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귓속말 게임
<민가희>
성별: 여성
나이: 21살
키: 160cm
몸무게: 53kg
호감도: C
현재 성욕: C
페티시: Ochlophilia(中), Aphephilia(中)
보유 재능:작곡(C/S), 노래(B/B), 기타(B/B), 천진(B/B), 베이킹(C+/B), 연기(C+/B)
민가희의 상태창을 확인한 서주환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S급 재능도 놀랍지만….’
어찌 보면 가진 바 재능의 수가 더 놀라웠다.
본래 상태창에는 재능 중에서도 잠재 등급이 높은 상위 3개만 표기된다. 다만 상위 3개 중 동일 등급이 있을 경우 추가로 재능이 표기됐는데, 민가희는 여태껏 본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작곡 재능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네.’
머리카락 페티시를 갖고있던 신하늘도 대부분의 재능을 한계 근처까지 올렸었다. 하지만 그건 미용사, 스타일링, 내숭 등 직업과 재능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반면 민가희는 가장 등급이 높은 작곡 재능의 숙련도가 가장 낮았다. 일견 다른 재능과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베이킹과 연기 재능보다도.
[여러 가지 분야로 시도를 많이 해봤나 보네요. 다섯 개나 되는 재능을 한계까지 올린 건 특이하지만… 재능 자체가 많은 건특별한게 아닙니다. S급 재능의 숙련도가 제일 낮은 것도요.]
‘그래?’
[네. 대부분의 사람은 뛰어난 잠재능력을 적어도 한두 개쯤 갖고 있습니다. 다만 주인님과 달리 상태창을 볼 수 없으니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 하는 경우도 많지요.]
‘민가희의 재능이 유독 많은 건?’
[B급 재능이니까요. 다른 사람들 같은 경우는 상위 재능이 높아서 표기되지 않았을 뿐이에요. B급 재능 정도는 여럿 보유 하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답니다.]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갔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봤던 재능 중 가장 낮은 등급이 B+였다. 그 사람들도 상태창에 표기되지 않은 다른 재능이 꽤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의문이 해결되자 루시는 여느 때처럼 페티시를 설명해주었다.
[Ochlophilia(오클로필리아)는 군중 기호증이라 하여 사람이 많은 곳에 있을 때 성욕을 느끼는 성벽입니다. 민가희가 클럽에서 흥분했던 게 꼭 공연 때문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Aphephilia(아페필리아)는타인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에 대해 흥분을 느끼는 증후군입니다. 이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스킨십을 좋아하지요.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치한 당하는 걸 즐기기도 한답니다.]
설명을 들으니 민가희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난 직후 그를 끌어안고 방방 뛰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클럽 온 게 처음이라고 했었나?’
그래서 더 흥분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 민가희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때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오빠? 주환 오빠?”
“어, 어?”
앞을 보니 민가희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갸웃 기울이는 고개를 따라 푸른색 머리칼이 움직였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나 뚫어지겠어요.”
상태창을 본다는 게 시선이 그녀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서주환은 잠시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변명했다.
“아니, 그냥. 가희 네 머리색이 신기해서. 색 되게 예쁘게 나왔다.”
“앗. 그쵸? 저랑 잘 어울리죠!”
말을 돌리려한 변명이 의도치 않게 관심사를 건드렸다. 민가희는 머리에 관심을 가져준 게 기쁜지 자신의 머리칼을 쓸며 말했다.
“이거 진짜 큰 맘 먹고 한 거거든요. 탈색하느라 머리 다 빠지는 줄 알았어요. 빨리 잘 어울린다고 말해줘요.”
“응, 잘 어울리네. 색 이름이 뭐야? 그냥 파란색은 아닌 것 같은데.”
변명 때문에 한 질문이지만 실제로도 민가희는 푸른 머리색과 제법 잘 어울렸다. 참 어울리기 힘든 색 같은데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는 그녀와 조화를 이룬다고 해야 하나. 푸른색이면 차가운 계열인데도 맑고 청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특유의 이히히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코발트 블루요. 그런데 며칠 지나고 색 빠질 거 생각하면 너무 아쉬운 거 있죠?”
적당히 질문해주고 반응해주니 민가희는 재잘거리며 잘도 떠들었다.
그렇게 떠들고 있자니 알바가 들어왔다.
“주문하신 음식과 술 나왔습니다.”
안주는 모듬 감자튀김을 비롯한 치즈, 고구마 스틱과 망고화채. 나머지는 모두 소주와 맥주였다.
서주환은 이정훈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형, 이게 자신하는 안주야?”
