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스타일 완성(2) (58/501)



〈 58화 〉스타일 완성(2)

서주환은 재잘재잘 떠드는 세 여자를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시대상에 어울리지 않는 고리타분한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몸소 겪어보니 마냥 틀린 소리도 아닌  같았다.

서주환은 유일한 자신의 편을 불렀다.

‘루시야.’
[네, 주인님.]
‘적응해야겠지?’
[네. 주인님은 별로라고 했지만 윤서라의 패션 감각은 비상한 수준입니다. 단골이  거라면 친해지는 게 좋겠죠.]
‘저 여자 이름이 윤서라야?’
[네. 상태창을 열까요?]
서주환이 접촉한 여자의 정보는 시스템 도우미인 루시도 열람이 가능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상태창을 띄웠다.

<윤서라>
성별: 여성
나이: 27살
키: 167cm
몸무게: 53kg
호감도: C
현재 성욕: D+
페티시: Salirophilia(中), Doraphilia(中), Transvestophilia(中)
보유 재능: 코디네이트(B+/A+), 디자인(C/A), 충동(B/B+)

과연 루시의 말대로 윤서라의 재능은 상당했다. 높은 잠재등급의 ‘코디네이트’ 재능. 현재 등급도 이미 프로수준을 넘겼다. 옷을 잘 추천해주기로 유명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처음 봤는데 호감도가 꽤 높네? 페로몬 때문인가?’
[페로몬 덕분도있지만, 주인님의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바로 한 단계 상승했어요.]
‘아. 옷 잘 입는 남자가 취향인가 보네.’
[그녀의 페티시와 연관이 있답니다. 설명해드릴게요.]

윤서라의 페티시는 무려 세 개였다. 일전에 봤던 살인범을 제외하면,  개의 페티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세 개 모두 복장 페티시인 Clothing fetish(클로딩 페티시)의 하위분류입니다.]

[먼저Salirophilia(사리로 필리아)는 다소 지저분하고 단정치 못한 모습에서 흥분을 느끼는 페티시입니다.]

뭐 그딴 페티시가. 서주환은 자신이 잘못 이해한 건가 되물었다.

‘…안 씻고 더러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야?’
[아니요. 의류와 관련지어 생각하시면 됩니다. 찢어지거나 구겨진 옷차림을 말하는 거죠. 대표적으로 찢청룩이 있습니다.]
‘아아. 이해했어.’

윤서라가 입은 청바지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거나 찢어져 있었다. 그녀의 취향이 반영 됐다는 거겠지.

루시의 말이 이어졌다.

[Doraphilia(도라필리아)는 가죽 제품에 집착하는 페티시즘이에요. 윤서라가 입은 가죽 재킷 같은 의류를 말합니다. 개인에 따라 가죽 채찍도 포함됩니다.]

[Transvestophilia(트랜스 베스트 필리아)는 이성의 옷을 입은 파트너에게 성적으로 흥분하는 페티시입니다. 반대로 본인이 이성의 옷을 좋아하기도 하지요. 간호사복, 메이드복, 군복, 경찰복 등의 제복류, 가죽옷, 슈트, 오피스룩까지. 종류가 다양해서 이 페티시를 가진 사람 중 적지 않은 인원이 코스프레에 관심을 보인답니다.]

‘코스프레?’

그 단어에 회귀 전 들었던 한 가지 소문이 떠올랐다. 바로 윤서라가 유명한 코스어(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라는 사실이다. 스타일완성이 개업하고 한참 뒤에 난 소문인데, 어디까지나 소문으로 들은 것이기에 사실 여부는 정확하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상태창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  윤서라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저어… 손님?”
“아, 네.”
“괜찮으실까요? 아, 절대 강요하는 건 아니고 싫으시면 부담 없이 거절해도 돼요.”

윤서라는 눈치를 보며 손을 내젓는 등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당연하게도 서주환은 그녀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 제가 말을 못 들어서요. 설명 좀 해주실래요?”

그가 상태창에 정신을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간 듯했다.

서주환은 그녀의 뒤에 있는 여동생들을 보았다.

왜인지 윤서라의 뒤에 선 한수아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서주희는 숫제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중이었다.

“오, 오빠 미안. 이 분이 수아 팬이라고 하셔서 그만… 절대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거절해도 돼. 응?”
“환이 오빠 미안해!”

일단 이야기를 들었다.

