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바닥에 뻗은 정소라
- 그럼 환이 오빠, 다음에 휴가 나오면 봐! 메리크리스마스!
“…그래. 메리크리스마스.”
그렇게 전화를 마친 서주환은 한참을 멍한 정신으로 누워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심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 욕실로 가 냉수로 세수를 했다.
“어우. 이제야 정신이 드네.”
서주환은 물기를 닦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대로 옛날 기억에 매몰되어봐야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괴롭다면 바꾸면 된다. 과거로 되돌아왔으니 못할 게 무어란 말인가.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았다. 벌써부터 우울해 하고 있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어디 보자."
서주환은 휴대폰을 꺼내 초록창에 들어갔다. 검색해볼 게 하나 있었다. 정소라의 페티시였던 Fat Admirer. 정말 말 그대로의 뜻인지 궁금했다.
【Fat Admirer: FA라고도 줄여 부르며, 뚱뚱한 몸매를 찬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포르노에서는 BBW(Big Beautiful Woman) 또는 BBM(Big Beautiful Man)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오…….”
설마 했는데 진짜로 비만 찬양자를 일컫는 말일 줄이야. 그 정소라의 페티시가 이런 거라니. 분류 등급이 下로 표기되어 있던데 어느 정도의 뚱뚱함을 좋아하는 걸까.
“이거 참… 좋아해야 되는 건가?”
설마 뚱뚱한 몸에 감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의문을 해결하고 나니까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물음표로 표기되어 있던 中급 페티시는 뭘까?
“설마 마조히즘이나 사디즘 같은 건 아니겠지?”
마조히즘이란 피학성애(被虐性愛)라고도 하는데, 특정 상황에서의 학대를 성적인 쾌감으로 받아들이는 걸 말한다. 이러한 성향의 사람을 마조히스트(masochist)라고 부른다. 반면 사디즘은 가학성애(加虐性愛)라고 하며, 마조히즘과 반대 되는 성향을 뜻한다. 그리고 의외로 낮은 강도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비교적 흔한 페티시라고 알려져 있다.
“에이. 설마.”
어쩐지 팔에 닭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
서주환은 정해진 시간이 되기까지 웹소설을 읽었다. 과거로 돌아와 옛날 작품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웹소설을 읽던 그는 창밖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침대를내려왔다.
“슬슬 가볼까.”
작업을 치러 갈시간이었다.
*
거창하게 작업을 친다고 했지만, 사실 서주환의 계획은 대부분 회귀 전의 기억과 행운에 기댄 부실한 것이었다.
기억에 의하면 오늘 정소라는 영양군 읍내에서 남자와 소개팅을 한다. 그리고 정말 이해가 안 되지만, 소개팅에 나온 남자는 정소라를 차버린다. 이후 그녀는 혼자 고깃집에 들어가서 상당한 양의 술을 자작한다. 이게 그가 알고 있는 미래였다.
이러한 정보를 알고 있는 이유는 이 날 1대대3중대장인 박경수 대위가 이곳에서 그녀를 봤기 때문이었다. 박경수는 1대대에서 가장 입 싸기로 소문난 사람이었고, 그가 본 이상 당연하게도 정소라에 대한 소문은 1대대 전체에 퍼졌다. 남자들만 있는곳에서 정소라 정도 되는 미녀가 차였다는 건상당히 흥미로운 가십거리였다.
‘분명 해식당이라고 했었지?’
해식당은 이탈리아 요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음식점이다. 가격대가 상당히 있는 곳이라서 서주환의 지갑 사정으로는 들어가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는 그가 숙소를 늦게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낮부터 해식당에 들어가는 대신, 날이 어두워진 후 그 주위를 돌며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정소라를 찾을 생각이었다.
‘지금 시간이면 막 식당에서 술 마시고있을 건데….’
현재 시각은 막 8시가 조금 넘은 참이다. 9시쯤 두 병 이상 마시고 있는 걸 봤다고 했으니 슬슬 마시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술을 다 마시기 전에 정소라가 있는 식당을 찾아야 했다.
‘어디야, 도대체?’
