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85화 (8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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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드디어 치우네요.

현대 배경만 아니면 최소 팔 한 짝은 날리는 건데 조금 아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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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쿠폰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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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 한 번만 부탁드려요 :D

마지막으로 말할게

이석찬은 짐짓 차분한 얼굴로 얘기했지만, 사실 복잡하게 갈 필요도 없이 잘잘못이 명백한 상황이었다.

정하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현장에 있지 않았던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주환이 너 중간에 담배 핀다고 나갔었잖아.”

“어, 그랬지?”

서주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와 백정기 사이에 알게 모르게 기 싸움이 있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좋았다.

정하연이 말을 잇는다.

“너 나간 뒤로 백정기가 계속 내 쪽으로 기대더라고. 처음엔 취해서 그런 건 줄 알고 짜증나도 그냥 말로 했어. 취했으면 가서 자라고. 옆에 있던 애들은 봤을 걸?”

유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기 선배, 아니 백정기가 계속 하연 언니한테 기댔어요. 자라고 해도 괜찮다고 자리에 있으면서요.”

그녀 외에도 본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고개를 주억이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정하연이 미간을 찡그리며 다음에 있었던 일을 말한다.

“안 일어나서 내버려뒀더니 내 허벅지 더듬더라. 일 크게 키우기 싫어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계속 그러더라고. 그래서 참다가 소리친 거고. 나머지는 아는 대로야.”

사실 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방 안에서 그걸 본 게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당시 현장에 없었던 서주환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욕설이 섞인다.

“백정기 이 미친 새끼가….”

“진정해.”

서주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시키는 건 이석찬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하연과 오랜 친구 사이였으니 그 분노가 서주환 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석찬은 냉정하게 말했다.

“일단 성추행은 확실하고. 그 이후도 문제야. 아는 대로가 아니라 확실히 해야 돼. 설마 싶긴 하지만, 그 새끼가 나중에 지랄할 수도 있으니까.”

정신을 차린 백정기가 폭력 건으로 신고니 뭐니 하는 순간 복잡해진다. 어처구니없지만, 폭력 사건은 이해관계를 떠나 먼저 맞고, 많이 맞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이석찬이 서주환을 돌아보며 말한다.

“넌 먼저 맞았다고?”

“여기 이마 빨개진 거 안 보이냐. 그 새끼가 손톱으로 긁어놔서 상처도 있다. 그 전에는 막기만 했어.”

박투 재능의 특수능력까지 발동하며 선빵을 맞아줬다. 급박한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뒷일을 생각해서였다.

“저기, 오빠들.”

그때 지켜보고 있던 유지경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녀가 손에 든 핸드폰을 흔들어보였다.

“아까 그거 제가 다 찍어놨어요.”

방 안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특히 당사자인 서주환과 정하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말을 이어가던 이석찬이 반색하며 말했다.

“이야! 너 진짜 잘했다. 그거 좀 보여줄래?”

“여기요.”

“오케이. 이거면 됐다. 더 얘기할 것도 없어.”

이석찬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유지경이 찍은 영상은 두 편이었는데, 하나는 정하연과 백정기, 서주환의 다툼이었고, 하나는 백정기를 들어서 옮기는 장면이었다. 그 사이 서주환이 백정기의 복부를 친 장면은 찍혀 있지 않은 게 절묘했다.

‘안 되면 시스템으로 어떻게 해보려 했는데.’

얼마 전에 얻은 기능『추억 보관소』를 이용하면 영상 파일을 받아내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다만 누가 찍었느냐를 밝혀야 하니 일이 복잡해질 수 있어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데 유지경 덕분에 일이 훨씬 편해졌다.

“지경아, 고맙다.”

서주환은 씩 웃으며 유지경에게 인사했다. 언제 그런 걸 찍어 놓은 건지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눈이 마주친 유지경이 손가락으로 작게 브이를 그렸다. 동시에 입모양으로 소리 나지 않게 말한다.

‘나중에 상 줘야 돼?’

아무려면 듬뿍 줘야지.

서주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석찬은 서주환과 정하연을 따로 불러내서 말했다.

“정하연, 너는 백정기 밀친 거 밖에 없다고 했지?”

“응.”

“너 그거 밀친 게 아니라 놀라서 하지 말라고 손 내민 거다? 백정기가 때리려고 드니까 무서워서 반사적으로.”

“…….”

“이건 거짓말도 아니야. 앞에서 주먹 치켜드는데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딨어? 누구나 반사적으로 방어자세 취해. 단지 넌 방어하려다가 내민 손이었는데 술에 꼴은 놈이 알아서 자빠진 거고. 오케이?”

“알았어.”

