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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페티시가 보여-60화 (60/501)

서주환은 옛 생각을 하며 정하연 쪽을 바라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가 하더니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일그러지는 얼굴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회귀 전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읽은 표정. 엮이고 싶지 않아하는 기색이었다.

‘왜 저러지?’

알 수 없는 행동에 서주환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한 마디도 안 나눠봤는데 대뜸 저런 표정이라니. 그가 아는 정하연과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이번엔 친해지고 싶은데.’

정하연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빚이라기보다 고마움이었다. 원치도 않는 과대를 하느라 힘들어 했을 적 그녀에게 여러 번 도움을 받았었다.

별 거 아닌 말 몇 마디였고, 동정에서 비롯된 호의였을 터다. 하지만 당시 불행과 트라우마로 힘들어하고 있던 그에게는 꽤나 강렬한 기억이었다.

‘이번에는 임시 과대가 바뀌었네.’

그가 입학식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서주환은 입학식에서 학번이 제일 높다는 이유로 조교에게 지목당해 임시과대를 맡았다. 그대로 정식과대가 되어 고생을 했고, 2학기에는 정하연이 과대에 자원하여 과대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본래 과대는 1년간 수행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정하연 덕분에 짐을 일찍 내려놓게 되었었다. 그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었다.

‘나 때문에 지원한 것 같았는데.’

미안한 마음에 따로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자신 때문에 과대를 지원한 것이냐고.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경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석찬의 투덜거림이었다.

“으으. 일체형 책걸상은 대체 누가 만든 거야?”

“푸흐.”

“웃어? 야, 이거 웃을 일 아니야. 앞으로 4년간 이딴 걸 써야 된다는 소리라고. 젠장.”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된 어조로 말하는 이석찬이다. 서주환은 그 모습에 낄길 웃음을 흘렸지만 내심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일체형 책걸상은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으니. 누가 개발하고 적용한 건지 눈앞에 있다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주고 싶었다.

이석찬이 팔꿈치로 그를 툭툭 건들며 말했다.

“야, 주환아. 오늘 수업 끝나고 당구 콜?”

“형이라고 불러봐.”

“…진짜 그러기냐?”

“푸흐흐. 농담이야.”

어차피 친구처럼 지낼 생각이었다. 딱히 형 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나 당구 쳐본 적 없는데.”

“어, 정말?”

이석찬이 눈을 끔뻑이며 반문했다.

“이상해?”

“아니, 이상한 건 아니지. 당구 안 쳐본 애들 많을 걸? 그런데 너는 많이 쳐봤을 줄 알았어.”

“왜?”

“나랑 같은 과인줄 알았거든.”

당연히 학과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클럽에서 휴지 뿌리고 놀 거 같은 타입?”

“너 그러고 노냐?”

“어. 개꿀잼임. 나중에 같이 츄라이?”

“…콜.”

어떻게 노는 건지 좀 궁금했다.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교수가 들어왔다.

나이가 60쯤 되어 보이는 대머리 교수. 놀랍게도 저 얼굴에 40후반이었으며 현재 출콘과 학과장이었다.

대머리 교수가 안경을 슥 올리며 말했다.

“허허. 첫날이라 그런지 다들 조용하구먼. 계속 이러면 좋을 텐데 말이야.”

모든 교수들의 바람이지 않을까. 현재 강의실은 그와 이석찬을 제외하면 묵직한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안 가 깨질 침묵이었다. 친해지면 교수가 있건 없건 도떼기시장보다 시끄러워지겠지.

교수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직 전자출결이 도입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출석을 부르는 교수가 많았다.

“모두 왔군. 흠, 첫날이니까 자기소개를 할까?”

“아아~.”

별로 하기 싫은지 꽤 다수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석찬도 뭔 자기소개냐는 듯 귀찮은 얼굴이었다.

“싫으면 수업하고.”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동기들과 꼭 친해지고 싶습니다!”

교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석찬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공부 엄청 싫어했지. 회귀 전 학교를 다니는 내내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 푸하하하!

