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개강, 복학
해가 밝았다.
3월2일은 학생들에게 제법 특별한 날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특별함이 귀찮고 짜증나는 종류일 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대와 설렘일 수도 있었다.
“드디어 복학이네.”
서주환은 기대와 설렘을 느끼는 쪽이었다. 무려 십 년 만에 가는 학교였으니 설렐만도 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불행하고 볼품없던 회귀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으니.
“오늘의 운세를 점 쳐볼까.”
점은 아이템 뽑기로 볼 생각이었다.
띠링!
[1,000LP를 사용하여 아이템을 뽑습니다.]
[축복, 『몽마신의 축복(x14)』이 지급되었습니다.]
지급된 아이템을 본 서주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축복이 아이템 뽑기에서도 나오는 거였구나!
“나이스!”
눈을 뜨자마자 운수가 대통이었다. 벌써부터 조짐이 좋았다.
*
스무 살 때 서주환이 지원한 학과는 ‘출판콘텐츠학과’였다. 학생들은 줄여서 출콘과라 불렀다.
출콘과를 나오면 광고업계나 출판사, 디자인 쪽으로 취업을 하게 된다. 그 외의 길 몇 가지 있긴 한데, 다른 방향으로 갈 거라면 출콘과보다 타과에 들어가는 게 맞았다. 아니면 아예 대학에 오지 말고 관련 자격증을 따거나.
서주환이 출콘과에 지원한 이유는 단순히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1지망으로 문예창작과를 노렸으나 백일장에서 번번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소설가를 포기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졸업 후에는 기껏 취업한 출판사를 때려치우고전업 웹소설 작가 생활을 했지만 말이다.
‘지금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회귀 후 서주환은 빠르게 글을 쓰기 시작했고 벌써 나름대로 성공을 이루었다. 아직 정산 전이었지만 쌓인 금액이 천을 우습게 넘겼다. 이제 막 20대 중반이 되었음에 연봉도 아닌 월봉이 그랬다. 비트코인까지 생각하면 더 이상 돈 걱정이 무의미했다.
“음음~.”
서주환은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오늘부터 시작 될 대학 생활이 기대되었다.
그가 대학에 온 건 어디까지나 지난 생에 경험해보지 못한 캠퍼스 라이프를 위해서다. 그는 항상 혼자 다녔던 게 한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번 생은 즐거운 대학 생활을 보내고 싶었다.
“크으. 다들 풋풋하다.”
등교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흐뭇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저들도 첫 대학 등교에 설레는 마음이겠지. 회귀 전의 그는 트라우마 때문에 음울한분위기만 풍겼었는데.
서주환은 등교하는 대학생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한 눈에 봐도 신입생임을 알 수 있는 풋풋함이 간질간질한 기분을 준다. 하지만 그의 기분과 달리 등교하는 학생들은 곧 헥헥 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너무 익숙한 광경이라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새삼 높긴 하다.”
출콘과를 비롯한 몇몇 학과는 도서관 건물에 있었는데, 하필도서관은 학교에서 가장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대안대학교는 경사가 가파르기로 유명했다. 그도 지난 생에 이 언덕배기를 죽을 둥 살 둥 올랐었다. 물론 지금은 땀 한 방울 안 나지만.
그는 힘들게 언덕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조금만 힘내라, 얘들아. 2학기에는 에스컬레이터 생겨.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으아. 힘들어죽겠네!”
속으로 응원을 건네는데, 앞에서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얼마나 걸었다고 힘들어? 맨날 축구한다고 쏘다니더니 체력은 쥐뿔도없네.”
목소리의 주인은 한 쌍의 남녀였다. 헥헥 대며 걷는 과장된 몸짓의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 타박을 주고 있는 여자. 남자가 입술을 쭉 빼더니 투덜거렸다.
“내가 정상이고 네가 비정상이야. 이 괴물 같은 근육녀. 네 다리가 나보다 훨씬 두꺼울 걸?”
