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누구세요?
갑자기 약 얘기를?
스테로이드라면 그도 몇 번인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약물이었다. 치료의 목적으로도 사용되지만 근육 증강을 위한 도핑에 사용되는 걸로도 유명했다.
“스테로이드요? 그거 약물 아니에요? 성장호르몬 같은.”
“맞아. 둘이 다른 거긴 한데, 어쨌든 근육 증강에 사용되는 약물이지.”
갑자기 이런 걸 왜 묻는 걸까.
순간 서주환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헉. 형님 약 하세요?”
“뭐?”
“형님 약으로 키운 몸이었어요?”
“아니야, 인마! 나는 백 프로 자연산이야, 새끼야!”
격렬하게 부정한 백강호가헤드록을 걸어왔다.
“켁켁. 형님, 저 죽어요. 탭탭.”
“아, 미안. 당황해서.”
“콜록. 아니 뭔 당황해서 헤드록을 걸어요? 두 번 당황하면 사람 잡겠네….”
“어우. 진짜 미안하다. 어쨌든 난 약 안 했어,인마. 내가 운동만 20년차다.”
“알았어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요?”
백강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혹시 주변에서 약 권하는 사람 있으면 하지 말라고.”
“갑자기요?”
“헬스 업계가 좀 그래. 리본 피트니스처럼 클린하게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양아치 같은 곳은 헬스장 측에서 약을 권유하는 일도 있거든. 진짜개새끼들은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효과 좋은 영양제라면서 팔아먹기도 하고.”
“…그 거짓말 진짜에요? 그 약들 다 부작용 있잖아요.”
“진짜야. 의외로 권유하면 사는 사람들도 많아. 효과가 눈에 확보이거든. 그러니까 너도 조심하라는 뜻에서 말한 거야. 보통 운동을 막 시작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우니까.”
“허….”
서주환은 황당해져서 헛웃음을 뱉었다.
약물에 관한 걸 언 듯 들어보긴 했지만 설마 암암리에 알선까지 하고 있는 업체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절대 안 해요. 그거 하면 고추 작아지잖아요.”
“뭐?”
눈을 끔뻑이는 백강호에게 그는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근육 커지고 이게 작아지면 뭔 소용이에요? 고추 있고 근육 있는 겁니다. 제 목표가 패션 근육인 거 알죠? 저 여자 꼬시려고 운동하는 놈이에요.”
“허, 허허, 푸하하하하. 황당한 놈, 진짜. 운동을 여자 꼬시려고 시작했다고?”
서주환은 낄낄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주된 이유는 건강이었다. 글쟁이든 그림쟁이든 작가 생활을 오래 하면 허리나 목, 손목 등 어디 한 군데는 망가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여자를 꼬시려는 목적이란 것도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질문했다.
“그럼 형은 운동 왜 시작했는데요?”
“엉? 뭘 물어, 당연한 걸.”
“예?”
“나도 시작은 여자 꼬시려고 했지. 큭큭. 아마 헬스인들 절반 정도는 그거 때문에 시작했을 걸? 나중엔 그냥 운동에 중독된 거고.”
“프흐흐. 그런데 목적은 이뤘어요?”
“목적?”
“원래 목적이었던 여자친구 만들었냐고요. 형님 얼굴이 좀 무섭긴 하지만 몸만 보는 여자도 있잖아요.”
“이 자식 말하는 거 봐라? 요 근처 복식장에서 스파링 한 번 할래?”
“하하. 형님만큼 남자답게 잘 생긴 사람이 또 없죠.”
“능청은, 자식이. 그리고 인마, 여자친구는 뭔 여자친구냐?”
“아, 실패했어요?”
“자꾸 뭔 소리야. 나 결혼한 거 안 말해줬었냐?”
“…네?”
서주환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눈을 끔뻑였다.
뭐지, 잘못 들었나?
백강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아까 혜리랑 잘만 얘기하더만.”
“혜리? 이혜리 씨요?”
“팍 씨. 마. 형수님한테 혜리 씨가 뭐냐.”
“아니, 뭔. 둘이 결혼했다고요?”
서주환은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백강호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와 이혜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덥수룩한 수염의 근육괴물 산적 면상 백강호와 청초한 매력의 이혜리라니. 아니, 나이 차이부터가 얼마나 나는 거란 말인가.
