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너 눈치 없는 애 아니잖아
혹한기 훈련이 끝난 뒤의 부대는 평화롭다. 간부들도 어지간하면 병사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여유로운 평화 속에서 얼마 남지 않았던 12월이 끝나고 신년이 되었다. 그 말은 즉, 서주환이 전역하는 해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서주환은 담배를 피면서 생각했다.
‘아, 섹스하고 싶다.’
신년이고 전역이고 간에 그는 크리스마스의 밤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바로 정소라와 서로의 육체를 격렬하게 탐했던 그날 밤 말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정소라에게 가서 섹스를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렇게 단호할 줄이야.’
서주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사실 이미 정소라에게 은근한게 신호를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묵묵부답이었다. 못 알아들었나 싶어 신호를 여러 번 보낸 어느 날에는 정소라가 그를 인적 드문 곳으로 데려갔었다. 그에 드디어 통했나 싶어 기대한 서주환이었으나, 되돌아온 건 한숨 섞인 질책이었다.
‘부대에서 왜 그래? 여기서 뭘 어쩌자고. 나는 그때 네가 내 말 이해한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니?’
‘…….’
‘주환아, 너 눈치 없는 애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서주환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솔직히 섭섭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쪽팔림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역사가 이루어졌던 크리스마스 날, 두 사람은 강렬한 몸의 대화만 나눈 게 아니었다. 특히 정소라의 경우 그의 고백을 거절하며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는지 토로했었다.
한데 그는 성욕에 빠져가지고 부대 안에서 섹스하자며 졸라대고 있었으니 뒤늦게 쪽팔림이 몰려왔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녀를 똑바로 볼 낯이 없었다.
‘아, 그래도 섹스하고 싶다.’
그럼에도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더 이상 정소라에게 이상한 눈빛을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막 아다를 뗀 32년산 아저씨의 정신과 20대 초반의 팔팔한 육체가 쓸데없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 이는 생각 이전에 본능이 시키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를 정력왕으로 만들어 준 몽마신의 축복이 지금에 와서는 독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서주환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가 성욕을 잊기 위해 실행한 것은 바로 격렬한 운동이었다.
“서주환병장님, 또 운동하러 가십니까?”
“응. 너도 같이 뛸래?”
“하하하… 전 괜찮습니다. 파이팅하십쇼!”
“오냐.”
서주환은 일과 시간이 끝나면 운동에 전념했다. 강도 높은 운동으로 몸을 지치게 만들면 성욕이 가라앉는다. 정확히는 그런 생각이 들 힘도 없게 만든다.
‘이참에 사람 몸으로 만들어야지.’
본래 이 당시 서주환은 병장이 되며 도진 게으름과 군대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무척 살이 올랐었다. 여기서 더 찌면 건강이 위험할 정도. 군대에서의 시간을 허무하게날리는 것보다 운동을 해서 살을 빼는 게 백 번 이득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그는 연병장을 열 바퀴 정도 돌고 나무 둥치에 기댄 숨을 몰아쉬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상태에서 무리하게달리기를 하면 관절에 무리가 온다. 때문에 세 바퀴를 걷고 한 바퀴를 가볍게 뛰는 식으로 운동했다.
서주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건 운동 일주일 째였다.
[업적, 『고도비만 탈출!』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300LP가 지급됩니다.]
일전에 달성했던 『상사와 떡방아 찧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초라한 보상. 하지만 루시의 말에 따르면 실상 LP의 주 수급은 이처럼 자잘한 업적 달성이었다.
서주환은 멍하니 메시지를 보다가 인상을 팍 구겼다.
“내가 고도비만이었다고?”
물론 살이 굉장히 찌긴 했지만 나름대로 힘도, 체력도 좋았다. 즉 체지방 대비 근육량이 많으므로 고도비만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서주환의 생각일 뿐이라는 듯 루시가 말해왔다.
[현재 주인님의 체지방률은 29.92입니다. 이제 간신히 고도미반을 탈출했죠.]
“…진짜?”
[예. 참고로 현재 주인님의 키는 171cm이고 체중은 87.5kg, 골격근량은 33.7kg입니다.]
“…인바디가 따로 필요 없네.”
골격근량까지 알려주는 루시. 서주환은 작게 감탄하다가 생각보다 더 망가져 있는 몸 상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가 그런 그를 위로했다.
[지금처럼 운동을 한다면 금방 정상 체중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럴까?”