윤서라는 위튜브 시청이 취미였는데, 최근 한수아의 영상을 본 것은 물론 팬을 자처하는 구독자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한수아에게 광고를 제안했다.

광고 제안은 이러했다.

윤서라는 서주환을 포함한 세 명의 옷을 벌씩 코디해준다.
위튜브에 코디해준 모습을 업로드하고 가게를 홍보해주는 조건으로 옷값은 받지 않는다.

일견하기에 즉석에서 헐값으로 광고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주환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괜찮은데?’

미안하다고 싹싹 빌기에 뭔가 했더니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위튜브의 광고 단가는 당연히 구독자 수에 따라 달라진다. 그 외에도 평균 조회수와 시청 시간, 채널의 성향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었다.

현재 한수아의 위튜브 구독자 수는 3만.
세 벌의 옷은 구독자 수 대비 광고비로 적당했다.

‘아니지. 적당한 수준이 아니라 개이득인 것 같은데.’

구독자 3만이라고 하지만 의류 쪽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게임 채널이었다. 그리고 급격한 성장으로 팬층이 단단하지 않은 걸 감안해야 한다. 뜬금없이 게임이 아닌 패션 관련 영상을 올리면 조회수가 잘 나올지 의문이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윤서라가 손해를 감수하고 팬심을 발휘하는 걸로도 보였다. 상하의 두 벌씩 총 여섯 벌이면 최소로 잡아도 40만 원을 넘었으니.

‘조회수 잘 나오면… 포인트가 얼마나 들어오려나.’

이런 제안이라면 무조건 하는  이득이었다. 다만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윤서라의 의사를 다시 물어봤다.

“애들 위튜브가 게임 채널인 건 알고 계시죠?”
“네, 물론이죠. 싸이킥워치 하시잖아요. 처음에는 너무 달라지셔서 못 알아봤지만 손님이 나오신 것도 봤는걸요.”
“아, 정말요? 싸이킥워치는 아직 클로즈베타 중인데… 게임 좋아하시나 봐요.”
“게임도 좋아하지만 코스… 가 아니라 캐릭터가 너무 예뻐서요. 호호.”

역시 팬심으로 진행하는 광고인 것 같았다.
서주환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애들한테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저야 말로요!”
“편하게 주환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여기 단골 될 것 같거든요. 이 동네 살기도 하고.”
“호호. 주환 씨 잘 부탁드려요!”

*

윤서라는 한수아와 서주희의 코디를 먼저 시작했다.

“언니처럼 섹시한 스타일로 해주세요!”

놀랍게도 서주희가 아닌 한수아의 요청이었다. 덕분에 윤서라가 진땀을 빼는 걸 구경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코디에 자신이 있다지만 149cm의 강아지상인 한수아를 섹시하게 만드는 건 무리였다. 그 정도면 코디가 아니라 마법이라 불러야겠지.

결국 요구를 반려당한 한수아가 울상을 지었다.

“왜  햄보칼수 엄써….”
“섹시는 다음 생에 하자, 수아야.”
“주희 너무해.”

그도 시무룩해진 한수아를 위로했다.

“그래. 어울리는 걸 해야지. 수아야, 살던 대로 살자. 넌 귀여운 게 어울려.”
“살던 대로?  계속 섹시했는데?”
“…….”
“뭐라고 말이라도 해줘.”
“그, 뭐냐, 음. 그래. 유 쏘 섹시 걸.”
“진심이 하나도 없잖아! 환이 오빠가 제일 나빠!”
“…….”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이유는 한수아의 코디가 끝났을 때 알  있었다. 촬영 때문에 조금 오버를 한 거였다.

다음은 서주희가 코디를 받을 차례였다.

옆으로 온 한수아가 카메라 어플을 실행하며 중얼거렸다.

“1cm만  컸어도 섹시한  입는 건데.”
“…….”

149나 150이나.
서주환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되삼켰다.

“이제 주환 씨 차례에요!”

윤서라는 두 사람을 코디할 때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분명 위튜브 주인은 한수아였건만 서주환을 메인으로 삼은 듯했다.

“여기 이것도 입어보세요! 다음은 이거 입고,  다음은….”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아주 작정하고 코디를 한다. 덕분에 서주환은 옷을 다섯 벌이나 갈아입어야 했다. 옷 갈아입히기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서주환은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고서야 윤서라의 마수에서 탈출 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손님은 둘러보는가 하더니 금방 나갔다.

윤서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하다가 서주환을 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주환이 너  입든 태가 살아서 옷 입히는 보람이 있다. 운동 좀 했니?”