“뭐야? 여기서 한 번 굴러볼래?”
여자가 인상을 팍 쓰며 뒤를 돌아본다.
남자의 말과 달리 여자는 근육녀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 얼굴과 길쭉하니 쭉 뻗은 팔다리가 모델 같았다. 다리도 전혀 굵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다만 여자의 얼굴은 뭔가 이질적이었다. 성형을 잘못한 건지, 아니면 화장을 이상하게 한 건지 서주환의 안목으로는 구분이 어려웠다. 다만 눈꼬리가 내려가 있었는데도 인상을 쓰니 무척 사나워 보였다. 왕년에껌 좀 씹었을 것 같았다.
‘아, 저 여자 분명…!’
기억에 있었다. 회귀 전에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가 완전히 기억을 되살리기도 전에, 남자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어어! 야, 이미지 관리! 여기 학과 가는 길이다? 같은 학과생 많을 걸? 얌전하게 지낸다면서?”
“…넌 진짜 나중에 보자. 그리고 누나라고 불러.”
“흐흐. 예엡, 과대 누님.”
“야, 과대 아니고 임시 과대다. 나 과대 절대 안 할 거거든?”
“노노. 포기해. 내가 봤을 때 넌 이미 과대야.”
“죽는다, 진짜!”
“으아악! 깡패가 사람 잡는다!”
남자는 헉헉 대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빠르게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여자가 씩씩 거리며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쫓아간다. 잠시 후 고통 섞인 비명이 들려오는 걸 보아 결국 잡힌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기운들도 좋다.’
청춘이다, 청춘.
…서주환은 어쩐지 학교에 오자마자 늙은 기분이 들었다. 사고방식을 좀 바꿔야 할 텐데.
루시가 상념을 깨웠다.
[주인님, 10분 남았습니다.]
“헉. 벌써?”
느긋하게 사람 구경이나하면서 올라왔더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는 걸음을 빨리 했다. 일찍 나오길 망정이지 첫 날부터 지각할 뻔했다.
*
다행히 5분 전에 도착했다.
서주환은 학과로 들어가기 전 흡연장으로 향했다. 막상 들어가려 하니 괜히 긴장돼서 진정이 필요했다.
‘심신의 안정을 찾을 땐 역시 니코틴이지.’
전형적인 꼴초의 생각을 하며 걷는데, 흡연장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흐흐. 난 한 대 피고 갈 테니까 먼저 가라~.”
“씨이.”
“꼬우세요? 꼬우면 너도 한 대 피시던가.”
“이 개… 진짜… 후우.”
조금 전에 봤던 남자와 여자였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낄낄댔고 여자는 그를 노려보다가 훽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갔다.
‘역시 맞나 보네.’
긴가민가했는데 여기에 있는 걸 보니 확실했다. 회귀 전에 본 적 있는 얼굴들이었다. 그와 같은 학과, 같은 반 학생이다.
치익.
서주환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곁눈질로 남자를 살폈다.
170 후반 정도 되는 키에 갈색 곱슬머리. 은색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게 좀 양아치처럼 보인다. 귀걸이가 아니라 피어싱인가?
[친구였나요?]
‘글쎄? 애매하네.’
남자는 전생에 먼저 다가와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소심하고 음울한 그의 태도에 친해지진 못 했지만.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지.’
훤칠한 생김새도 그렇고 성격 자체가 인싸라 부르는 인종이었다. 소문에는 학교 여자들을 그렇게 후리고 다녔다고.
[경쟁자였군요.]
“뭐? 푸흐.”
루시의 말에 서주환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학교에 온 게 아니었다. 청춘과 낭만이 가득한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러 온 거지. 물론 캠퍼스 라이프에 CC는 빠질 수 없고 만약 연애를 하면 자연히 섹스도 하겠지만.
어쨌든 여자 때문에 복학을 한 게 아니었다.
“경쟁자는 무슨.”
“응? 저한테 말한 거예요?”
