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위수 지역 이탈
갑작스럽게 뜬 상태창.
<정소라>
성별: 여성
나이: 27
키: 165cm
몸무게: 54kg
호감도: B
현재 성욕: C+
페티시: Fat Admirer(下), ???(中)
“헉!”
너무 놀란 나머지 헛바람을 들이켰다.
“왜 그래?”
“어디 아프십니까?”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정소라와 걱정하는 이정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먼저 정리하러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주환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자리를 피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흡연장으로 자리를 옮겨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았다.
‘설마 다른 사람의 상태창이 보일 줄이야.’
게다가 정소라의 상태창은자신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호감도, 성욕, 페티시 등의 항목이 있었던 것.
‘몽마신이라더니….’
스킬이나 축복도 그렇고 상태창까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정말이지… 바람직했다. 이거라면 모태솔로인 자신이라도 여자를 꼬시는 게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정소라는 여전히 높디높은 산 같았지만 말이다.
다만 의문인 점이 있었으니, 뜬금없이 정소라의 상태창이 왜 떠올랐냐는 것이었다.
‘여자 상태창만 떠오르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과 정소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성별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진작 안 뜨고 이제야 떴는지도 의아하다.
‘어떤 조건이 있는 것 같은데.’
접촉은 아닐 터다. 그런 거라면 정소라가 파스를 붙여줬을 때나 아까 넘어지는 걸 잡아줬을 때 떴었겠지.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그렇게고민하다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종이컵?”
분명 종이컵을 입에 가져갔을 때 상태창이 떠올랐다. 그 순간의 특이점이라면 그것뿐이었다.
‘설마 타액으로 활성화 된 건가?’
확신은 없었지만 높은 확률로 그럴 것 같았다. 만약 짐작대로라면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어차피 당장 더 실험할 상대도 없다. 상태창 활성화의 조건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현재 우선 순위는 상태창에 떠오른 정소라의 호감도와 성욕, 그리고 페티시였다.
‘호감도B, 성욕C+, Fat Admirer 하급?’
호감도와 성욕은 알겠다. 그런데 페티시 항목에 표기되어 있는 Fat Admirer은… 설마 말 그대로의 뜻인가?
“비만 찬양자라니 이게 뭔…….”
오류처럼 ?로 표기된 다른 페티시도 궁금해졌다.
*
훈련이끝난 다음날이기 때문일까?
간부들은 병사들을 터치하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만큼은 생활관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아아, 지휘통제실에서 알려드립니다. 금일 외박자는 지금 당장 지휘통제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점심때가 다가오자 외박자를 찾는 방송이 울렸다.
서주환은 옆에 있던 이정훈에게 인사하고 생활관을 나섰다.
“형. 저 가볼게요.”
“어. 아, 싸제 담배 사오는 거 잊지 말고!”
“옙.”
그는 대충 대답하고 1층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외박 나갈 시간이었다.
***
오늘 외박을 나가는 인원은 서주환을 포함해서 다섯이었다. 그들은 지휘 통제실에서 형식적인 교육을 받고 위병소 밖으로 나왔다. 밖을 나오자마자 병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역시 위병소 밖은 달라! 고작 문 하나 차인데 이렇게 다르다니!”
“그러게 말입니다.후읍. 이게 사회의 공기인가.”
유독 요란한 건 짬이 낮은 일병과 이등병이었다. 반면 상,병장들은 익숙하게 휴대폰의 정지를 풀고 택시를 불렀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병장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주환 씨. 혼자 나왔어요?”
“네. 민구 씨는 같은 중대원들이랑 나왔나 보네요?”
“하하. 맞아요. 다 같은 소대 녀석들이에요. 그나저나 혼자 택시 타면 돈 많이 나올 텐데 저랑 같이 타실래요?”
시내로 나가려면 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혼자 타면 돈이만 원 넘게 나간다. 그래서 보통 같이 나온 외박자들이 택시를같이 타고는 했다.
하지만 네 명이면 충분히 한 차에 탈 수 있지 않던가? 아무래도 배려해주는 것 같았다.
서주환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후임들이랑 같이 타고 가세요.”
“괜찮아요? 돈이꽤 나올 텐데….”
‘되게 착한 사람이네.’
그리 친한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챙겨주는 걸 보니 사람이 좋아 보였다. 같은 중대였으면 친하게 지냈을 듯 했다.
하지만 오늘은 진짜 괜찮았다.
“주환아, 오래 기다렸니?”
“강철. 아닙니다. 방금 나왔습니다.”
정소라가 태워주기로 했으니까.
“가자. 타.”
“옙. 민구 씨 저 먼저 갈게요.”
“아, 예에….”
사복을 입은 정소라를 보고 넋을 놓은 네 명의 병사.
“4중대장님이 저렇게 예쁘셨나?”
“예쁜 건 알고 있었지만….”
“와….”
그들을 뒤로하고 차가 출발했다.
*
서주환은 힐끗 눈동자만 움직여 옆을 보았다.
‘와. 숨 막히게 예쁘네.’
