘 해서지 왜 내 탓이냐.”

조경준과 인사를 나누고 있자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상대방 쪽에서도 그를 보고 손을 흔든다.

“도이 너 학생회 들어갔다며?”

“으. 1학년만 하고 그만 뒀었는데, 애들 개판으로 하는 거 보고 다시 들어갔어. 그냥 내년에는 학생회장도 해버릴까 고민이야.”

“사서 고생하네. 그래도 나중에 자소서 쓸 거 한 줄 생겼네.”

“아직 고민만 하는 거야. 하고 싶은 게 따로 있거든. 일단 좀 보고, 안 되면 경준 오빠 추천해야지.”

그 말에 조경준이 발작한다.

“난 왜!”

“으히히. 농담, 농담.”

“제발 농담으로 끝내라고….”

싫다는 듯 질색하는 조경준이었지만, 서주환이 보기엔 마냥 농담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음흉하게 웃던 도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묻는다.

“오빠, 하연 언니랑 사겨?”

“어, 어?”

“헐. 사귀네.”

“어떻게 알았냐…?”

서주환은 멋쩍게 눈꼬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굳이 숨기진 않았지만 사귄다고 말하고 다니진 않았는데.

도유이가 픽 웃으며 말한다.

“엄청 티 나거든. 주로 오빠가.”

“난 하연이 걔도 티 좀 나던데.”

“하긴, 하연 언니도 안 그런 척 티 엄청 나더라.”

조경준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서주환은 당황해서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어디 말하고 다니진 말아주라.”

“흐응. 나도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는데, 알 만한 사람들은 금방 알게 될 걸?”

“2학년은 몰라도 1학년은 금방 눈치 채겠지.”

고개를 주억이는 두 사람이다. 그 말대로 서주환만 모를 뿐 대부분의 1학년들은 그가 정하연과 사귀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티가 많이 났나 보네.’

사귀는 사이에는 감춘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법이다. 하물며 그는 적극적으로 숨긴 것도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소문이 나는 게 당연했다.

서주환은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하연이 복도 반대편에서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좋은 걸 어떡해.’

회귀 후 섹스는 많이 해봤지만 여자친구를 사귄 건 처음이었다. 가슴어림이 간질간질한 생소한 기분이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서주환은 얼른 정하연에게로 뛰듯이 걸어갔다. 뒤에서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알 게 무언가.

“오늘 과대 새로 뽑는다고 했었지?”

“응. 너 혹시라도 나 뽑으면 안 된다? 나 절대 하기 싫어.”

정하연이 질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싫어하는 걸 회귀 전에는 어떻게 4년 내내 했는지. 새삼 그녀에게 고마워진다.

오늘은 1학년 과대를 뽑는 날이었다.

1학년들은 수업이 모두 끝나고 빈 강의실에 모였다.

조교가 귀찮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과대 하고 싶은 사람?”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과대처럼 귀찮은 일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조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본래라면 아무런 추천이 나오지 않고, 임시과대가 그대로 과대를 하게 된다. 정하연의 얼굴이 다급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이변이 일어났다. 유지경이 번쩍 손을 들며 말한 것이다.

“주환 오빠를 추천합니다!”

그 말에 강의실 안 시선이 서주환에게로 모여들었다.

‘아니, 쟤가 갑자기 왜 저래!’

서주환은 기겁을 했다. 요즘 묘하게 쌀쌀맞다고 생각한 유지경이 생각지 못한 빅 엿을 날렸다. 이쪽을 돌아보며 얄밉게 혀를 내미는 모습이라니.

그가 미처 고개를 젓기도 전이었다.

“저도 주환 오빠가 좋다고 생각해요!”

“13학번 선배님이기도 하고.”

“환이 언니는 인정이지.”

유지경의 추천에 학생들이 힘을 실어줬다. 당사자인 그가 당황 가득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저어보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고자 입을 열려는 순간.

“푸하하. 주환아, 잘 됐다. 이제 과대님이네?”

“저도 형님이 하는 게 맞는 것 같슴다. 음. 역시 형님 말고는 없습니다.”