[현재 주인님은 『몽마신의 축복』과 『헬창의 축복』을 같이 적용받고 있기 때문에 효율이 무척 잘 나옵니다. 그뿐 아니라 주인님께서는 잘못 부여됐던 업(業)이 정상화 되어 신체적으로도 계속 변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증거로 일주일 동안 키가 1cm 자라고 몸무게는 5kg 가까이 빠졌습니다.]
확실히 루시의 말대로다. 식단을 철저히 지키면서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니었건만 살이 쭉쭉 빠졌다. 17살 이후로 자라지 않았던 키도 자라기 시작했다. 설마 업(業)의 정상화가 신체적인 변화로까지 이어질 줄이야.
“좋아. 휴가 나가기 전에 80kg까지는 만들자.”
어찌 됐건 긍정적인 변화였기에 서주환은 더욱 열심히 운동에 몰두했다. PX에서 사 먹던 냉동은 아예 끊었고 나름대로 식단을 짜서 지켰다.
“오늘은 가슴이다.”
그는 체력단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서는 신나는 클럽 노래가 쿵쿵 울리고 있었다.
이는 운동을 좋아하는 어떤 병사가 분위기를 내겠다며 직접 카세트를 가져와서 만든 분위기였다. 그 병사는 일병 때 전자기기를 반입하려고 해서 간부들에게 욕을 무던히도 먹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설득해서 반입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덕분에 체단실 이용자가 늘어났고, 울진부대 병사의 평균 체력이 올라가는 결과를 만들었다.
“오, 주환! 오늘도 왔네? 너 요즘 엄청 열심히 한다.”
그 업적을 세운 병사가 바로 이정훈이었다.
안에 들어서자 체단실 죽돌이인 그가 서주환을 반겨주었다. 런닝 하나만 입은 이정훈의 몸은 한눈에 봐도 대단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몸 곳곳에 근육이 잡혀있는 몸이다.
서주환은 보이지 않게 혀를 찼다. 하여간 세상 불공평하다. 안 그래도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 좋은 인간이 몸까지 좋다니.
[주인님도 가능합니다.]
루시의 응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지 다시 5일 정도가 지난 현재, 그는 목표로 했던 80kg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정확히는 키가 1cm가 더 컸고 몸무게는 4kg을 더 빼서 83.5가 되었다.
“형,나 벤치 할 건데 좀 도와줘.”
“몇 킬로?”
막 딥스를끝낸 이정훈이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 말을 놓고 형제처럼 지내고 있었다.
“음. 일단 70으로 시작해서 내리면서 하게."
“벌써?”
“엊그제 60 해보니까 할 만하더라고.”
“이야, 너는 진짜 타고났다. 꾸준히만 하면 금방 100치겠는데?”
이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만큼 서주환의 성장 속도는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열흘 전에는 간신히 50kg을 들었는데 벌써 20kg을 증량하다니. 초보자일수록 초반에 무게가 빨리 는다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빠른 감이 있었다.
이게 다 축복의 효과 덕분이었다.
1. 몽마신의 축복(60일)
▶ 효과1: 성(性)과 관련된 행운이 대폭 상승한다.
▶ 효과2: 어떤 일을 숙련할 때 200% 추가 효과를 받는다.
▶효과3: 정력이 샘솟는다.
2. 헬창의 축복(60일)
▶ 효과1: 남성 호르몬이 대폭 상승한다.
▶ 효과2: 모든 운동의숙련도가 200% 상승한다.
▶ 효과3: 근육의 회복 속도가 300% 상승한다.
『몽마신의 축복』은 운동 능력을 빠르게 숙달시키고, 『헬창의 축복』은 그의 근합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더불어 『헬창의 축복』이 가진 숙련 효과는 『몽마신의 축복』과 중첩된다.
모르긴 몰라도 나 운동 좀 한다하는 헬창이 이러한 축복 효과를 본다면 당장 종교를 갈아탈 터였다.
벤치에 누운 서주환은 빈 바로 준비 운동을 한 후 바벨 양쪽에 각각 25kg씩 매달았다. 바 무게가 20kg니까 토탈 70kg이었다.
‘좋아. 대흉근을 조져보자!’
그는 여유증이라도 걸린 듯한 이 빌어먹을 가슴살을 하루 빨리 없애고 싶었다.
이정훈이 바의 중간 부분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자, 안 떨어지도록 보조할 테니까 들어 올려!”
이로써 부상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다. 운동을 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흡!”
숨을 참고 단번에 들어 올린다. 그리고 한 개, 두 개, 세 개… 여덟 개씩 두 세트를 넘겼다. 이제 마지막 세트다.
“여섯! 두 개 남았어. 힘내.”
“으으윽.”
“일곱!”
“흐읍!”