코디를 받는 동안 말을 서로 말을 텄다. 친화력이 좋은 여자였다.

“그냥 조금?”
“키만 더 컸으면 모델해도 됐겠다. 미묘하게 색기도있고. 생긴 건  잘생긴 정도인데 참.”

이상하다는 듯 서주환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윤서라.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아직 평범한 수준이구나.’

나름 살도 빠지고 하면서 잘생겨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뛰어난 외모는 아닌 듯했다.다만 『페로몬』 덕분에 눈에 띄는 걸까. B등급의『페로몬』은 이성의 호감을 사는 향기를 발산한다. 향을 맡은 이성은 생리, 흥분 작용이 미미하게 높아지는데, 이게 그를 색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오늘 고마워요, 누나.”
“감사합니다, 언니.”
“위튜브 업로드하면 바로 연락할게요오!”
“응. 또 놀러 와야 돼~.”

윤서라가 아쉽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번호도 교환 했으니  연락 할 일이 있겠지.

‘연락할 필요도 없으려나.’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금방 다시 옷을 사러 올 듯했다.

*

스완을 나온 뒤에는 신발을 사러 갔다. 옷을 자기들 돈으로 사지 않았으니 신발이라도 사야겠다나. 돈이 아쉬운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래도 동생들 마음이 고마웠다.

“가죽 재킷에는 역시 단화 아닐까?”
“갈색? 검정색?”
“때 타니까 검정으로 부탁한다. 관리하기 귀찮아.”
“오빠는 꾸미는데 신경 좀 써라. 기껏 변신 해놓고  그러냐.”
“맞아. 환이 오빠 멋있어졌어. 그런데 머리도 잘라야  것 같은데?”
“그러네?”
“내가 알아서 할게. 제발….”
“잔말 말고 따라오셔!”

고맙기는 개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쇼핑인 걸까. 분명 그의 옷가지를 사는 건데도 두 사람이 더 신나했다. 이 정도면 비싼 돈 내고 실물 사이즈 인형이 된 게 아닐까 싶었다.

미용실로 들어가자 막 일을 끝낸 듯 계산을 하고 있는 미용사가 그를 반겼다. 가명인 ‘신바다’ 명찰을 달고 있는 신하늘이었다.

그를 알아 본 신하늘이 인사했다.

“어머. 주환 씨, 오랜만에오셨네요? 예약한 거 못 봤는데.”

한 번 밖에 본 적 없는데 얼굴은 물론 이름까지 기억한다. 뛰어난 영업 정신에 감탄이 나왔다.

“오늘은 갑자기 오게 돼서요. 다른 분한테맡겨야 할까요?”
“흐응. 저한테 받고 싶으세요?”
“그럼 좋죠.”

신하늘은 재능과 실력이 출중한 미용사다. 언젠가 그에게 맡겼을 때도 평범한 듯하면서 볼수록 어울리는 스타일이 나왔었다.

신하늘은 묘한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원래 방금이 마지막 손님이었는데 주환  까지 받고 퇴근하죠, 뭐.”
“어, 그래도 돼요? 너무 죄송한데.”
“대신 머리 관리  하셨는지 검사할 거니까요.”
“하하….”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신하늘의 페티시가 기억 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 하나의 페티시를 갖고 있었는데, 무려 上+등급의 중증 모발 기호증이었다. 루시의 말에 따르면 모발을 사랑하는 수준이었다.

“어떤 스타일로 해드릴까요?”
“음. 그냥 따로 손질  필요 없도록 해주세요. 깔끔하게.”
“귀찮은  싫어하시는구나?”
“만지는 걸 잘 못해서요.”

그는 패션도 그렇지만 머리 만지는 것도 도무지 할 줄을 몰랐다. 어설프게 만졌다가 안 하느니만 못했으니. 차라리 간단한 스타일이 나았다.

“어머. 머릿결이 전보다 훨씬 좋아지셨네요?”
“미용사님 말 듣고 열심히 관리 했죠.”
“후후. 잘 하셨어요. 제가 보기엔 탈모 증세가 보이던 것도 많이 나아진  같아요.”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템 뽑기에서 나온 『모발~모발 영양제』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얼마  몇 개가 더 나왔으니 앞으로  달은 걱정 없었다.

쏴아아-

이발을 마치고 머리를 감았다. 신하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뒷골과 목덜미를 주물렀다. 손톱으로 살살 긁는  애무라도 하는 듯했다. 절로 다리가 움츠러 들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윽.”
“후후.”