이석찬과 장덕훈마저 그를 배신했다. 그나마 장덕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였지만, 이석찬은 낄낄거리며 그를 놀려먹기 바빴다. 정하연은 슬그머니 자세를 낮추고 눈에 띄지 않으려는 중이었고.

‘엠티에서 너무 나댔다.’

서주환은 여기서 싫다고 거절해봤자 씨도 먹히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간다!

“부과대 석찬이가 하면 저도 과대 하겠습니다!”

그 말에 낄낄대던 이석찬이 기겁한다.

“뭐? 야! 나는 왜!”

“혼자 죽을 줄 알았냐?”

“정하연 있잖아!”

“씁. 우리 하연이 건드리지 마라.”

“…미친놈.”

헛구역질을 하며 욕을 내뱉는 이석찬.

결국 만장일치로 정해졌다.

서주환, 과대.

이석찬, 부과대.

*

어두컴컴한 방 안에 술병이 널브러진 채 굴러다닌다.

백정기는 멍한 눈으로 티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엠티 이후 그는 휴학계를 내고 자취방에 틀어박혔다. 학교는 물론, 밖에 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것만 같아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사건을 알고 있는 일부는 그를 흉보는 게 사실이었다.

멍하니 티비를 보던 백정기는 돌연 발작하듯 리모콘을 내던졌다.

빠각!

벽에 부딪친 리모콘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는 분이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씨발 새끼들!”

자신이 뭘 그리 크게 잘못했단 말인가. 성추행범? 술에 취해 한 실수에 불과했다. 강간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허벅지에 손을 한 번 올렸을 따름이다. 그리고 폭행은 오히려 자신이 당하지 않았던가. 바닥을 구를 때 깨진 유리조각에 베인 상처가 아직도 따끔거렸다.

“그 걸레 같은 년이….”

백정기의 분노는 서주환이 아닌 정하연에게 향했다. 본능적으로 서주환에게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정하연에게 당했던 건 순전히 술에 취했기 때문이었다며 그는 굳게 믿었다.

“그년이 호들갑만 안 떨었어도… 씨발.”

딱 봐도 중학생 때쯤 뚫렸을 것 같은 년이 고작 허벅지 가지고 난리를 칠 줄은 몰랐다. 나름대로 잘생긴 얼굴을 믿고 지내왔던 그에게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괜히 일을 크게 키웠다고 밖에는 생각이 안 들었다.

‘씨발년.’

바로 입대 신청을 할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와도 지금의 1학년들은 남아있다. 중간에 휴학 하는 사람이 있을 걸 생각하면 학교에 더 이상 다니는 건 무리였다. 당장은 휴학계를 냈지만 사실상 자퇴를 해야 할 판이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렸다.

‘내가 그년은 죽이고 만다.’

술에 취한 백정기의 눈이 벌겋게 충혈 됐다.

*

골목 어귀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남자가 황당한 얼굴이 되어 말한다.

“허. 진짜 오네?”

남자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예. 도련님,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 헐. 이걸 오네?

“…온다고 한 건 도련님이잖습니까?”

- 아니 뭐. 그냥 느낌이 좀 쎄했거든. 형도 알다시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좋잖아. 감도 좋고.

남자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모시는 도련님은 신기할 정도로 사람 보는 안목이 좋았다. 그 안목이란 게 단순히 눈치를 잘 보는 정도가 아니다. 가끔은 뭘 보고 판단하는지 알 수도 없이 순전히 감으로 사람의 성향을 때려 맞추곤 했는데, 그게 거짓말처럼 들어맞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점 때문에 사장님이 도련님을 아끼시는 거겠지.’

하지만 이 도련님은 귀찮은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적당히 돈 펑펑 쓰면서 욜로 인생을 보내는 게 꿈이라던가. 그 꿈이란 게 정말인지, 아니면 막내로 태어나 가망성 없는 후계에 대한 반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곧 혀를 차며 생각을 그만뒀다. 일개 경호원인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으니.