메뉴는 전적으로 이정훈이 자신하며 정한 것이다.
이정훈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한 말이지. 일부러 탕 종류 안 시키려고 한 거야. 안주로 배 채울 거냐? 술 먹여야지.”
“오오. 그런 깊은 뜻이.”
“형만 믿으라니까. 네가 조인했는데 이런 부분은 내가 해야지.”
“형님, 믿습니다.”
“오냐.”
음식 주문하는 데에도 의도가 있었다. 보고 배워야겠다. 여자들과의 술자리에서는 마른안주. 안주 보다는 술을 먹인다. 메모.
그와 이정훈이 속닥대자 민가희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왜 둘이서만 얘기해요?”
“아, 미안. 음식 나왔으니까 우리 술 게임 할까?”
재빠르게 인터셉트한 이정훈이 제안했다.
파란 머리 그녀. 민가희가 게임이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술 게임? 좋아요! 슬기야, 너도 괜찮지?”
“난 괜찮지. 제발 네 걱정이나 해라, 좀.”
“치. 내가 뭘?”
“으이구. 빙구 같은 년.”
“그럼 슬기 너는 마귀할멈이거든!”
그새 또 티격태격하는 둘이다.
얘기가 길어지기 전에 이정훈이 둘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오케이. 그럼 하는 거지? 너희 귓속말 게임이라고 알아?”
“귓속말 게임? 그게 뭔데요?”
두 여자 다 처음 들어보는 듯했다.
사실 서주환도 처음 들어보는 게임이었다. 그가 아는 술 게임은 대학 시절 반쯤 억지로 참여했던 ‘베스킨 라빈스’와 ‘더 게임 오브 데스’ 밖에 없었다.
겜잘알 이정훈이 씩 웃으면서 게임을 설명했다..
“그럼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귓속말 게임은…”
귓속말 게임의 룰은 간단했다.
일단 순서를 정하고 옆 사람에게 귓속말로 질문을 한다. 그리고 옆 사람이 해당 질문에 대한 답을 손으로 가리키거나 고개를 젓는 등 동작을 취한다. 이때 질문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해당 질문을 알고 싶은 사람은 술을 마시면 된다.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질문이 무엇인지 들을 수 없다.
즉, 궁금하면 마셔라 이거였다.
설명을 마친 이정훈이 잔을 들었다.
“일단 두 잔 정도 비우고 시작하자. 내가 소맥 말아줄게.”
본격적인 시작 전에 질문의 수위를 높일 수 있도록 좀 취하자는 뜻이다.
이정훈은 순식간에 소맥을 만들었다. 짠 소리를 내며 건배를 한 후 시원하게 들이켜니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황금 비율이 이런 건가.
네 사람은 술 게임 전에 적당히 잡담을 나누면서 소맥 두 잔을 비웠다. 여자 둘 모두 술을 꽤 하는지 급하게 마셨는데도 멀쩡한 신색이었다.
“질문은 젓가락 돌려서 나온 사람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다. 오케이?”
“오키.”
“오케이!”
“알았어요.”
빙그르르르- 젓가락이 돌아갔다.
젓가락 끝이 가리킨 사람은 이정훈.
이정훈은 씩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민가희에게로 다가가서 귓속말을 했다. 윤슬기 쪽으로 노선을 정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민가희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귓속말을 들은 민가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프히히. 지금 지목하면 돼요?”
“응. 편하게 지목해.”
“진짜죠?”
무슨 말을 한 걸까.
곧 민가희의 손가락이 휙 하고 한 사람을 가리켰다.
지목 받은 서주환이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 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인 거야?”
아니면 자신에 대한 질문인 건가. 둘 중 무엇인지 헷갈렸다.
“뭐야? 무슨 질문이었는데?”
“에이. 오빠,궁금하면 마셔요! 마실 거예요?”
“쓰읍. 첫 질문부터 뺄 수는 없지? 마실게.”
민가희가 소맥을 손수 제조해주었다.
비율은 소주5에 맥주5.
벌주답게 꽤 살벌한 비율이다.
서주환은 잔을 들고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푸우. 자, 이제 말해줘.”
“오빠, 술 잘 마시네요? 히히. 제가 받은 질문은…”
“아, 가희야. 그거 주환이한테만 알려줘야 돼. 슬기는 안 마셨잖아. 아니면 슬기도 마실래?”
“아뇨. 저는 됐어요.”
“히히. 그럼 주환 오빠, 귀 좀 줘 봐요.”
“어어.”
어떤 질문이었을까.
별 것도 아닌데 괜히 기대가 되었다.