신하늘은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두피 근처에 성감대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머릿결 진짜 좋아졌어요. 제품은 뭐 쓰세요?”
“미용사님이 추천해 주신 걸로 씁니다.”

아이템을 소개하자면 귀찮아진다. 적당히 둘러댔다. 그녀의 손길이   더 귀밑머리와 뒷골을 오가더니 물질로 마무리가 되었다.

[신하늘의 호감도가 C로 상승했습니다.]

아무래도 모발 성애자는 이전보다 좋아진 그의 머릿결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

미용실을 나왔다. 어째 한수아는 뚱한 얼굴이었다. 볼에 바람이 들어갔기에 쿡 눌러서 빼주었다.

한수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환이 오빠. 응?”
“신바다? 그 미용사 언니랑 친해?”
“친하냐고? 갑자기 왜?”
“아무튼.”
“별로 안 친해. 오늘 두 번째 보는 분인데 친하고 자시고 할  있나.”

물론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그에겐 전무한 헤어 스타일링 재능이 탐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신하늘은 상당히 예쁜 편이었다.

‘음. 청바지가 잘 어울렸지.’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한수아가 덥석 손을 잡아왔다. 뭔가 하고 보니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나가며 그를 이끌었다.

“오빠, 저녁먹으러 가자!”

그리 말하며 짧은 다리로 성큼성큼(?) 잘도 걸어나간다. 서주환은 어리둥절하며 따라갔다.

“푸흡! 꺄하하하!”

뭐가 웃긴 건지, 뒤에서 따라오는 서주희가 미친년 마냥 웃어댔다. 웃음소리가 듣기 싫게 방정맞았다.

*

삼겹살을 구워 먹고, 헤어지기 전 카페로 향했다.

“조각 케이크 하나 먹을까?”
“두 개 먹자!”
“…너희 안 배부르냐?”
“디저트 배는 따로 있거든!”
“맞아맞아.”

따로 있기는. 위가 두 개는 된단 말인가. 서주환은 어깨를 으쓱이고 아메리카노 세 잔과 케이크 두 조각으로 메뉴를 결정지었다.

“이건 내가 살게.”
“엥. 우리가 살 건데.”
“됐어.  때 얻어먹어라. 괜히 용돈 부족하다고 부모님한테 조르지 말고.”

고등학생한테 돈 나올 구석이 부모님 지갑 말고 어디 있겠는가. 두 사람이 알바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위튜브와 트릭키TV는 아직 정산 가능한 날짜도 아니었다.

그렇게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주환?”
“어?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담당 편집자인 최미화였다.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짐짓 인상을 썼다.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그거 아직도 포기 안 했어?”
“나쁜 놈.”
“아니, 갑자기 왜 그러냐….”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는 게 당황스러웠다. 그날 있었던 일은 분명 다 푼 걸로 알았는데 이제 와서 쏘아보다니.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감정 조절이  되는 걸까?

그가 당황한 모습을 보이니 최미화가 푸스스 웃으며 눈에서 힘을 풀었다.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야?”
“그거 내가 먼저 물어봤다? 나는 이 근처 사는 거 알잖아.”
“아, 그랬지. 어… 그런데 뒤에  분은? 설마… 여자친구?”

힘 빠졌던 눈에 다시 날카로워 지려고 했다. 서주환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옆에서 한수아가 팔짱을 껴왔다.

“환이 오빠랑 친한 동생이에요. 그런데… 누구세요?”
“어… 친동생이세요?”
“아니요. 오래 알고 지낸 엄청 친한 동생이에요.”
“…아하. 그냥 친한 동생 분?”
“그냥이 아니라… 아야!”

한수아의 머리에 꿀밤을 먹여주었다. 머리를 잡고 억울한  바라보는 한수아. 순간 어린애를 괴롭히는  같아서 양심이 아렸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했다.

서주환은 인상을 쓰고 말했다.

“인마. 오빠 편집자님한테 무례하게.”
“…편집자님?”
“글 쓴다고 했잖아. 담당 편집자님이셔. 빨리 사과드려.”

한수아는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냥 아는 동생인 한수아라고 해요.”
“아, 아뇨. 저도요. 만나서 반가워요.  작가님 편집자 최미화예요.”
“안녕하세요. 저는 친동생 서주희…”
“얘는 무시해도 돼.”
“너무해!”