“여덟! 하나만 더 하고 끝내자.”
이정훈이 하나만 더를 외쳤다. 서주환은 이를 악물고 온 힘을 짜냈다.
“흐으읍!”
“아홉! 마지막으로 하나 더!”
“흐으으으읍!”
서주환은 진짜 젖 먹던, 아니 떡 쳤던 힘 가지 다 짜내어 열 개 째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정훈은 또 다시 외쳤다.
“진짜 마지막!”
야 이 개새끼야.
*
내일은 서주환이 말년 휴가를 나가는 날이다.
4중대에는휴가 전날에 야간 근무를 서는 전통이 있다. 중대 인원이 적어서 남은 인원들을 배려하다보니 전통이었다. 대신 휴가 복귀 날에는 근무를 세우지 않는다.
띠띠띠. 띠리리리-.
탁.
시간이 되자 설정해 놓은 시계가 울렸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즉시 시계를 껐다.
‘어우, 피곤해.’
새벽 근무 중에서도 03:30은 너무 피곤하다. 두 시간씩 하는 위병소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기상 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는다. 다시 자기엔 애매한 시간. 그렇다고 안 자고 깨어있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그래서 부대 내 모든 병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근무 시간 중 하나였다.
철컥. 스으으.
생활관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전투복을 입은 병사 한 명이 들어왔다. 다음 근무자를 깨우러 온 불침번이다. 그는 생활관을 슥 훑어보다가 서주환과 눈이 마주쳤다.
“아, 주환 씨 일어났네요? 정훈 씨도… 일어났군요.”
“네. 고생하세요.”
“고마워요. 주환 씨도 수고하세요.”
적당히 인사를 주고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준비 다 됐어?”
“어. 내려가서 담배나 한 대 피고 가자.”
“그래.”
짬 좀 있는 사람과 근무를 서면 이게 좋다. 준비가 빠르니까 여유롭게 담배 한 대 필 시간이 충분하다.
두 사람은 담배를 피고 지휘통제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당직사령과 부관이 보였다. 서주환은 당직사령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철. 오늘 중댐이 당직사령이셨습니까?”
정소라가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피곤한 눈길로 경례를 받았다. 그러다 옆에 있는 이정훈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둘이 근무야?”
“예.”
“왜 선임급 둘이 근무를 서?”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는 정소라.
본래 근무는 선임급 한 명과 후임급 한 명이 투입한다. 사수석에서 선임들이 하는 걸 보고 배우게 하기 위해서다. 즉, 말년병장인 서주환과 다음 달에 병장이 되는 이정훈은 함께 근무에 들어갈 일이 없다.
서주환은 조금 멋쩍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근무라서 정훈이랑 서려고합니다.”
“아아.”
정소라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주환은 이번에 휴가를 갔다 오면 더 이상 근무 설 일 없이 전역한다. 때문에 가장 오래 봐왔고 친하게 지냈던 이정훈과 마지막 근무를 서기 위해 근무일자를 조정했다. 물론 이정훈도 동의한 일이었다. 다만 정소라에게 따로 보고하는 걸 깜빡한 게 문제였다.
“죄송합니다. 미리 보고했어야 했는데.”
“흠. 됐어. 지금까지 열심히 했는데 그 정도야.”
다행히 정소라는 별 말 없이 넘어갔다.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이정훈이 조그맣게 예스를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투입 될 탄약고 근무자들이 도착했다. 근무자들은 탄 불출을 받고 투입 경로를 따라 근무지로 향했다.
각자 사수석,부사수석에 들어간 두 사람은 CCTV 각도를 피해 적당히 총을 내려놨다. 이 정도 짬을 먹으면 CCTV의 사각 정도야 줄줄 꿰고 있었다.
이정훈이부사수석 철창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주환이 네가 벌써 전역이라니.”
“아직 보름 정도 남았어.”
“뭐래. 휴가복귀하면 다음날 전역이면서.”
“흐흐. 형은 휴가 많이 모아놨어?”
“휴가? 흠. 솔직히 좀 부족했는데, 이번에 네가 양보해준 것 덕분에 여유가 좀 생겼지. 진짜 고맙다.”
둘은 눈치껏 주변을 경계하며 잡담을 나눴다. 함께 군 생활을 한지도 1년을 넘겼기에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많았다. 사실 서주환으로서는 10년 전 일인지라 좀
가물가물 했지만 이정훈이 화두를 던지면 신기하게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 잡담을 나누던 중 이정훈이 문득 기억났다는 듯 질문했다.
“너 외박 때 어떻게 됐냐? 떡은 쳤어?”
그 질문에 서주환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