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Feels good
뜬금없이 노래방을 가자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당혹이 떠오른다.
그 기색을 전혀 못 느꼈는지 민가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히히. 술 마시니까 노래 부르고 싶어요.”
서주환은 옆에서 콧소리를 내며 재잘대는 민가희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누가 봐도 지금은 노래방이 아니라 각자 찢어져서 술을 더 마시거나 모텔로 갈 분위기를 잡을 타이밍이다.
특히 이정훈과 윤슬기는 이미 각이 잡히지 않았던가.
비단 둘만 그런 것도 아니다.
민가희도 첫 질문부터 서주환과 키스하고 싶다 말했고, 이후에도 관심 있는 사람으로 그를 지목했었다. 한데 갑자기 뜬금없이 왜 노래방에 가자고 하는지.
아니나 다를까 윤슬기도 무척 당황한 얼굴이다. 이정훈과 잘 될 기회를 놓칠 것 같아서 그런 걸까. 그녀가 다소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노래방을 가자고?”
“응. 아까 보니까 근처에 쥰코 있더라. 거기서 술 마시면서 노래 부르면 재밌을 것 같아.”
“술 마시면서? 민가희 너 진짜… 목 관리 안 해?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면 목 나가는 거 몰라?”
“…하루 가지고 뭘 그래?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너…….”
생각보다 더 날 선 대화.
뭐가 문제였던 걸까. 단순히 눈치 없이 분위기를 망쳤다는 이유 때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말끝을 흐린 윤슬기는 이제 민가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가희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명백히 다른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공기.
그때 서주환의 귓가에 그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울렸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그 순간 잡고 있던 술잔에 불가항력적인 힘이 가해졌다. 마찰력이 사라지는 느낌과 함께 손에 들린 술잔이 미끄러진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에 가장 당황한 건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엄마!”
“흐햑?!”
잠시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예상치 못한 소란에 깨졌다. 윤슬기는 엄마를 찾고, 민가희는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정훈이 절묘하게 끼어들었다.
“어우. 깜짝 놀랐네. 야, 주환아. 벌써 취했냐?”
“미안. 손이 미끄러졌네. 둘 다 안 다쳤어? 가희 괜찮아?”
그는 바로 말을 받으며 놀란 민가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에 민가희가 눈을 꿈뻑이며 그를 묘한 시선으로 보다가 살풋 웃음 지었다.
“오빠, 많이 취했어요? 그럼 그만 마실까?”
“하하. 취한 건 아니고 잠깐 손이 미끄러져서 그래.”
“에라이. 주환이 녀석 때문에 분위기 다 깨졌네. 우리 그만 일어나자. 어, 슬기 너 휴대폰 빠졌다.”
“아. 고마워요, 오빠.”
네 사람은 각자 물건을 챙겨 일어났다.
*
밖으로 나온 이정훈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 담배 한 대만 피고와도 될까?”
“네, 괜찮아요.”
“갔다 오세요.”
두 여성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훈이 그녀들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손짓하며 말했다.
“주환아, 너도 같이?”
“알겠…”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말을 끊고 들어오는 윤슬기.
놀라서 쳐다보니 그녀가 말했다.
“저도 한 대 피고 싶어서요.”
“어? 너도 담배 펴?”
“네, 가끔.”
서주환은 그리 말하는 윤슬기와 말없이 서있는 민가희를 쳐다봤다.
윤슬기는 티 내지 않으려는 듯 했지만 가라앉은 표정이었고, 민가희는 무슨 생각인지 작게 웃고 있었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정훈에게 말했다.
“형, 둘이 갔다 와. 난 가희랑 있을게.”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지만 민가희 혼자만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윤슬기가 같이 있으면 할 얘기도 못 할 테고.
윤슬기도 눈치가 있어 그가 빠지는 이유를 알아챈 듯 순간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작게 눈인사를 했다.
“미안해요, 오빠.”
“어? 뭘?”
짐짓 모르겠다는 듯 말하니 윤슬기가 작게 웃었다.
“풋. 여튼 금방 갔다 올게요. 가희랑 있어주세요.”
“그래. 천천히 갔다 와.”
“주환아, 그럼 갔다 올게.”
“어.”
둘은 근처에 있는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민가희를 슬쩍 내려다본 서주환은 크게 당황했다.
시종일관 웃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무너져 있었다.
미소가 사라진 민가희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화 난 건가?’
그는 회귀 전의 눈칫밥 생활 덕분에 사람 표정을 잘 읽는 편이었는데, 도무지 민가희의 생각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약간 화가 나 보였고, 동시에 미안한 것도 같았으며, 어쩐지 조금 슬퍼하고 있는 걸로도 보였다.