안타깝게도 그 식당의 이름까지는 모른다. 대충 해식당 근처에 있을 거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하아. 이거 찾을 수 있는 거 맞나?”
한참 거리를 돌아다니던 서주환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대책 없이 움직이는 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좁은 동네고 몇몇 정보가 있다지만 일일이 식당을 돌아다니며 정소라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은 굉장히 낮았다.
사실, 찾는다고해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위수지역을 벗어난 걸 대놓고 알리는 셈이니 빡빡한 정소라의 성격상 어쩌면 징계를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어지간하면시말서 한 장으로 끝나겠지만, 아무래도 쫄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헤매고 다녔을 때였다.
[성(性)에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서주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맞지?”
정소라가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서주환은 그녀를 만났음에도 기쁘지 않았다. 애타게 찾기야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만나는 건 원치 않는 전개였다.
“역시 너구나.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리 말하는 정소라의 얼굴이 곧 날카롭게 변했다. 그녀가 가늘게 뜬 눈으로 서주환을 보며 말했다.
“울진읍에 숙소 잡았다면서?”
“그, 그게…”
“설마 점프한 거?”
“…….”
“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주환 네가 어떻게! 내가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네 말은 의심 안 하고 믿는데 그걸….”
“그, 그게 아니고….”
“중대장은 실망이 크네?”
“…죄송합니다.”
당황한 그는 제대로 된 변명도 하지 못하고 다만 사죄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려 할 때, 다시 한 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순간 메시지 너머의 시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 하나. 불과 하루 전에도 부대에서 얼굴을 본 사람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며 남자의 직책을 말했다.
“헉. 3중대장님?”
“어? 뭐? 박경수 대위?”
그 말에 서주환보다 오히려 정소라가 더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더니 목이 꺾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되돌아왔다. 그녀 또한 박경수의 성격을 아는 만큼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서주환과 정소라는 잠시 시선을 맞추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 한 마디도 없이 합의를 마친 둘은 얼른 박경수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정소라는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 계산 안 했는데….”
“계산 말입니까?”
“밥 먹다가 잠깐 바람 쐬러 나왔던 거거든. 그래서 옷이랑 가방도 다 가게 안에 있어….”
그리 말하는 정소라의 얼굴은 꽤 붉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미 술을 꽤 마신 모양인지 술 냄새도 진하게 풍겼다.
‘이거 기회 아닌가?’
서주환은 지금 이 상황이 둘도 없는 기회로 느껴졌다. 메시지도 행운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분명 어설픈 계획이었는데 몽마신의 축복 효과로 인해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아우. 하필이면 내가 있던 가게로 들어갔네. 저 인간이랑 엮이기 싫은데.
가게에 들어가야 되나 고민스런 얼굴로 자리를 서성이는 정소라. 그 모습에 확신을 갖는다.
서주환은 돌연 결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중대장님.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어? 주환이 네가?”
“예.”
“너 괜히 들어갔다가 들키면 휴가 짤릴 수도 있다? 저 인간 엄청 꼰대인 거 알지?”
꽤취기가 올랐기 때문일까. 정소라는 평소보다 가벼운 말투를 구사했다. 그 모습이 꼭 동네 누나 같은 느낌이었다. 서주환은 씩 웃는 얼굴로 답했다.
“이미 중대장님한테 들켰지 않습니까. 대신 제가 무사히 가져오면 중대장님은 봐주시는 걸로… 어떻습니까?”
당돌한 말에 정소라가 얘 봐라? 하는 눈빛을 띄고 말한다.
“서주환 짬 많이 찼다? 중대장이랑 딜도 하고.”
하지만 그리 기분 나빠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녀가 곧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이 증거였다.
“알았으니까 무사히 가져와. 그럼 못 본 척은 물론이고, 오늘 저녁 내가 맛있는 걸로 쏠게.”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장난스러운 대화를 마치고 서주환은 모자를 꾹 눌러쓰며 가게안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박경수에게 들키면 큰일이었지만 어쩐지 들킬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오늘은 되는 날이었다.
*
서주환은 무사히 박경수의 눈을 피해 정소라의 짐을 챙겨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정소라가 환한 얼굴로 그를 맞아주었다.