정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석찬은 서주환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얼굴 안 때려서 다행이다. 사람 좀 많이 패봤음? 티 나지 않게 골라 패네. 후덜덜.”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게 어찌나 꼴 뵈기 싫던지. 서주환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야, 많이 패긴 무슨. 나는 맞는 쪽이었어.”

물론 같이 때리긴 했지만, 한 대 칠 때 서너 대씩 돌려받았으니 굳이 따지자면 맞는 입장이었다. 서주환이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자 정하연과 이석찬의 얼굴이 요상하게 변했다.

“네가?”

“구라 즐.”

“와나 돌겠네. 모쏠에 이어 왕따 출신인 것도 내 입으로 증명해야 돼?”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리자 두 사람이 낄낄깔깔 폭소했다. 서주환은 뚱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게… 친구?’

견원지간처럼 싸워대더니 놀려먹을 때는 남매처럼 합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 어찌나 얄미운지.

서주환은 한숨을 길게 뱉고선 이석찬을 불렀다.

“야, 석찬아.”

“헉. 나도 때릴 거임? 무서워!”

짐짓 양손으로 제 어깨를 감싸며 가녀린 자세를 취한다. 그 모습을 본 서주환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을 되삼키며 물었다.

“후우. 그게 아니라 왜 우리가 먼저 신고할 생각은 안 하냐고.”

“…어?”

“그렇잖아. 말 맞추고 자시고 백정기 새끼 성추행으로 신고해버린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끝나는 거 아니냐? 왜 그 새끼가 신고할 걸 전제로 이야기해?”

폭력 건보다도 타격이 큰 게 성범죄다. 대한민국은 특히 성과 관련해선 여자에게 유리한 나라였다. 특히 이번 사건은 명백히 백정기의 잘못이었고, 증인까지 다수 있었으니 이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이석찬은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당사자인 정하연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음. 자세히 말하긴 좀 그렇고, 진짜 신고까지 하게 되면 좀 귀찮아져서.”

확실히 신고하게 되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생기긴 한다. 하지만 귀찮다고 그냥 넘어가면 훗날 더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한 번 귀찮고 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석찬이 그게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법적인 절차가 귀찮다는 게 아니야. 신고하고 나서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안 되거든. 정하연 쟤 보통 곤란해지는 게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고.”

“부모님이 걱정 하실까봐 그래?”

“틀린 말은 아닌데… 자세히 말하긴 좀 그러네. 어쨌든 재수 없으면 나는 몰라도 쟤는 휴학, 아니 자퇴까지 갈 수도 있어.”

“뭐? 진짜?”

정하연을 돌아보며 묻자 그녀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퇴까진 좀 오버지만… 여튼 나도 별로 알리고 싶진 않아.”

서주환은 두 사람을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데 캐물어보기도 뭐했다. 그냥 부모님이 극성이려니 해야지.

“알았어. 대신 뒤처리는 확실하게 하자. 진짜 신고는 안 해도 경고는 할 수 있잖아.”

이석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흐흐.”

뭘 어떻게 해결한다는 건지. 서주환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

셋이서 얘기가 끝난 뒤.

2학년 학생회와 부과대인 민혜영이 따로 찾아와서 사과를 표했다.

“죄송해요. 우리가 이런 일 안 생기도록 해야 했는데….”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에요. 술 먹고 난리친 놈이 이상한 거지.”

정하연은 손사래를 치며 사과를 받아넘겼다. 2학년이라고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알았겠는가. 대신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보다 이제부터 다른 1학년 애들한테 신경 좀 더 써줘요. 사실 백정기 때문에 2학년을 불편해하는 애들이 좀 있었거든요.”

“아… 그랬어요?”

“응. 지금 보니까 알겠는데, 우리 학과 별로 선후배 간 군기 같은 거 없죠?”

“네? 그야 당연하죠. 우리가 뭐 체육과나 항공과도 아니고.”

“그런데 백정기 걔가 우리 개강도 전부터 단톡에서 계속 선후배 간에 어쩌고 했었거든요. 그거 때문에 1학년들이 2학년을 좀 어려워해요.”

그 말에 학생회 인원들의 입이 벌어졌다. 다만 부과대 민혜영과 엠티 내내 사회자를 봐온 도유이만이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도유이가 혀를 차며 욕설을 내뱉는다.

“그 미친놈 진짜… 좆같은 게 동기들한테는 나이 타령하더니 후배들한테는 학번 타령을? 미친 새끼.”

한바탕 씹어뱉고선 옆을 홱 돌아본다. 그녀가 학생회 인원들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야, 내가 보기에는 니들도 문제야. 너희 또 귀찮다고 일 대충했지? 오늘 게임 몇 개는 내가 즉석에서 한 거 알아? 안 봐도 뻔해. 백정기 그 병신 이용해먹기 좋다고 적당히 모르는 척 했겠지.”