이석찬의 행동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교수가 풀어진 분위기에 웃는 얼굴로 말했다.

“활기찬 학생이 들어왔구먼. 자네가 과대인가?”

“아뇨! 과대는 저기 있습니다!”

이석찬이 한쪽을 가리켰다. 교수를 비롯한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도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는데, 정하연이 무척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과대군. 이름이 뭔가?”

“정하연이에요, 교수님. 그리고 저… 과대는 아니고 임시 과대에요.”

“임시?”

“네. 어쩌다보니까….”

“일단 알겠네. 자기소개는 출석 번호 순으로 하지. 어디 보자. 서주환 학생?”

“네?”

서주환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학번 상 4번이었다.

“자네가 일 번, 음? 자네 복…”

“교, 교수님! 제자리에서 소개하면 되나요? 아니면 나가서?”

“아. 그냥 거기 일어서서 소개하게.”

서주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그의 번호는 사 번이지만 학번이 빠른 복학생이라 출석부 맨 앞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초장부터 화석인 거 들킬뻔했네.’

어차피 밝혀지긴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미룰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신입생들보다 세 살이나 많은데 혼자 학번까지 높다? 친해지는데 걸림돌이 될 것 같았다.

이석찬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일 번은 난데…?”

“쉿. 나중에 설명해줄게.”

서주환은 이석찬에게 눈치를 주고 강의실을 둘러봤다.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뭐라고 자기소개 하는 게 떨리는지 모르겠다. 한 동안 가라앉아있던 아싸 기질이 나오는 듯했다.

“크흠. 안녕하세요. 서주환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말하려니까 마땅히 할 말이 없네요. 제 취미는 독서랑 게임입니다. 특기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단 시간에 여러 가지 재능을 얻다보니 특기라고 할 만한 게 생각보다 많았다.

글, 박투, 춤, 게임 등등.

“…특기는 게임이랑 춤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순간적으로 고민하다가 무난한 걸 말했다. 내뱉고 나니까 아예 말 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특기까지 말 할 필요는 없었는데.

- 와아아!

다행히 짝짝짝 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휴. 괜히 긴장했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모습이 바뀌어서 그런지 뚱뚱했던 이전과 달리 제법 반응이 좋았다. 작게 잘생겼다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다음은 이석찬의 차례였다. 이석찬이 일어나서 씩 웃는 얼굴로 말한다.

“안녕하세요, 이석찬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 둘. 취미는 축구, 당구, 볼링. 그 외에 구기 종목 다 좋아합니다. 게임도 좋아하고. 제일 좋아하는 건 친구들이랑 술 마시면서 노는 거. 나중에 다 같이 술 한 잔 해요. 아, 저한테 반말해도 됩니다. 동기인데 말 놓고 지내요. 혹시 질문 있는 사람?”

이석찬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질문 할 사람은 손을 들으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전생이랑 똑같다. 당연한 건가.

몇몇 남자와 여자들이 손을 들었다. 화자가 유쾌하게 분위기를 띄우니 질문도 여럿이었다.

“무슨 게임해요?”

“지금은 리그오브챔피언. 조만간 싸이킥워치 오베하면 그거 해보려고. 같이 할래?”

“지금 여친 있어요?”

“없어. 예쁜 애 있으면 소개 시켜줘.”

“형, 축구 잘해요?”

“내가 황금 발이다. 나중에 한 게임 하자. 그리고 말 놓으래도?”

세네 명 정도 들었던 손이 점점 더 늘어난다. 질문 다 받으면 수업 끝나게 생겼다. 마침 교수가 이석찬의 소개를 끊고 다음 사람으로 넘겼다.

“안녕하세요, 주하나라고 해요.”

“윤보미입니다….”

“이수현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이석찬에 비해 소개가 심플했다. 이름, 나이, 출신고교 정도.

서주환은 소개를 귀 기울여 들었다. 잘 들어놨다가 나중에 친해지는 데 써먹을 생각이었다. 동생이고 친구고 연을 많이 만들고 싶었다.