그의 혼잣말에 앞에 있던 남자가 돌아보며물었다. 그는 조금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아뇨. 혼잣말이에요.”
“아, 그래요? 그런데 이쪽 흡연장 이용하시는 거 보면 저랑 같은 학과인가 봐요.”
이 흡연장에서 건물로 들어가면 바로 2층에 출판콘텐츠학과가 나온다. 그래서 주로 출콘과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흡연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도 남자를 같은 학과라고 생각한 거고.
서주환은 확인 차 물었다.
“출콘과 맞으시죠?”
“네. 그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잠시 주춤하더니 어색하게 몸을 반쯤 숙이며 인사했다.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남자가 몸을 숙인 채로 말했다.
“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16학번 이석찬이라고 합니다."
“네? 이, 일단 일어나세요. 선배라니 갑자기?”
“어? 선배님 아니세요?”
일단 그가 13학번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선배가 맞다. 하지만 그는 입학 후 바로 군대를 가서 여전히 1학년이었고, 별로 선배 행세를 할 생각도 없었다. 친구처럼 녹아들 생각인데 선배는 무슨.
서주환은 담배를 비벼 끄고 이석찬을 일으켜 세웠다.
“좀 복잡하긴 한데, 일단 일어나세요. 저 1학년이에요.”
“…정말요?”
“네.”
“…어우, 쪽팔려. 진작 말해주지. 진짜 1학년맞죠? 입학식 때 못 봤던 것 같은데.”
“저 입학식 안 나왔어요.”
“아하, 그래서 못 봤구나. 이름이어떻게 돼요? 전 말했다시피 이석찬이에요.”
이석찬이 씩 웃는 얼굴로 말했다. 웃는 게 시원시원해서 양아치 같은 인상이 옅어졌다.
“전 서주환이에요.”
“앞으로 같이 지낼 건데 말 놓는 게 어때요?”
“좋아요. 아니, 좋아. 편하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니 이석찬이 갑자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 그럼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라, 주환아.”
“…뭐?”
“나 스물 둘이거든. 좀 늦게 입학했어. 아, 말은 놔도 돼. 같은 학번인데 친하게 지내야지.”
“하….”
나이는 친해진 다음 밝히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현재 나이보다도 어린 동생한테 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서주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같은 학번인데 친하게 지내자, 야.”
“어? 음… 주환아, 반말은 괜찮은데 야는 좀 아니지 않냐? 이름 부르는 것도 아니고.”
이석찬이 조금 기분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석찬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나스물 셋이니까 형이라고 불러라, 석찬아.”
“…어?”
“아, 반말해도 되니까 편하게 말하고.”
이석찬이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잘 지내보자, 석찬아.
*
이석찬은 된통 당했다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귀찮게 엉겨 붙었다.
“주환아. 어? 진짜라니까?”
“짜샤. 이름 부르는 건 좀 그렇지. 반말은 해도 되니까 형이라고 불러.”
본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이석찬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나 생일 1월임. 솔직히 이 정도면 친구 먹어도 되는 거 아니냐? 빠른이라니까.”
“어허. 네가 그 족보를 꼬는 놈이구나. 나는 빠른 취급 안 한다.”
“우리 친하게 지내기로 했잖아.”
“그럼그럼. 난 벌써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치? 솔직히 친하게 지내면 다 친구지.”
“그럼. 친구지.”
“그럼 형이라고 안 불러도 되지?”
“어허! 으딜 동생이! 내가 인마. 생일이 3월이에요. 네가 1월생이어도 1년을 거의 꽉 채운단 말이지.”
“아놔!”
“라떼는 말이야, 인마. 응? 새겨들어.”
“아오!”
이석찬이 귀를 막고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서주환은 낄낄거리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고 있으니 아까 봤던 여자가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름이… 정하연이었지?’
이석찬처럼 회귀 전 그에게 먼저 다가와준 사람이었고, 개인적으로 마음의 빚이 남은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