그는 결국 매를 벌고 말았다.
“…형님, 아무리 성인이라도 열 살 넘어가면 거의 범죄 아닙… 억!”
“혜리가 나 보다 두 살 많아, 인마!”
백강호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버럭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그게 두 살 차이라고? 심지어 이혜리 쪽이 나이가 많아?
둘이 결혼했다는 사실보다도 더 충격이었다.
“액면가를 생각하면 최소 열 살 차인데….”
“죽을래?”
“죄송합니다.”
바로 사과했다. 인상 쓰고노려보니까 조폭이 따로 없었다.
아무튼 올해 경험 중 회귀 후 제일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
두 사람은 담배를 다 피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아직도 술판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아까처럼 떠들썩한 게 아니라 심각한 표정으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토론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약물은 안 돼. 그거 잘못 복용하면 훅 간다니까?”
“그렇죠. 제 주변에도 스테로이드 잘못 빨았다가 거시기가 콩알만 해진 녀석이 있다니까요.”
“제가 아는 사람도 시중에서 판매 안 하는 다이어트 약 먹고 부작용 겪은 사람 있어요. 처음에는 잘 빠진다고 좋아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20kg가 불어났더라고요.”
“아, 저는 몸무게가 불어나진 않았는데 환각을 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뭐였더라? 식욕억제제를 잘 못 먹었다고 했었죠.”
스테로이드니 식욕억제제니 웬 약물 얘기를 주제로 안 좋은 사례들을 릴레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며 자리에 앉으니 임수희가 그를 보고 말했다.
“주환아, 너도 조심해야 돼. 몸 만들고 싶다고 손 댔다가 후회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예? 저요?”
갑자기 타겟이 되자 당황하는 서주환.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옆에 앉은 백강호가 볼을 긁적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한데 제가 밖에서 이미 다 말했습니다. 주환이 녀석 약 같은 거 안 할 겁니다.”
그 말에 일순 조용해지는 테이블.
“…….”
“…….
리본 피트니스 사람들은 말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 설마….’
짐작은 확신이 되었다.
곧 사람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해왔다.
“어우. 강호 씨, 밖에서 먼저 말하면 우리가 뭐가 돼?”
“하하. 죄송합니다.”
“이거 참. 민망하구만. 미안해, 주환 학생.”
“여튼 다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 녀석 슬쩍 떠보니까 고추 작아지는데 약 같은 걸 왜 하냐고 하는 놈이에요.”
“가, 강호 형?”
그걸 민망하게 여기서 왜 말합니까!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어째 특정 부위로 말이다.
“어머.”
어머는 무슨 어머? 임수희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물끄러미 그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는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웃고 있으면서도 힐끔 시선을 내리는 이혜리도 있었다.
‘이 아줌마들이….’
괜히 민망해진 서주환은 임수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던 임수희가 아차 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누나, 무슨 일인지 말해줘야지?”
“아하하. 그게 있지이~. 호호.. 주환아,미안!”
임수희가 두 손을 모아서 싹싹 빌었다.
*
“흠. 그러니까 제 몸이 너무 빨리 성장해서 혹시 약을 쓰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거 때문에 약 물 얘기를 하면서 겁을 주려고 이 자리에 부른 거고?”
그리 말하니 임수희가 두 손을 내저었다.
“의심이라니이. 걱정한 거지, 걱정.”
“이거나 그거나?”
“다르지! 나는 주환이 네가 안 그럴 거라고 믿고 있었어. 그냥 만에 하나라도,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그런 거지.”
“그러니까 결국 못 믿었다는 뜻이잖아?”
“윽.”
결국 임수희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서주환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정말로 걱정을 해서 한 행동이었고,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나름 괜찮았다.
대놓고 약을 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헬스장 관장 자격으로 약물 검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서 약에 대한 겁을 주기 위해 자리에 불러놓고 온갖 부작용 사례를 늘어놨던 것이다.
‘사실 의심할 만도 하고.’
헬스 두달 차에 3대 345가 나왔다. 애초에 몸집이 큰 편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약물을 사용한 게 아닌지 걱정하느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서주환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임수희의 얼굴이 밝아졌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하하. 미안해, 주환 학생. 기분 나쁜 건 아니지?”