“고마워, 주환아.”
“하하. 별 말씀을. 그럼 점프 봐주시는 거지 말입니다?”
“물론이지. 그리고 맛있는 저녁도 쏠게.”
“오.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응. 기대해도 돼!”
그리 말하는 정소라의목소리가 발랄했다.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기분이 꽤나 업된 모양. 하지만 그 기색이 시무룩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또 다른 사람 마주치면 어쩌지? 영 불안한데.”
“…설마 또 있겠습니까? 대대에서 여기까지는 꽤 멀지 않습니까. 주변 부대도 거리가 상당하고.”
서주환은 최대한 정소라를 설득했다. 기껏 잡은 기회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설득이 쉽지 않다. 정소라는 여전히 불안한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잠시 멈춰서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방법이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주환아, 네 숙소로 가자.”
“네?”
“이쪽에 숙소 잡았을 거 아니야. 그치?”
“잡긴 했습니다만…?”
“그럼 안주랑 술 사서 거기로 가자. 술 마실 거지?”
“어, 아. 예!좋습니다!”
잠시 당황하던 서주환은 곧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웬 떡이냐.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행운이라는 건 이토록 달콤한 거였구나. 그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맺혔다.
*
맛있는걸 쏘겠다던 정소라는 각종 회와 초밥 등의 안주는 물론이고 한 병에 5만 원씩 하는 사케를 세 병이나 구매했다. 혹시 부족할지도 모른다며 소주도 두 병을 샀으니 오늘 이걸 다 마시려면 날밤을 새야 할 듯 했다.
정소라는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안주와 술을 늘어놓고 세팅했다. 그런데 어째 그 모양새가 영 불안불안하다. 보다 못한 서주환이 술과 안주를 뺏어들고 대신 세팅하며 말했다.
“중댐, 술 많이 드셨습니까?”
“으음~ 조금?”
검지와엄지를 살짝 벌리며말하는 정소라. 그 모습이 꽤 귀여웠지만 서주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게에 들어갈 때 상 위에 있던 술병 두 개를 봤다. 한 병은 깔끔하게 비워져 있고 나머지 한 병도 반은 비워져 있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미 홍조가 든 얼굴로 조금이라 말 할 양은 아니었다.
어느새 회를 한 점 집어 먹은 정소라가 사케를 쫄쫄 따랐다. 서주환의 잔에도 가득 술을 채운 그녀가 술잔을 내밀며 말한다.
“첫 잔은 원샷인 거 알지?”
“하하. 알겠습니다.”
“자,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두 사람은 건배사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종이컵을 마주친 후 술을 털어 넣었다.
둘은 이런 저런 옛날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군대에서 함께 한 시간이 있으니 이야기 거리는 차고 넘쳤다.
정소라가 다시 술잔을 채우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하. 자! 전역 축하 기념이야. 가득 따라줄게.”
“벌써 전역 축하입니까? 어어? 넘칩니다!”
서주환은 넘치려는 술잔을 얼른 홀짝였다. 술잔을 비운 정소라가 말을 이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마시면서 축하하겠어? 의도치 않게 마시게 된 거지만, 주환이 너한테는 도움 받은 것도 많고 해서 얘기 좀 나누고싶었거든.”
“…제가 도움이 됐습니까?”
서주환은 묘한 기분으로 술을 홀짝이며 되물었다. 물론 이번 훈련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활약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이전에는… 글쎄? 다들 기피하기 바빴던 재수 없는 놈일 뿐이지 않았던가. 실제로 회귀 전 그의 자존감이 떨어졌던 이유 중 하나는 군생활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소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데?”
“예를 들면 어떤 거 말입니까?”
“음.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 네가 일병이었지? 당시에 너를 제일 많이 불렀잖아.”
“아, 그때 많이 구르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댐이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습니다.”
“뭐? 설마! 네가 일을 제일 잘해서 그런 거지. 그때 상, 병장들이 좀 그랬잖아?”
“아아. 기억납니다. 솔직히 개판이었습니다.”
“아하하. 맞아. 그래서 너한테 시킨 게 좀 많아.솔직히 네가 운이 좀 없긴 했어도 시키는 건 확실히 했거든. 덕분에 본의 아니게 많이 고생시켰네.”