‘쓰읍. 난 여자 달래본 적이… 있구나?’
그것도 생각보다 꽤 많다.
최미화를 품에 안고 달래기도 했었고, 어렸을 적동생과 한수아를 달래주기도 했었다.
서주환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손잡기에 민가희가 당황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 처음 보는 표정이다.
“괜찮아?”
“넹? 뭐가요?”
당황했던 기색이 무색하게도 민가희는 고개를 갸웃 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어색하다. 이래봬도 그는 철 든 이후 32살이 되도록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았었다.
…서주환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지만, 이내 민가희의 손을 조금 더 꼭 붙들었다.
그녀는 붙들린 손을 꼼지락 거리며 예의 빙구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빠 손 엄청 크네요.”
“그치? 여자들은 손 큰 거 좋아한다던데. 가희는?”
“으음. 잘 몰랐는데, 지금 오빠 손잡아보니까 저도 큰 게 좋은 것 같아요.”
큼직한 손이 마음에 들었는지 민가희는 손을 빼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민가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빠, 미안해요.”
“어?”
“저 때문에 분위기 망쳤잖아요.”
“오. 알긴 아네?”
서주환은 부정하기보다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넉살스런 반응에민가희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럼요. 제가 눈치가 좀 빠르거든요.”
“엉?”
“앗.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했죠. 저 다 알거든요? 슬기가 정훈 오빠한테 관심 있는 것도 처음부터 알았어요.”
“…….”
정확하게 맞추는 걸 보니 의외로 정말 눈치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눈새인 줄 알았는데.
민가희가 맞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말했다.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거예요. 그게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래?”
“네. 눈새인 척 하는 게 오히려 편할 때도 많거든요. 그리고… 아까는 그냥 슬기 좀 골려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술 먹고 노래방?”
“헐. 오빠도 눈치 좋네요.”
그거야 눈앞에서 들었으니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서주환은 정말로 눈치가 빠른 편이어서, 말실수보다 다른 게 신경 쓰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단순한 실수라면, 왜 화가 났어?”
“…제가요?”
“응. 슬기한테 화났잖아?”
“미안한 게 아니라요?”
“화나고, 미안하고. 사정은 몰라도 좀 복잡한 마음인 것 같은데?”
“…….”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더니 이내 한숨처럼 중얼거린다.
“이 오빠 진짜 눈치 빠르네….”
“끌끌. 이게 연륜이란 거지. 나이가 들면 사람 감정에 민감해지거든.”
“우와. 아저씨 같아….”
그리 말하며 손을 놓더니 한 발짝 떨어진다.
서주환은 진짜로 상처 받아서 좀 시무룩해졌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민가희가 그 표정을 보더니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표정 엄청 웃겨. 농담이에요, 농담.”
아무래도 왜 화났는지 말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민가희는 다시 손을 잡아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깍지를 꼈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예상 밖이었다.
‘의외네.’
곱게 자랐을 것 같은 민가희의 손가락은 군데군데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마냥 헤프게 웃기만 하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같이 서 있기를 몇 분.
생각보다 늦게 돌아온 두 사람은 서주환과 민가희가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가까이 다가온 이정훈이 말했다.
“슬기는 힘들어서 이제 가봐야겠대. 내가 데려다 주려고 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할래?”
“우리는…”
“저희는 좀 더 마실 거예요. 먼저 들어가세요.”
민가희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서주환은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의사에 그냥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윤슬기가 그에게 폰을 내밀며 말했다.
“…주환 오빠. 번호 좀 주세요.”
“어?”
“가희 저년 분명 연락 한 통 없을 거니까… 미안한데 오빠가 까톡 좀 주세요.”
바로 옆에 있는 민가희에게 말하면 될 것을 굳이 그의 번호를 달란다. 아직 화가 났다는 듯 눈도 안 마주치면서 걱정은 된다는 건가.
“프흐. 알았어.”
서주환은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참 귀엽게들 싸운다 싶었다.
쪽팔린 걸 아는지 윤슬기의 귀가 빨개졌다.
*
민가희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집은 무슨. 주환 오빠, 그거 알아요?”
“응? 뭘?”
“슬기 쟤 저랑 같이 살아요. 지금 집 가는 거 절대 아니에요.”
“그야 뭐. 근처에 있는 모텔을 가든 호텔을 가든하겠지?”
“엑. 오빠도 눈치 챘어요?”
서주환은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뭐 당연한 사실을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듯 하는지.
‘둘이 같이 산다는 건 몰랐지만.’
예상치 못하게 좋은 정보를 얻었다. 둘이 같이 산다면 오늘 집에 들어가기 껄끄러울 터.
