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행군
지휘 통제실에는 대대장을 비롯한 참모부와 각 중대의 간부들이 자리해 있었다. 1대대 간부 전원이 모인 셈이었다.
서주환은 당당히 들어왔던 것과 달리 잔뜩 긴장한 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서주환 병장.”
“병장, 서주환!”
“기역자 후레쉬를 파손시켰더군?”
“죄송합니다!”
보급품 파손. 서주환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유였다.
서주환은 훈련 중 발광장애물을 만들기 위해 기역자 후레쉬를 커터칼로 갈아냈다. 당시에는 대항군을잡기 위해 뒤를 보지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명백한 보급품 파손이었다. 그 부분을 지적 받으니 혹여 징계를 먹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억울해!’
서주환은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기역자 후레쉬를 이용한 발광장애물 제작은 그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회귀 전, 이번 훈련에서 대항군에게탈탈털린 후 분노한 대대장의 지시로 나온 물건이었다. 발광장애물이 보급 되지 않으니 직접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탄생한 물건. 덕분에 커터칼로 기역자 후레쉬 겉면을 갈아낸다고 병사들이 개고생을 했었다. 덧붙여 이 아이디어는 그의 직속상관인 정소라 대위가 낸 것이었다.
‘젠장. 그런데 그건 회귀 전이잖아.’
중요한 건 그게 아직 이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억울함을 토로한들 먹힐 리가 없었다.
그때 대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죄송하긴! 자네 덕분에 3대대에 제대로 한 방 먹여줬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나?기역자 후레쉬를 이용해서 발광장애물을 만들다니 대단해! 그렇지 않나?”
대대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자 간부들이 기다렸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하하. 맞습니다. 역시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발상이 기발합니다.”
“상황을 파악하는 눈은 어떻고요. 샛길을 발견하고 신속하게 무전으로 대응한 게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는 진지 위장이 더 대단하던데요. 철수 전에 가보니까 무슨 요새를 만들어놨습니다.”
“맞습니다.한참 들여다보지 않으면 주변 풍경이랑 구분이 안 갔습니다.”
“4중대 분대장이라고 했지? 4중대장이 병사를 아주 잘 키워놨어.”
서주환에게는 물론이고 직속상관인 정소라에게도 칭찬이 연이어 쏟아졌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정소라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인사과장, 이 친구에게 4박5일 포상 하나 챙겨줘. 오늘 영웅한테 그 정도는 해줘야지.”
대대장님 만세!
오늘만큼은 대대장의 대머리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
서주환은 행정반에 들어가기 전 다시 한 번 스킬을 점검했다.
1. 페로몬(Rank: B)
▶ 효과1: 보다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는 매력적인 향기를 발산한다.
▶ 효과2: 페로몬을 맡은 이성의 생리, 흥분 작용을 일시적으로 미미하게 높인다.
스킬 업 쿠폰(B)을 통해 강화된 페로몬의 효과는 눈에 띄게 바뀌어 있었다. 이 정도면 이성을 유혹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될 듯했다.
‘유혹하려면 일단 가까이 있어야겠지.’
아무래도 냄새로 유혹하는 스킬이니만큼 가까이 있을수록 효과가 강할 거라는 짐작이었다.
서주환은 심호홉을 한후 행정반의 문을 열었다. 이제 막 위장을 지우고 왔는지 물기 어린얼굴의 정소라가 보였다. 지난번과 달리 완벽히 지워진 상태의 맨 얼굴이었다.
“강철. 용무 있어서 왔습니다.”
“어, 그래. 주환아. 무슨 용무?”
오늘 활약이 효과가있었던 걸까. 어쩐지 정소라의 목소리가평소보다 부드럽게 들렸다.
서주환은 의식적으로 정소라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중대장님, 이번에 받은 포상 이정훈 상병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
“어? 포상을 양보하겠다고?”
정소라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갑자기 4박 5일짜리 포상을 양보하겠다고 하니 놀랄 만도 했다.
서주환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사실 포상 받아봐야 저는 사용하지도 못 합니다. 곧 전역이라….”
“아, 그러고보니 전역이 얼마 안남았지?”
“예. 1월 28일 전역입니다.”
서주환은 이미 1월에 14박 15일짜리 휴가를 나가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복귀 후 다음날 전역이다.
결국 받아봐야 쓰지도 못하는 포상, 그냥 허공에 날리느니 군 생활 동안 그를 많이 도와준 이정훈에게 양도하는 게 훨씬 나았다.
“와. 새삼 시간 빠르네. 주환이 네가 벌써 그렇게 됐구나.”
“하하. 진짜 그렇습니다.”
“말년에 훈련 받느라 고생이 많네. 후후.”
“아닙니다. 마지막에제대로 한 건 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은 것일까. 정소라가 싱긋 미소 지었다.
‘크으. 예쁘다.’