맨 얼굴일 때도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화장 한 모습을 보니 배우라고 해도 믿게 생겼다. 지금 정소라의 나이가 지금 스물일곱이던가? 이제 올해가 다 끝나가니 곧 스물여덟이고.
‘어떻게 저 얼굴이 이십 대 후반이야.’
직업 군인들은 나이보다 액면가가 늙어 보이는 게 보통인데, 정소라는 많아봐야 이십대 중반으로 보였다.
서주환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정소라의 상태창을 띄웠다.
성별: 여성
나이: 27
키: 165cm
몸무게: 54kg
호감도: B
현재 성욕: B
페티시: Fat Admirer(下), ???(中)
상태창을 확인한 서주환의 눈이 커졌다. 밀폐된 공간에서 페로몬의 효과가 작용 됐기 때문일까? 놀랍게도 정소라의 성욕이 어제보다 한 단계 올라가 있었다.
“주환아?”
“네? 네!”
서주환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상념에서 번뜩 깨어났다. 옆을돌아보니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 중대장님. 오늘 어디 중요한 데 가십니까?”
“어? 갑자기 그건 왜?”
난데없는 질문에 정소라는 눈에 띄게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부대 밖으로 나와서 그런 건지 평소보다 톤이 높은 여성스러운 목소리다. 어쩐지 말투도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이제껏 못 보던 모습이라 그렇습니다. 오늘 엄청 예쁘십니다. 배우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아하하. 칭찬이 과하네. 그래도 고마워.”
크게 부정하지는 않는 게 본인이 예쁘다는 걸 잘 아는 듯 했다. 결국 어디 가는지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안 말해도 알지만.’
정소라는 오늘 소개팅에 나간다. 정확히 소개팅인지는 모른다. 전생에 소문을주워들은 것이니 어쩌면 애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오늘 그녀가 어딘가로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었고, 결과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소문에 의하면 정소라는 오늘 남자에게 차인다.
서주환은 그 틈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왜, 바람맞은 사람은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상태라고 하지 않던가.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전해볼일이었다.
“주환아, 어디에 내리면 돼?”
“아.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고 쭉 가서 마트 앞에내려주시면 됩니다.”
“사랑마트?”
“예. 맞습니다.”
“알았어. 앞으로 5분이면 도착할 거야.”
“옙.”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서주환은 뭔가 더 대화할 거리가 없을까 고뇌했다. 하지만 선듯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디 여자랑 대화를 해봤어야지. 그는 여자는 고사하고 업무적인 걸 제외하면 동성과도 대화를 많이 안 해본히키코모리였다.
그때 정소라가 그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주환아. 물어볼 게 있는데.”
“아, 예.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향수 뭐 써?”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으음. 향수 어디거 쓰는 지 궁금해서. 저번 휴가 때 가져왔어? 향기 되게 좋다.”
그리 말하는 정소라의 얼굴에는 미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어쩐지 숨도 조금 달뜬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호감도와 성욕이 B+까지 올라가 있었다. 생각보다 페로몬 스킬의 효과가 엄청났다.
“딱히 쓰는 향수는 없습니다만….”
“어? 정말?”
“예.”
“그럼 최근에 바디로션이나 샴푸 바꿨니?”
“그냥 쓰던거 쓰고 있습니다.”
“이상하네…. 원래는 이런 향이 안 났는데.”
정소라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와중에도 콧잔등이 움찔 거리는 게 향을 맡는 모양새다.
‘개코가 따로 없네. 페로몬 향이 그렇게 진한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팔뚝에 대고냄새를 맡아봤지만 본인의 체향이라 그런지 크게 달라진 점을 못 느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를세운 정소라가 서주환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병장이니까 말 안 해도 알지? 사고 치면 안 돼.”
“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그럼 외박 즐겁게보내고.”
“옙. 중대장님도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강철.”
“그럼 갈게.”
차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출발하기 전 정소라의 얼굴은 약간이지만 여전히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러다 괜히 얼굴도 모르는 놈팽이 좋은 일만 해주는 건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서주환은 정소라의 차가 안 보이게 되었을 즘 얼른 택시를 잡았다.
‘죽 쒀서 개 줄 수는 없지.’
택시에 탄 그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영양군으로 가주세요.”
“으잉? 영양군?”
“예!”
“거기는 원래 가는 곳이 아니라 추가 요금이 좀 많이 붙는디….”
“윽.”
순간 고민이 되었다. 안 그래도울진에서 영양군까지 택시로 가면 돈이 상당히 깨진다. 거기에 추가요금이 붙는다면 거진 10만원은 나올 터였다.
그렇다고 안 탈 수도 없는 게, 울진의 거지 같은 교통편으로 다른 경로를 이용하면빨라도 여섯 시간은 걸린다. 반면 택시를 탈 경우 두시간이면 충분했다.
“젠장. 그래도 가주세요.”
아무래도 돈이 좀 깨질 듯 했다.