“유, 유이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뭐. 내가 한 말 중에 틀린 거 있어? 너희 엠티 전에도 혜영이 말고는 일하는 애 거의 없더라? 혜영이가 부과대지 학생회냐?”

“…….”

“이번까지만 도와달라고 해서 해줬으면 똑바로 해야 될 거 아니야! 너희 진짜 각오해. 돌아가서 학생회 내역도 다 까볼 거니까. 혹시 회비로 장난질 쳤으면 그냥은 안 넘어가.”

“아, 아니야! 우리 그런 거 안 했어! 다 보여줄 수 있어!”

“흥. 그거야 보면 알 일이고.”

도유이는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한 차례 폭풍처럼 몰아친 그녀는 이내 정하연을 돌아봤다.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그녀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한다.

“다시 한 번 죄송해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그리고 저기….”

“어?”

“하연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아까 진짜 멋있었어요.”

그리 말하며 주먹을 허공에 붕붕 휘두르는 도유이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주환이 헛웃음을 흘렸다.

‘2학년에 하연이 같은 애가 또 있었네. 아니, 하연이보다 센가?’

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선 MC를 볼 때는 아저씨 같은 멘트를 흘리더니, 화가 나니까 욕설을 아주 찰지게 내뱉는다. 인상만 다르다 뿐이지 정하연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법했다.

정하연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내 악수를 한 상태에서 작게 손을 흔든 그녀가 말한다.

“그럼. 나도 유이 너 마음에 든다. 친하게 지내자.”

“좋아요, 언니!”

의자매를 맺기라도 한 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답하는 도유이다.

한편 둘을 바라보던 서주환은 생각을 정정했다.

‘하연이가 더 세네.’

올라간 도유이의 입꼬리가 어색했다. 조금 아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하연은 별 생각 없이 악수를 한 것 같은데… 전직 유도부의 악력은 보통을 넘었다.

*

1, 2학년은 물론 얼마 없는 3학년을 통틀어도 백정기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 그와 친하게 지내는 듯했던 여자들마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욕을 하기 바빴다. 가식으로 쌓은 관계는 백정기가 기절하듯 잠든 사이 빠르게 무너졌다.

서주환은 정리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흡연장에 가기 위해서였다. 일단락되고 나니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적당히 했으면 넘어갔을 텐데.’

백정기를 말함이다. 회귀 전부터 마음에 드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싸울 생각까지는 없었다. 약간의 꼰대짓 정도야 그에게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와 주변 사람들에게만 피해 주지 않는다면, 백정기가 무얼 하든 알 바 아니었다. 서주환은 스스로가 꽤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정기는 결국 선을 넘었다. 물론 서주환이 의도적으로 먹인 술 때문이었지만, 겨우 술 좀 마셨다고 드러날 인성이라면 언제고 오늘 같은 날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학기 초에 빨리 해결을 본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1학년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애들 추억만 다 망쳤네.”

분명 엠티는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마지막까지 즐거운 기억이 될 수 있었다. 한데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마무리가 더러워졌다.

씁쓸한 기분에 연신 담배가 당긴다. 그는 두 개비 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막 불을 붙였을 때, 누군가 근처로 다가왔다.

“주환아, 나도 한 대만 줄래?”

“…안 피는 거 아니었어?”

정하연이었다. 그녀가 픽 웃으며 한숨 쉬듯 말한다.

“성격 다 드러났는데 뭐 어때? 이제 눈치 보는 거 그만하려고.”

“이야.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잘 됐네. 자, 여기.”

서주환은 라이터와 함께 담배 한 개비를 넘겼다.

“땡큐.”

정하연은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받았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다. 서주환에게 이처럼 담배와 라이터를 받을 때면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제 담배도 그냥 피고 다닐 생각이었으니 앞으로는 이럴 일이 없을 테지.

찰칵찰칵.

“응? 불 안 나오는데?”

불똥만 몇 번 튀기더니 그마저도 꺼졌다. 가스가 다 닳은 듯했다.

“안 나와? 이리 줘봐.”

“푸흐. 네가 한다고 나와?”

“씁. 기름 다 떨어졌나 보네. 어쩌냐. 이거 하나뿐인데. 석찬이한테라도 빌려 올래?”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하연은 고개를 저었다.

“에이, 됐어. 주환아, 나 봐봐.”

“엉?”

“가만히 있어.”

정하연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대로 담배 끄트머리를 맞대고 스윽- 빨아들이자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옮겨 붙었다.

후우-

불씨를 가져간 정하연이 담배 연기를 길게 흘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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