‘내 할 일만 하면 되지.’

괜히 깊게 생각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곤란하다. 이처럼 편하고 좋은 직장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한량처럼 운동이나 하다가 가끔 부를 때만 일을 처리하면 된다니 얼마나 편한 직장인가. 그러면서 월급은 어지간한 회사원들보다 배는 받고 있었으니 이런 직장이 또 없었다.

전화를 끊은 후. 그는 비틀비틀 걸어오는 남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거기, 나 좀 보지? 어어, 도망가지 말고.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아.”

*

이석찬은 세상 귀찮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눈앞에는 배를 부여잡고 새우 자세로 꼬꾸라진 백정기가 있었다.

그가 발로 백정기를 툭툭 건드리며 말한다.

“너 진짜 미친 새끼구나? 칼을 들고 찾아와?”

“자, 잘못 했…”

백정기가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한다.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를 보며 이석찬은 여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잘못했어?

“네, 네! 두 번 다시 안 그럴게요! 살려주세요!”

손을 뻗은 백정기가 이석찬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털어 백정기의 손을 떼어냈다.

“아으, 드러. 좀 조용히 해봐. 내가 설마 너 죽이겠냐?”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있잖아.”

“네, 네!”

이석찬이 돌연 싸늘하게 내뱉는다.

“넌 왜 죽이려고 했냐?”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백정기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 아니에요! 죽이려고 안 했어요! 그냥 위협만 하려고…”

“위협하려고 품에 과도를 들고 오셨다? 그럼 위협한 다음에는?”

“…….”

“대답 안 해? 아니다. 그냥 말하지 마. 안 들어도 알 것 같으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석찬의 발이 움직인다.

뻐억!

“컥!”

복부를 걷어차인 백정기가 짧은 신음을 토한다. 이어 바닥에 엎드린 채로 음식물을 쏟아냈다.

“우웨에엑!”

“아, 이 새끼 또 토하네. 토쟁이 새끼.”

이석찬이 기겁하며 한 발 떨어졌다. 일전의 기억이 떠올라 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백정기가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그를 부른다. 하지만 백정기는 여전히 목이 막히는지 대답이 없다. 물론 백정기 따위가 목 막힌 걸 봐줄 이유는 없었다.

“야. 대답.”

“네, 네.”

“한 번만 대답해. 정박아도 아니고.”

“네!”

백정기는 공포로 물든 채 이석찬을 올려다봤다. 이석찬의 뒤에 있는 덩치 큰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정기는 이석찬이 더 무서웠다. 조금 전 자신을 깔아보며 했던 무미건조한 말이 선명하다.

‘백정기, 이남 일녀 중 차남, 나이 스물 셋, 화석고에 재학 중 사고 쳐서 꿇은 게 2년, 부모님 두 분은 다 운성전자에 다니네?’

‘형 쪽은 로스쿨 준비에 여동생은 한국대 재학 중이고.’

‘이야, 다 행실 바른 사람들인데 왜 너만 그러냐? 이 정도면 네가 사라져주는 게 효도인 것 같은데? 너 혹시 바다 좋아하냐?’

‘뭘 쫄아. 웃어. 당연히 그냥 해 본 말이지. 아니, 웃으라는 게 해 본 말이라고.’

‘새끼, 부모 잘 만난 게 아쉽네.’

뭐가 아쉽다는 걸까. 만약 그의 가족들에게 흠이 있었다면 어떤 말이 나왔을까.

그는 자신의 숨 줄이 간신히 붙어있는 걸 깨닫고 필사적으로 빌었다.

*

“조만간 너희 부모님한테 연락 오면 말 잘 듣고 살아라. 또 내 눈에 띄지 말고. 그땐 얄짤 없으니까.”

“네, 네! 감사합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백정기의 방을 나온 이석찬은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 성격에 안 맞아서 못해먹겠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죽이느니 살리느니 폼 잡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푸스스 웃으며 말한다.

“도련님, 그냥 저한테 맡기지 그랬습니까? 적당히 만져주면 헛생각 못할 텐데.”

