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거 돈은 필요 없으니까 몸만 오게
“대책 없는 녀석들.”
서주환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쯧쯧 찼다. 그에 한수아는 물론, 평소라면 틱틱 대며 따지고 들었을 서주희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답지 않게 시무룩하기는. 어색하니까 그만해.”
조금 황당했을 뿐 혼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서주희와 한수아는 반성한 기색으로 말해왔다.
“…아니, 그냥. 내가 생각해도 너무 대책 없었으니까.”
“미안해, 환이 오빠. 이제 막 전역했는데 역시 좀 그렇지?”
“응.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말했다. 오빠, 그냥 잊어. 우리끼리 해볼게.”
본인도 안 하던 말을 하려니 어색한 듯 볼을 긁적이는 서주희.
그는 두 사람을 묘한 시선으로 보다가 툭 말했다.
“누가 안 도와준대?”
그 말에 두 사람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주환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신 나도 전문지식이 있는 건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그, 그야 물론이지!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데.”
“헤헤. 환이 오빠 고마워!”
“으그. 고마우면 나중에 성공해서 갚아라?”
“응! 그건 걱정 마!”
“나도!”
해맑게 웃으며 답하는 둘이었다.
하여간 이 비글들 같으니라고.
*
집으로 돌아온 서주환은 생각에 잠겼다.
“뭐부터 해야 되려나.”
서주환이라고 인터넷 방송에 대한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회귀 전 인방 죽돌이였던 경험을 살릴 생각이었다. 방구석 인간으로 살던 그에게 소설, 만화, 인방 등의 서브컬쳐는 매우 익숙한 문화였다.
“흠. 일단 컨셉부터 정해야 할 텐데.”
언제나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법.
고정 시청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방송 컨셉이 확실해야 한다. 인지도가제로인 상태에서 이것저것 잡다하게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씁. 어쩔 수 없지. 루시.”
[네.]
“한수아랑 서주희 상태창 좀 띄워줘.”
접촉한지 한참 됐음에도 확인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상태창.
한 명은 친동생이고, 다른 한 명은 친동생 보다 더 동생 같은 아이였던지라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친동생의 성욕이나 페티시를 알아서 어디 쓴단 말인가. 괜히 찝찝하기만 하지.
그러나 지금은 두 사람이 뭘 잘 하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예의 띠링! 하는 시스템음과 함께 상태창이 떠올랐다.
<한수아>
성별:여성
나이: 20
키: 149cm
몸무게: 42kg
호감도: B+
현재 성욕: D
페티시:Morphophilia(中), Ursusagalmatophilia(下)
보유 재능: 게임(D/S), 수면(B/A+), 명기(B/A), 노래(C/B)
여지없이 보이는 페티시. 그것도 두 개나 있다.
페티시가 없는 사람은 없는 걸까.
루시의 설명이 뒤따랐다.
[Morphophilia(몰포필리아)는 키와 손 등 특정 신체 부위의 크기 차이에서 만족감을 얻는 기호입니다.]
[Ursusagalmatophilia(울스사갈마토필리아)는 곰인형, 특히 테디베어를 선호하는 기호입니다.]
“…거 참. 수아랑 잘 어울리는 페티시네.”
한수아가 곰인형을 좋아하긴 한다. 특히 빨간 상의를 입고하체 노출을 즐기는 변태곰을좋아했었다.
“큰 걸 좋아하는 건 몰랐네. 자기가 작아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손잡는 걸 좋아했었던 것도 같다. 서주환의 손발은 평균보다큰 편이었다.
그는 어쩐지 민망해져서 페티시를 넘기고 재능을 확인했다.
“뭐야. 게임 재능이 왜 이래? 게임도 안 하는 애가….”
놀란 음성이 절로튀어나왔다.
S등급이면 대체 어느 정도인 거지?
[축복 받은 재능이군요. S등급이면 세계 단위로 봐도 손에 꼽히는 천재입니다.]
루시의 설명을 듣고 나니까 인방이 아니라 당장 프로 무대에 진출을 시켜야 되는 거 아닌가 고민이 될 정도다.
그렇게 재능을읽던 중,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명기? 이거 설마 그…?”
[밝고 맑은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 명기(明氣)입니다.]
“…아, 그 명기.”
서주환은 머쓱해져서 눈꼬리를 긁적였다.
수아가 좀 해맑긴 하지. 함께 있으면 주변 사람들도 밝게 만드니까.
“크흠. 다음 거 보여줘.”
[네. 서주희의 상태창입니다.]