임시 과대인 정하연도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정하연이라고 합니다. 저번 입학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스물… 셋이고요. 원래는 일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대학 가고 싶은 마음에 수능 쳐서 들어왔어요. 잘 부탁드려요.”

이석찬에게 했던 것과 달리 조신한 말투로 소개하는 정하연.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인상도 착해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

‘힘들겠네.’

서주환은 턱을 괴고 정하연을 보며 픽 웃었다. 그는 정하연의 성격을 조금이지만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남들 앞에서는 얌전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당찬 성격이었다.

옆에 있던 이석찬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외쳤다.

“와아! 누나, 과대 꼭 하세요! 어울려요!”

“과대는 좀….”

정하연이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이석찬은 그 모습이 재밌는지 낄낄거렸다.

‘둘이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라고 했었지?’

계속해서 소개가 이어지고 마지막 순번이 됐다.

180후반의 엄청난 덩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강호 만큼은 아니지만 어깨가 떡 벌어져서 위압감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장덕훈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 취미는 운동입니다. 좌우명은 성실, 끈기, 노력입니다.”

군대에 온 것처럼 딱딱한 말투다. 그리고 내용은 더 딱딱했다.

이석찬이 중얼거렸다.

“와우. 엄청 고지식해 보인다.”

“아닐 걸?”

“형 쟤 알아요?”

“어? 아니, 그냥 느낌이.”

장덕훈과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좋은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있었다. 말투처럼 다소 딱딱한 면이 있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예의를 차렸다. 회귀 전의 그에게도 그랬다. 하지만 또 마냥 딱딱하기만 인물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장덕훈이 알아서 말해주었다.

“취미는 웹툰, 웹소설, 만화, 애니 보는 겁니다.”

장덕훈은 진성 오타쿠였다.

*

OT주간에는 대부분의 수업이 자기소개 정도로 끝난다.

오늘 수업은 오전, 오후 두 개였지만 교수들도 OT기간은 빠르게 끝내고 싶어 했다. 한 과목에 한 시간씩 오전에 모두 끝마쳤다.

“우리는 오늘 수업 다 한 겁니다. 알겠죠?”

물론 이런 말을 남기긴 했지만 어차피 학생들도 그게 더 좋으니 상관없었다. 인생은 융통성 있게 살아야 한다.

수업이 끝나자 이석찬이 당장에라도 달려나갈 기세로 말했다.

“주환아, 당구 한 게임 치러 가자. 덕훈이도 불러서.”

“어. 안 그래도 남자 수 적은 데 친해지면 좋지.”

“그치? 야, 덕훈아! 당구 한 게임 하자! 모른다고? 형이 알려줄게.”

이석찬이 가방을 챙기고 있는 남자들을 붙잡았다. 출콘과 16학번에는 남자가 일곱 명 밖에 없었다. 서주환을 포함해도 고작해야 여덟 명. 그나마도 A,B반이 나뉘어 있었는데, 그가 속한 A반에는 나와 이석찬, 장덕훈 세 명이 끝이었다.

그렇게 다들 짐을 싸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모두 주목!”

앞문으로 들어 온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강의실 안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검정색 과잠을 입고 있는 남자가 시선이 모인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모두 반갑다. 나는 2학년 과대 백정기라고 한다. 모두 입학식 때 한 번 봤을 거다.”

그리 말하며 주위를 한 번 쓸어본다.

자신을 백정기라고 소개한 남자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아, 못 본 사람도 있던가? 어디 보자.”

짐짓 모르는 척하지만 일부러 지적하려고 명단을 적어온 듯 품에서 종이를 꺼낸다.

백정기가 종이에 적은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장덕훈, 주하나.”

이석찬에게 붙들려 있던 장덕훈이 큰 덩치를 움찔한다. 주하나라 불린 여학생도 제 이름이 불리자 깜짝 놀라서 백정기를 바라봤다.

백정기는 두 사람을 힐끗 보더니 마저 이름을 불렀다.

“서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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