“그래도 직접 하는 게 속 편해서.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형. 말도 그냥 편하게 하고.”

질색하는 반응에 남자가 끌끌 웃었다. 이내 그가 이석찬을 보며 지나가듯 말한다.

“새로 사귄 친구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음. 그렇지? 부모 믿고 대가리에 똥만 찬 새끼들 보단 훨씬 나아.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진가?”

낄낄거리며 웃는 이석찬.

이내 웃음을 그친 그가 힐끗 남자를 돌아보며 미안한 투로 말한다.

“강호 형,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좌천 되고.”

남자, 백강호는 아버지의 운전기사이자 개인 경호원이었다. 한데 이석찬이 집을 나온 뒤로 그에게 배속됐다. 아버지의 과보호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이다.

한편 백강호는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는 깍듯하던 태도를 바꾸고 이석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좌천이 아니라 휴가지. 아무것도 안 하고 띵가띵가 놀면서 월급 따박따박 받아 가는데 얼마나 좋냐?”

“형이 그렇게 생각해주면 다행인데, 미안해서 그러죠.”

“미안하면 월급 올려주던가.”

“아니, 그건 내가 못 해주죠. 나 용돈 끊겼잖아. 아버지한테 말해줄까?”

“으엑. 농담으로라도 그러지 마라. 나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솔직히 그냥 계속 이렇게 일 하고 싶거든? 그리고 어색하니까 존대 쓰지 말고.”

“푸흐흐흐.”

이석찬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이 형도 특이한 사람이다. 운성그룹 후계서열에 있는 사장의 개인 기사 자리가 아쉽지 않다니. 그 말이 대충 둘러대는 게 아니라 사실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서 더 어이가 없었다.

백강호가 피식 웃으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친구들 마음에 든다니까 다행이다. 주환이 그놈 괜찮지?”

서주환. 헬스장에서 우연히 만난 동생. 대안대학교에 다닌다고 하는 걸 듣긴 했지만 이석찬과 같은 학과 친구가 될 줄은 몰랐다.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이석찬이 그의 말에 픽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괜찮긴. 나 오늘 걔 때문에 부과대 됨. 확 부잣집 아들의 권력으로 매운맛을 보여줘?”

허공에 붕붕 주먹을 휘두르는 이석찬이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원투 자세를 취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주환이 자식 나랑 비슷한 거 같아. 형이랑도.”

“비슷해? 운동 좋아하거나 장난치는 점이?”

“아니, 그거 말고. 좀 변태기질이 있다고 해야 되나?”

“내가 변태라는 뜻이냐…?”

“아니야?”

“끙.”

백강호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이 도련님과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렸을 적 질펀하게 놀아재낀 걸 썰이랍시고 들려줬으니.

이석찬은 그런 백강호를 보고 낄낄거리다가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불현 듯 떠오른 생각에 쓰읍 숨을 들이키며 백강호를 힐끗 쳐다본다. 역시 말해두는 게 낫겠지.

“강호 형, 이건 비밀인데.”

“뭐가?”

“주환이 그 자식 정하연이랑 사귐.”

“…아가씨랑? 사장님은 아셔?”

“모르지. 보고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야. 그 노친네 알면 또 전화할 게 뻔하잖아.”

이석찬이 혀를 차며 말했다. 노친네, 그러니까 후회 할 일을 왜 해서는. 하려면 철저하게 하던가.

“으음.”

백강호는 곤란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가 고민하는 듯하자 이석찬이 옆구리를 찔렀다.

“형, 나중에 집 가면 좋은 거 가져올게. 아니면 일본 쪽에 거기로 빠삭한 사람 있다는데 소개시켜 줄까?”

“…뭘?”

“형 요즘도 밤일 잘 못하지? 그… 잘 안 슨다며.”

“…….”

백강호가 벌게진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예의 호랑이 같은 눈으로 이석찬을 노려본 그가 으르렁대듯 말한다.

“콜.”

그의 나이 서른 넷, 쥬지가 서지 않은 지 반 년이 다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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