전혀 안 억울한  발랄한 목소리다. 서주희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 결 나아진 듯했다.

최미화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나 때문에 주문도 못 했네. 줄 밀렸으니까 내가 살게.”
“안 그래도 되는데.”
“괜찮아. 법카거든.”
“…그거 맘대로 써도 돼?”
“우리 회사 작가님한테 커피 좀 대접한다는데  어때서? 그리고 조금 전에 다른 작가님  분 만나서 괜찮아. 일적으로 나온 거거든.”
“다른 작가님? 누구?”
“나중에 알려줄게. 동생 분들 기다리신다.”
“어어. 고맙다. 조심히 들어가고.”
“걱정해주는 척하기는.”

최미화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내 피식 웃은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연락할게.”
“그래.”

최미화를 보낸 후 서주환은 동생들이 미리 자리 잡은 테이블로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서주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문을 열었다.

“오라버니. 진짜  쓰는구나?”
“말투.”
“…응, 오빠. 그런데 저 언니 진짜 편집자야? 나이 별로 많아 보이는데.”
“나보다 한 살 많아.”
“오. 연상. 편집자 언니 예쁘던데… 혹시 사귀어? 안경녀가 취향?”

그 말에 한수아가 움찔하더니 동그란 안경을 올려 썼다.

서주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아니니까 신경 꺼라. 그냥 작가랑 편집자 사이야.”
“아닌  같은데~.”
“노트북 압수한다?”
“아, 치사하게 줬다 뺏기야?”

드르륵. 드르륵.

“됐고. 우리 거 나왔으니까 받아 오기나 해라 점순아.”
“쳇. 나만 갖고 그래. 수아야 같이 가자.”
“응? 으응!”

한수아가 얼른 일어나 총총 뒤따라갔다.

서주환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길게 숨을 흘렸다.

“어우. 피곤해.”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

“오빠, 주말에는 집에도 좀 들려!”
“환이 오빠. 자주 연락해야 돼!”
“그래그래. 들어가면 톡 보내.”

서주환은 두 사람을 배웅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떠들썩한 하루여서 혼자 있으니 유독주위가 적막하게 느껴졌다.

“응?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구나.”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더라니. 일전에도 분명 이렇게 길을 걷다가 흡연장으로 향했고, 거기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서주환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틱틱.

“아. 하필 

기름이  됐는지 불이  붙었다. 편의점에 가야 되나. 거리가 좀 있어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쩔 수 없이 흡연장 밖으로 나서려는데, 불쑥 하얀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라이터가 쥐어져 있었다.

“여기. 이거 쓰세요.”
“아, 감사… 어?”

흑단처럼 곱고 까만 장발에 모델처럼 키가  여자. 인상이 사납지만 워낙 예쁜 얼굴이라 기억하고 있는 여자였다.

“그때 그 공주병?”
“…라이터 도로 내놔요.”

여자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서주환은 얼른 손을 뺐다.

“아, 죄송. 고맙게 쓸게요. 하하.”

기시감이 느껴졌다.그러고 보니 일전에는 그가 라이터를 빌려줬었다.

치익-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돌려주었다.

서주환은 말없이 담배를 태우다가 문득 그녀의 차림새를 봤다. 운동복에 슬리퍼. 워낙 태가 나서 몰랐는데 무척 편한 차림이었다.

“근처 사시나 봐요?”
“그러니까 자주 만나겠죠?”
“자주?”
“지난 번에 취해 있을 때도봤는데, 그건 기억 안 나시나.”

새침한 투로 툭 말하는 여자.
떠오르는  있었다. 최미화와 함께 있을 때.

“아아. 그랬죠. 그땐 제가 민감하게 반응했던  같은데… 미안해요.”
“아, 아니. 사과 받자고 한 말은 아닌데요. 내가 먼저 말실수 했었고.”

먼저 사과하니 여자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어딘가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 분위기와는 다른 태도였다.

서주환은 피식 웃고는 담배를 비벼 끄며 인사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네. 그쪽도요.”

여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마주 인사했다. 말투가 쌀쌀맞아서 그렇지 예의는 또 발라 보였다. 특이한 여자였다.

‘진짜 어디서 봤던  같은데. 모르겠다.’

괜히 생각해봐야 답답해져서 고개를 털어냈다. 피곤해서 빨리 자고 싶었다.

*

해가 밝았다.

서주환은 길게 하품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드디어 복학이네.”

개강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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