서주환은 일단 분위기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 우리도 갈까?”
“네? 에? 어, 지금요? 저 아직 그런 기분 아닌데….”
민가희가 새빨개진 얼굴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게 꽤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계속 보다보니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아직’이라고 하는 걸 보면 갈 생각은 있는 모양이다.
서주환은 민가희의 손을 이끌며 말했다.
“거긴 이따 가고. 지금은 노래방 가고 싶다면서?”
“아, 노래방! 어, 음. 술 마시고 부르면 슬기한테 혼날 텐데….”
그리 말하며 잠시 멈칫하는 그녀였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슬기도 담배 피웠으니까… 가요!”
“원래 담배 안 피워?”
“그, 피우긴 하는데 원래 저랑 같이 있을 때는 안 펴요.”
이유는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가수나 뮤지컬 같은 거라도 준비하는 거겠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쥰코 노래방에 도착했다. 자리를 잡은 후 적당히 안주와 술을 시켰다.
“오빠, 저 먼저 불러도 돼요?”
“그럼.”
“히히. 무슨 노래 좋아해요?”
“오, 신청곡 받는 거야?”
“네. 오빠가 고른 거 불러드릴게요.”
“음. 그럼…”
서주환은 잠시 뜸을 들였다. 막상 말하려니 아는 곡이 별로 없었다. 주로 힙합만 들었던지라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그래도 생각하고 있으니 적당한 곡이 떠올랐다.
“유아이의 Feels good 괜찮아?”
“남자들은 역시 유아이 곡 좋아하네요.”
“그야 뭐. 워낙 유명하잖아. 여자들도 좋아하지 않나?”
“맞아요. 저도 좋아해요.”
생글 웃은 민가희가 노래를 선곡했다.
전주가 나온다.
서주환은 노래방 리모컨을 건네받고 다음곡을 선곡했다. 발라드는 못 부르니까 적당한 힙합곡으로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선곡할 생각이 사라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비춰오는 햇살~”
Feels good은 유아이가 중3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랑의 모습을 표현한 노래다. 민가희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시작해서 부드럽게 방 안을 채웠다.
“입가에 미소 짓고 행복하게~”
애초에 노래 자체가 임팩트 없이 잔잔한 곡이다. 그런데도 부드러운 가성이 귀를 사로잡는다.
‘B급… 인데도 대단하네.’
워낙 높은 등급의 재능을 많이 봐와서 그렇지 사실 B급만 해도 프로의 영역이었다.
서주환은 오랜만에 귀가 호강한다는 생각에 얌전히 리모컨을 내려놓고 노래를 감상했다.
“All my life~.”
부드럽고 잔잔한 노래.
강렬한 느낌은 없지만 듣는 사람이 편안하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곡이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걱정은 가슴 안에 담지 말고-”
그런데 왜 갑자기 슬픈 느낌이 드는 걸까?
“눈물이 흐르면 그냥 울어 버려-”
“또 한 번 아프다면 웃어 버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Feels good은 십대 소녀의 밝은 면을 담은 노래.
슬픈 감정이 들어갈 노래가 아니었으니까.
“눈물이 흐르면 그냥 울어 버려-”
“또 한 번 아프다면 웃어 버려-”
하지만 2절의 가사가 반복될 때 다시 슬픈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노래를 듣고 감정을 알아챌 만큼 귀가 밝지 않았다. 한데 민가희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가 엄청난 호소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건만.
이것도 축복의 영향일까.
“기분이 좋아~.”
마지막 가사를 끝으로 노래가 마무리 되고 화면에 점수가 매겨진다.
- 100점!
- 환상적인 보이스! 당신이 최고랍니다~!
“꺄악! 오빠, 저 100점 나왔어요!”
민가희가 기쁜 듯 방방 뛰며 달려들었다.
서주환은 피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주며 그녀를 불렀다.
“가희야.”
“아, 미안해요. 떨어질게요.”
“아냐, 괜찮아. 그보다 있잖아.”
“넹?”
놓아주지 않으니 안긴 상태에서 고개만 기울이는 민가희.
서주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무슨 고민 있어?”
“갑자기요? 아뇨. 음. 아까 슬기랑 싸운 거 말곤 없는데요?”
지금까지와 별 다를 바 없이 밝은 목소리다.
괜한 걱정이었나.
“그럼 다행인데, 고민 있는 것 같아 보여서.”
“히히. 그런 거 없어요. 오빠, 저 숨 막혀요. 이제 놔주세요.”
“그래.”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특유의 빙구 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를 보고 말한다.
“다음은 오빠 차례…”
민가희의 말이 끊어졌다.
서주환은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왜 울어?”
웃는얼굴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