*
영양군에 도착한 서주환은 우선 옷가게부터 들른 후 숙소를 잡았다. 대대에는 적당히 울진군 읍내에 있는 모텔에 숙소를 잡았다고 보고했다. 직접 감찰을 오는 것도 아니니까 점프(위수지역을 벗어난다는 은어)를 뛴 줄은 모를 것이다.
그렇게 모자로 빡빡 머리를 감추고 평상복을 입으니까 제법 민간인 같은 모습이 되었다.
“어휴. 대체 얼마를 쓴 거야?”
택시비만 거의 10만원이 나왔다. 여기에 옷을 사 입고 숙박비까지 계산하니 벌써 20만원이 넘게 깨졌다. 그나마 이정훈에게 외투를 빌려와서다행이었다. 외투까지 샀으면 최소 5만원은 더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뭐하지?”
마땅히 할 게 없다. 점심은 이미 옷을 사면서 먹었고, 숙소 밖으로 나가자니 혹시라도 너무 일찍 정소라를 만나거나 다른 간부를 만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럴 확률은 낮겠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도 조심하고 싶었다.
그렇게 멍하니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는데,
-지이잉.
예상치 못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 서주희. 그의 여동생이었다.
서주환은 아차 하는 생각으로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훈련 끝나면 바로 전화한다는 게 정소라 생각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화를 받자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어? 뭐야? 오빠가 전화를 왜 받아?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보다 훨씬 앳되고 발랄한 목소리다. 새삼 10년의 세월을 돌아왔다는 사실이 확 체감되었다.
서주환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나한테 걸었으니까 받지. 그럼 누가 받아?”
- 아니! 내 말은 어떻게 받았냐고!
“잘?”
- 야!
“네 살이나 많은 오빠한테 야가 뭐냐?”
- 아 진짜! 짜증나!
장난으로 대꾸하니 성난 목소리가 즉각 돌아온다. 동생 서주희는 누르면 누르는 대로 튀어오르는 반응 좋은 녀석이었다.
서주환은이쯤 놀리기로 하고 제대로 된 답을 말해줬다.
“큭큭. 포상 외박 나왔어. 그런데 왜 이 휴대폰으로 전화한 거야? 수신용 폰 있잖아.”
- 수신용으로 먼저 했었어. 아무도 안 받아가지고 혹시나 해서 여기로 전화해본 거고. 그런데 너는 외박 나왔으면서 집에 전화도 안 하냐?훈련 끝나면 전화한다고 했잖아. 엄마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냐!
이게 말로만 듣던 그라데이션 분노인가? 원래도 툭툭 쏘는 어투였지만 끝에 가서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래도 별로 화는 안 난다. 싸우자는 것처럼 말해도 내용은 결국 그를 걱정해서 전화했다는 것이었으니까.
“많이 걱정했냐?”- 뭐? 내가? 웃겨. 엄마가 전화해보라고 해서 한 거거든.
“응. 고맙다.”
- …재수없어. 너 서주환 아니지?
“맞으니까 그만 너너 거리고. 어머니가 옆에서 뭐라고 하는 거 다 들린다. 어머니 바꿔봐.”
- 흥. 엄마 여기 오빠 새끼가 바꿔달… 아야! 아! 그만 때려요!
동생의 등짝 터지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도 선명히 들렸다. 서주환은 어쩐지 즐거운 기분이 들어 낄낄대며 웃었다.
- 주환이니?
“네. 어머니. 바로 연락 안 드려서죄송해요. 걱정 많이 하셨어요? 막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 얘도 참. 신경 쓰지 마.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주희 얘가 괜히 요란 떠는 거야.
어머니의 말에 서주환은 씁쓸하게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그의 불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그불행한 운수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싹이 보였다. 20년 넘게 그를 키운 부모이니 어찌 그 불운을 모를까. 이 때문에 그의어머니는 그가 훈련에 들어간다고 할 때면 걱정스러운마음으로 무사히끝마쳤다는 연락을 기다리곤 했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서주환은 괜히 더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저 이번에 훈련 잘해서 포상 받았어요! 외박도 그래서 나온 거예요!”
- 어머. 정말? 무리해서 어디 다친 건 아니지?
“하하. 제가 누구 아들인데요. 이번에는 다친 데 하나도 없어요. 걱정 마세요.”
- 다행이다.
“엄마는 요즘 어떠세요? 장사는 잘 돼요?”
사실 그가 회귀하기 전 산에서 구른 몸뚱이 때문에 아직도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 할 필요는 없으리라.
서주환은 선의의 거짓말을 시작으로 오랜만에 연락하는 가족과 즐거운대화를 이어갔다. 어느새 슬쩍 다가 온 아버지와도 부자간의 대화를 나누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꽤 오랜 대화가 끝나고,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 오빠! 환이 오빠!
당연하게도 친동생이 이렇듯 친근하게 말 할 리가 없다. 이 목소리는 친동생인 서주희보다 더 여동생처럼 생각했던, 또 그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던 목소리.
- 어? 왜 목소리가 안 들리지? 주환 오빠? 오빠, 끊었어? 히잉…….
회귀 전, 자살했던 소꿉친구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