민가희가 테이블 너머로 몸을 내밀어 그의 귀로 입을 가까이 했다. 숨결 때문에 귓가가 간질간질하다.
“정훈 오빠가 한 질문은…”
뜸을 들이는 민가희.
이윽고 그녀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누구랑 키스하고 싶냐는 거였어요. 헤헤.”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부끄러운 듯 생글 웃는다. 처음부터 그런 질문을 한 것도 놀라운데 바로 자신을 가리켰다는 건 더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매력 상승 립밤』을 발랐었지.
슬쩍 이정훈을 돌아보니 테이블 밑으로 엄지를 척 올리고 있었다.
서주환은 자리에 앉자마자 마주 엄지를 들었다.
참모총장 포상을 양보한 보람이 있었다.
*
서주환은 원래 술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 게임이라고 해봐야 회귀 전 대학 때 꼽사리 껴서 해본 게 다였는데, 룰도 모르고 하다 혼자만 계속 걸리는 바람에 분위기를 망치곤 했다.
결국 벌주만 진탕 마시다가 낄 자리가 아니란 생각에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었지. 혼자 밖에서 쓸쓸하게 줄담배를 피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아, 뭐야. 무슨 질문했어!”
“푸하하! 알고 싶으면 마셔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술 게임이 이렇게 재밌는 거였던가?
지금까지 그가 한 건 술 게임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하는 술 게임은 그냥 누구 한 명 조지거나 말 그대로 술을 마시기 위한 게임이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술은 단지 수단일 뿐이었다.분위기를 야릇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 말이다.
“이번엔 내 차례!”
윤슬기가 이정훈에게 귓속말로 속닥댔다. 질문을 들은 이정훈은 씩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질문을 한 당사자인 윤슬기를 가리켰다.
윤슬기는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에 서주환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놀리듯 말했다.
“무슨 질문을 했길래 얼굴이 빨개져? 응?”
“앗. 뭐야, 뭐야? 슬기 무슨 질문 했어?”
민가희도 합세해서 윤슬기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윤슬기는 괜히 술을 마시며 대답을 회피했다.
“알고 싶으면 마셔.”
“치사하게.”
“너도 안 알려줬잖아.”
“치. 그럼 마신다?”
민가희가 술잔을 들었고, 은근슬쩍 서주환도 따라서 마셨다. 그를 지목한 게 아니었는데도 질문이 궁금했다.
모두가 술을 마시자 윤슬기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오늘 같이 밤새고 싶은 사람 말했어요.”
같이 밤새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일까.
당연히 같이 밤새 술 마시자는 건 아닐 터다.
민가희가 파란 머리를 손으로 배배 꼬더니 조동이를 오므리며 말한다.
“오모모. 우리 슬기 정훈 오빠랑 오늘 같이 있고 시포쏘?”
“야, 내가 아니라 정훈 오빠가…”
“풋. 슬기 부끄러워하는 거 보래요~.”
“시끄릅드….”
“힉. 그, 그럼 정훈 오빠는 슬기랑 같이 있고 싶은 거네요?”
윤슬기가 잇소리를 내며 살벌하게 노려보니 즉시 타깃을 변경하는 민가희다.
이정훈은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어. 나는 같이 있고 싶은데?”
“꺄아. 야해!”
“오. 형 지금 들이대는 거?”
윤슬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에 이정훈은 짐짓 어깨를 으쓱이며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말한다.
“응? 난 밤새 술 마시잔 소리였지. 뭐 다른 거 있어?”
세 사람은 낄낄대며 윤슬기를 놀렸다.
아마 이정훈이 윤슬기를 지목한 이유는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일 것이다. 서주환이 민가희와 짝을 맺고 이정훈이 윤슬기와 짝을 맺는다. 몇 번의 게임에서 이미 확실하게 분위기가 정해졌다.
서주환은 부끄러워 하는 윤슬기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쟤는 진심인 것 같은데.’
처음엔 좀 빼는가 싶더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질문도 하고 이정훈에게 끼를 부렸다. 옛날 같으면 알아채지 못 했겠지만 그도 최근 눈치가 늘어났다. 그가 보기에 윤슬기는 적잖게 이정훈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하룻밤 가볍게 태우고 말기엔 뒷감당이 걱정이다.
그런 생각도 잠시, 서주환은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알아서 하겠지.’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경험 많은 이정훈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그는 민가희와 따로 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술 게임은 뒷전이고 서로 잡담하며 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술이 다 떨어졌을 즘이었다.
민가희가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저희 노래방 가요, 노래방!”
당연하게도 민가희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짜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