<서주희>
성별: 여성
나이: 19
키: 157cm
몸무게: 51kg
호감도: B
현재 성욕: E
페티시: Oculophilia(下)
보유 재능: 편집(C/A), 디자인(C/B+), 촬영(C/B+), 판촉(E/B+)
[동생 분이 가진 Oculophilia(오큐로필리아)는 안구 기호증이라고도 부르며 특정한 눈 모양에 집착하거나 눈을 핥고, 핥아지는 행위에서 흥분을 얻는 증후군입니다.]
“안 궁금한데….”
서주환이 썩은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동생년 페티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안구 기호증은 좀 충격인데….”
하여간 자신의 동생이었지만 골 때리는 녀석이 아니고 뭔가. 설마 만화 나x토를 좋아했던 게 페티시 때문이었나.
“자각은 없어보였는데.”
[본인의 페티시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페티시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페티시라고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경우도 많지요.]
“하긴.”
누가 냄새 기호증이니 안구 기호증이니 하는 걸 줄줄 꿰고 다닐까.
서주환은 페티시에 신경 끄고재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
재능을 확인한 서주환의 입에서 또 다시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편집, 디자인, 촬영.
이건 뭐 딱 편집자를 위한 재능 아닌가. 본인 길 알아서 잘 찾아가고 있었구만. 회귀 전에는 광고 회사에 다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이거 굳이 자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흠. 대충 가닥이 잡히네.”
일단 컨셉은 종합게임방송.
당장 할 게임은.
“싸이킥워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전국의 PC방 점유율 1위를 차지했던 게임.
이틀 뒤 베타테스트가 시작 되는 게임이었다.
*
방송을 시작하기로 한 시각은 저녁 8시.
서주환은 그보다 두 시간 일찍 한수아의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크. 아주머니 솜씨는 여전하네요. 진짜 맛있어요.”
“호호. 그래?”
“그럼요. 제가 여기서 밥 얻어먹으려고 저녁 굶고 왔잖아요.”
“어머. 얘가 못 보던 새 아부가 늘었네.”
“에이. 아부라뇨. 저아부하면 죽는 병 있어서 그런 거 못 해요. 정말 가게 하나 차리셔도 될 것 같은데요?”
“호호. 알았으니까 많이 먹으렴. 밥 더 줄까?”
“예!”
립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유순옥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밥은 물론 고기반찬을 더 내왔다.
눈을 꿈뻑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남편한정석. 그가 이내 웃는 얼굴로 말한다.
“못 보던 사이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좋은 뜻이죠?”
“물론.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살인범도 잡았다 그랬었지? 그날 우리 수아를 집에 데려다 줬고. 좀 늦어지만, 정말 고맙다.”
진심이 느껴지는 감사의 말.
서주환은 회귀 전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눈물을 쏟아 내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서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당연한 건데요, 뭘.”
“당연하기는? 대단한 거지. 무척 듬직해졌어.”
유순옥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여보. 이 정도면 수아시집보내도 되겠는데요? 주환아, 우리 수아 언제 데려갈 거니?”
“쿨럭.”
서주환은 난데없는 질문에 사레가 들렸다.
옆에서 함께 밥을 먹던 한수아가 소리쳤다.
“아, 엄마아! 갑자기 왜 그래!”
“어머, 얘 봐라? 부끄러워하는 거니? 너 주환이랑 결혼할 거라고 입이 닳도록 노래 불렀었잖니.”
“그건 십년도 더 전에 어릴 때잖아!”
“5년 전에도 주환이가 안 놀아준다고 삐지더니?”
“그, 그때도 어리긴 마찬가지지.”
“얼마 전에도 ‘환이 오빠가 이제 나랑 놀아줘!’ 그러면서 좋아했… 웁.”
“엄마 그만!”
한수아가 두 손을 쭉 뻗어서 유순옥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도와달라는 듯 아빠인 한정석을 바라본다.
하나뿐인 딸의 눈빛에 한정석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진지해진 얼굴로 서주환을 응시했다.
‘헉. 한 소리 들으려나?’
한정석의 딸 사랑은 이전부터 대단했다. 하기야 한정석이 아니라도 한수아 같은 딸이라면 누구든 애지중지 할 것이다. 딸 가진 아빠 마음이 다 똑같지 않겠는가.
서주환은 긴장한 채 슬쩍 밥 수저를 내려놓았다. 덩치가 180을 한참 넘는 한정석이 말없이 노려보니 압박감이 상당했다.
가만히 응시하던 한정석이 말문을 열었다.
“서주환이.”
“예, 예!”
“거 돈은 필요 없으니까 몸만 오게.”
“…예?”
“나는 가능한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구만. 손주도 빨리 보고 싶고.”
“아빠!!”
“아이고 귀청이야. 뭐가 문제냐? 서가네랑 사돈 맺으면 좋지. 수아 너 주희랑도 단짝이잖냐.”
“그거랑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야!”