이야기하다 보니 지나간 과거가 조금씩 떠올랐다. 확실히 당시에 4중대 상, 병장들은 하나같이 폐급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서주환과 이등병에 불과했던 이정훈이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었다. 특히 그의 경우는 스스로 운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더 열심히 움직였었다.
‘인정… 그게 뭐 별거라고 그리 집착했는지.’
속으로 그렇게 되뇌어 보지만, 그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무척이나 ‘별 거’ 였다. 비단 군 시절이 아닌 전역 이후에도 그랬다. 운이 없어서 남들보다 수 배 노력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그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다르지 않을지 몰랐다. 그렇기에 정소라의 말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리라.
서주환은 작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중댐.”
“어? 으응. 나야말로 고맙지.”
갑자기 바뀐 서주환의 분위기에 정소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얼떨떨하게 대답한다.
그렇게 군대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이 몇 순배나 돌았다. 군대 얘기만큼 맛있는 안줏거리도 없다고 하던가? 설마 그 얘기를 여자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게 정소라일 줄은 더더욱 몰랐고.
어느새 정소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혀도 좀 꼬이기 시작한 것이 제법 취기가 오른 듯 했다.
“중댐, 취하신 것 같은데 그만 마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냐. 나 안 취했어. 그리고 계속 중댐이 뭐야. 어차피 곧 전역하는 데 누나라고 불러!”
말 하는 걸 보니 엄청 취했다.
“어떻게 그럽니까? 아직 전역하려면 한 달은 남았습니다.”
“어어? 명령이야. 자, 이거 마시면 누나라고 부르기다?”
히히 웃으면서 모 드라마의 대사를 흉내 내는 모양새가 완전히 취한 모습이다.
서주환은 피식 실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평소랑 다른 모습을 많이 본다. 회귀 전에는 차갑게만 보였던 여자였는데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싶다. 그 개인적으로는 이쪽 모습이 더 인간미 있어서 보기 좋았다.
서주환은 그녀가 따라준 술을 마시고 기대에 화답했다.
“음. 누나? 이렇게 부르면 되나? 엄청 어색하네.”
“어? 말 놓으라고는 안 했는데에?”
“죄송합니다, 중대장님.”
“아, 농담이야. 재미없게.”
“하하. 그럼 말 놓는다?”
“벌써 놨으면서. 맘대로 해라~.”
살짝 혀 꼬인 소리를 내며 실실 웃는 정소라. 실눈처럼 감긴 눈웃음이 예쁘다.
“나 잠깐 화장실좀 갔다 올게.”
“어, 다녀와.”
정소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블라우스에 H치마를 입고 있어서 육감적인 몸매가눈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넋 놓고 화장실 문을바라보는데,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주환아, 칫솔 두 개인데 하나 써도 돼? 술 좀 깨려고.”
“어, 어어. 편하게 써.”
“고마워.”
잠시 후 화장실을 나온 정소라.
“아, 살겠다. 주환아, 나 술 깼어. 더 마시자!”
기어코 남은 소주까지 다 마실 생각인 모양이었다. 서주환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전에 나도 화장실 좀.”
그도 술 좀 깨지 않으면 더 마시기 힘들 것 같았다. 도수 높은 사케를 그 혼자 거의 두 병은 비웠으니 취기가 제법 올라왔다.
쏴아아아.
양치는 물론 쌓인 물도 한 발 빼고, 찬물로 세안을 하니 술이 좀 깨는 듯 했다. 그렇게 정신이 드니 떠오르는 생각 하나.
‘…이렇게 마시고만있어도 되나? 분위기는 어떻게 잡는 거지.’
생각보다 즐겁게 마시다 보니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애초에 여자랑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게 처음이었으니 뭘 어떻게 해야 분위기란 걸 만들 수 있는지도 몰랐다.
‘애인 없냐고 물어보기라도 해야 되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더 생각해봐도 좋은 수가 떠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일단 부딪혀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왔더니,
“쿠울….”
“어…?”
이미 바닥에 뻗은 정소라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