“괜찮아요. 그냥 제 재능이 천재적인 거라고 받아들이죠, 뭐.”
“푸하하. 넉살도 좋구만. 사실 이게 처음이 아니거든. 실제로 약물 쓴 사람 몇 잡아낸 적도 있어.”
“헉. 정말요?”
“그래. 조금 전처럼 부작용 사례를 줄줄 늘어놨더니 안색이 시퍼레지더라니까?”
이미 몇몇 약물 사용자를 잡아 낸 전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임수희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약물을 쓰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리본 피트니스에서는 약물 사용자를 회원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로이더들은 내츄럴 운동인들의 의지를 꺾기도 하고, 진짜 질 나쁜 경우에는 아까 백강호가 말했던 것처럼 알선에 판매까지 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서주환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자 다들 신이 나서 다시 술판이 벌어졌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죽자고 마시고 있을 때였다.
최연장자 김대섭이 서주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디서 봤다 했더니! 주환이 너!”
“네? 헬스장에서 봤잖아요?”
“그거 말고! 이거 너 아니냐?”
그가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휴대폰에는 살을 빼기 전 그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떠올라 있었다.
살인범을 잡고 인터뷰한 영상이었다.
시끄럽게 먹고 마시던 리본 피트니스 회원들이 조용히 영상에 집중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나자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안양 지점에서는 살이 빠진 상태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던가?
힐끔 임수희를 바라보니 그녀가 자신이 퍼트린 게 아니라는 듯 맹렬한 도리도리를 시전했다.
백강호가 퉁방울 같은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주환아, 너 살인범도 잡았었냐? 대단한 놈이었네, 이거?”
“하하… 어쩌다보니까.”
영상을 보여준 김대섭이 갑자기 소주병과 맥주병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캬아! 국민 영웅을 못 알아봤네! 내가 술 한 잔 따라주께!”
“예?”
“뭐혀? 잔 대!”
190cm를 넘는 백강호한테는 안 되지만 김대섭도 3대 570을 치는 엄청난 덩치의 소유자다. 그가 버럭외치는 소리에서주환은 얼른 소주잔을 가져갔다.
김대섭이 혀를 차며 말한다.
“쯧. 그거 말고 맥주잔!”
“넵.”
맥주잔을 갖다 대자 소주를 콸콸 들이붓는다.
반 병 넘게 있던 소주병이 거의 다 비워지고, 끝에 맥주를 추가로 쫄쫄쫄 조심스레 따른다.
비율이 9:1이었다.
술 제조를 마친 김대섭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이걸 꿀주라고 부른다매?”
아조씨, 그거 아니에요….
*
언제까지 술판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벌써 두 시간이 넘어갔다.
서주환은 갑자기 밝혀진 인터뷰 영상 때문에 미친 듯이 술을 받아 마셨다. 무슨 인간들이 다 말술인 건지 지치지도 않고 마신다.
“캬아, 주환 학생 술 잘 마시네!”
“지금 주환이가 제일 많이 마신 것 같은디?”
“그야? 어잇, 진짜네! 그럼 한 잔 더 해!”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서주환은 확실히 술이 센 편이었다. 벌써 김대섭식(式) 꿀주만 세 잔을 마셨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용했다.
아까 『숙취해소제(사탕형)』를 가져 간 백강호는 오늘따라 술이 쭉쭉 잘 들어간다며 하마처럼 술을 마셔댔다. 당연히 서주환에게도 술이 돌아왔다.
그는 릴레이처럼 김대섭, 이문석, 백강호와 술잔을 부딪치며 계속 술을 들이부었다.
중간 중간 임수희나 이혜리와도 잔을 부딪쳤다.
임수희는 잔뜩 취했는지 실실 웃고 있었고 이혜리는 붉어진 얼굴로 말없이 부드러운 눈웃음만 짓고 있었다.
그렇게 새벽이 내도록 마셨다.
정확히는… 몇 시였더라?
“헉!?”
서주환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윽.”
얼마나 마신 건지 머리가 띵하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일단 집은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야…?”
불이 꺼져 있어서 어둡다.
일단 앉은 자리가 푹신하고 느껴지는 감촉을 보아 침대인 것 같은데….
“으응.”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