“에잉. 쯧쯧. 거 주희랑 학교 같이 다니겠다고 학교도 늦게 가고, 주환이 좋다고 화장실까지 졸졸 따라다니고. 그 정도면 말 다했지. 헉. 설마 우리 딸, 벌써부터 남자 갖고 노는 거니?”
“이, 이익!”
이제 무어라 말도 못하고 빨개진 얼굴로 잇소리만 내는 한수아였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한정석과 유순옥은 하하호호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 자기들 딸 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수아 놀리는 맛이 찰지긴 하지.’
문제는 그 장난이 그한테까지 확장된다는 것이었지만.
“그래서?”
“예?”
“거 답을 줘야지.우리 딸 안 데려갈 건가? 설마?”
아직 끝난 게 아니었구나.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야 수아 같은 예쁜 딸 보내주신다면 감사하죠. 절 받으실래요?”
“오, 그럼?”
눈을 반짝이는 한정석과 화가 난 듯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한수아.
그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런데! 수아 의견도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아직 너무 어리기도 하니까 이 건은 한 10년 후에나 다시 얘기하는 게 어떠신지…?”
“에잉. 그건 너무 늦는데. 5년으로 타협하지.”
5년이면 한수아에게 남자친구가 생기고도 남을 시간이다. 계산을 마친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5년으로 하시죠.”
“음. 그럼 5년 뒤에 다시 얘기하세. 예비 사위.”
“좋습…”
그때.
“좋긴 뭐가좋아! 뭘 협상하는 거야!”
한수아가 드디어 폭발했다.
*
식사를 마치고 서주환은 한수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곰인형 엄청 많네.’
곰인형 기호증 같은 페티시를 봐서 그런지 괜히 신경 쓰인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털고 의자에 앉아있는 한수아를 바라봤다. 무릎을 감싼 채 그를 보고 있던 한수아가 흥! 하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서주환은 너무 놀려먹었나 후회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수아야. 많이 삐졌어?”
“…나 안 삐졌거든?”
“입술부터 집어넣자, 수아야.”
“…흥.”
“에이. 아까 그건 그냥 아저씨 장단 맞춰준 거라니까? 그렇게 안 하면 아저씨 장난 끝도 없는 거 알잖아.”
“…환이 오빠 멍청이.”
“멍청이 할 테니까 한 번만 봐주라.”
“다음에 맛있는 거 사주면.”
“그럼! 뭐든 말만 해. 내가 주희는 몰라도 너는 사준다.”
“…그럼 주희도 같이.”
“엑.”
“싫어?”
“어휴. 알았다. 같이 사줄게.”
항복을 선언하자 한수아의 얼굴이 스르륵 풀렸다. 댓발 튀어나왔던 입술도 들어갔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헤헤. 사실 나 진짜 안 삐졌어. 오빠한테 맛있는 거 얻어먹으려고 연기한 거야.”
그 말에 서주환은 피식 웃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또 사실대로 말하는 게 한수아다웠다.
“자, 그럼 방송 시작해볼까?”
“응! 아, 주희한테 전화해야되겠다.”
서주희는 매니저로서 채팅창 관리를 해야 한다며 집에 남았다. 시청자도 없는 채팅창을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건지.
“딱히 걔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안돼. 주희랑 같이 하기로 했어. 우리 주 매니저 따돌리지 마.”
“네이.”
그렇게 서주희와 통화하기를 잠시.
한수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컴퓨터 켠다? 아, 맞다. 오빠 얼굴 나와도 돼? 부담스러우면 마스크 껴도 되는데. 캠을 내릴까?”
“아냐. 상관없어. 이미 다 팔린 얼굴이라.”
혹시 어그로를 끄는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오히려 좋다. 알아볼란가 모르겠다만.
윙-
전원 버튼을 누르자 낮은 기계음과 함께 컴퓨터가 순식간에 부팅된다.
집에 있는 고물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
방송하겠다고 최신 컴퓨터로 맞췄다더니 과연 대단했다. 심지어 고정 시청자가 한 명도 없는 하꼬가 방음부스도 있었다.
참고로 한수아네 집은 굉장히 잘 살았다.
“수아야, 방송 제목 내가 지어도 되지?”
“응. 괜찮아.”
“오케이. 어그로 좀 끌어볼까?”
생각해 놓은 제목이 있었다.
《싸이킥워치:20살 군필 여고생 출격합니다!》
20살, 군필, 여고생.
공존할 수 없는 키워드를 짬뽕시켰다.
“환이 오빠.”
“응?”
“이거 맞아?”
“그럼. 작명 센스 끝내주지?”
“…….”
말없이 올려다보는 한수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원래 고정 시청자가생기기 전에는 어그로가 중요한 법이다.
서주환은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거짓말은 아니잖아.’
한수아는 20살 여고생이 맞고, 그가 군필이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