이제 막 위장을 지워낸 터라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는데도 감탄이 나왔다. 저런 머리를 리프컷이라고 하던가? 여자가 숏컷이면 남자랑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정소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차.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목적을 잊을 뻔했다. 그는 정소라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중대장님, 사실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부탁?”
“예. 저… 훈련 끝나고 외박 안 되겠습니까?"
“외박? 미리 신청 안 했어?”
“사실 제가 10월에 외박을 이미 나갔습니다….”
서주환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눈썹을 긁적였다.
본래 외박은 분기에 한 번만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부탁하는 건 오늘 세운 공을 믿고 지르는 말이었다. 과연 평소 FM을 추구하던 정소라가 허락해 줄지가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그때 정소라가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외박 나가.”
“저, 정말입니까?”
“그래. 원래 안 되는 거 알지? 포상 대신이야.”
“감사합니다! 강철!”
서주환은 기쁜 마음을 경례로 표현했다. 그를 본 정소라가 다시 한 번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이만 나가보라고손짓했다.
“대신 내일 행군 준비 잘 하고.”
“옙!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잘 자.”
“감사합니다. 중대장님도 편안한 밤 되십시오!”
서주환은 행정반을 나와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이미 취침소등이 되어 있는 터라 조용히 신발을 벗고 침낭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취침을 위해 눈을 감는데 정소라 대위의 웃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웃는 얼굴 엄청 예쁘네.’
이렇게 웃어주는 여자가 얼마 만이더라. 웃음이 드문 정소라여서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았다.
‘외박 때가 기회다.’
오늘은 23일 목요일이고, 이번 주 토요일은 25일이다. 그리고 그 날은, 정소라가 소개팅에 가는 날이었다.
*
12월 24일 금요일.
누군가에게는 설레는 크리스마스이브겠지만, 서주환을 비롯한 병사들에게는 혹한기 훈련 마지막 날일 뿐이었다.
“행진간에 군가한다! 군가는, 전우!”
“전우!”
병사들이 목 높여 군가를 불렀다.
““겨례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완전 군장 40km 행군.
현재 1대대 인원들은 일렬로 길게 줄지어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그리고 서주환은 중대 깃발을 들고 행렬 가장 앞줄에서 걷고 있었다.
“이 짬에 기수라니…….”
본래 지금까지 기수는 일병들의 담당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중대장이 나를 기수로 지목했다. 분명 회귀 전에는 기수를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외박을 허락 받은 마당에 거절 할 수도 없었다.
“더럽게 무겁네.”
그렇게 투덜대는데, 갑자기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정소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했나?”
“아, 아닙니다.”
혼잣말을 들은 것인지 앞에 있던 정소라가 뒤를 돌아봤다. 서주환은 기겁해서 보란 듯 깃발을 절도 있게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알만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는 정소라. 그녀가 걸음을 조금 늦춰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조금만 힘내. 대대장님이 주환이 너를 눈여겨봐서 이게 모양새가 좋거든.”
“하하하….”
그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젠장, 전역할 때 다 됐는데 무슨 놈의 관심인가. 차라리 없는 사람 취급해주는 게 포상이거늘.
그때 정소라가 예상치 못한 달콤한 보상을 제안했다.
“대신 내일 외박 나갈 때 차로 태워줄게.”
“헉. 정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나도 시내에 나가야 되거든.”
“감사합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는 밀폐된 공간이 아니던가. 페로몬의 효과가 나타나기 매우 좋은 장소다. 이게 웬 행운인가 싶었다.
‘잠깐만. 행운?’
조금 전에 나타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강력한 행운이라는 게 이건가? 그러고 보니 몽마신의 축복에 그런 효과가 있었던 것도 같았다.
‘축복창.’
1. 몽마신의 축복(60일)
▶ 효과1: 성(性)과 관련된 행운이 대폭 상승한다.
▶ 효과2: 어떤 일을 숙련할 때 200% 추가 효과를 받는다.
▶ 효과3: 정력이 샘솟는다.
2. 헬창의 축복(60일)
▶ 효과1: 남성 호르몬이 대폭 상승한다.
▶ 효과2: 모든 운동의 숙련도가 200% 상승한다.
▶ 효과3: 근육의 회복 속도가 300% 상승한다.
역시나 몽마신의 축복이 가져온 효과였다.
‘와씨. 이거 생각보다 엄청난 효과 같은데?’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직접 체감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솔직히 정소라의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진짜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행군 35km째.
앞으로 5km만 더 가면 부대에 도착한다. 완주가 얼마 안 남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서주환의 경험상 신병들은 이때쯤 퍼지기 마련이었다.
“중대장님, 애들 한 번 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깃발은 나한테 맡기고.”
“감사합니다. 얼른 보고 오겠습니다.”
서주환은 깃발을 넘긴 후 걸음을 늦추며 행렬을 훑어봤다. 행군에서 부상자가나오는 시점은 처음이나 중반보다는 도착이 얼마 안 남았을 시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꾸벅거리며 휘청이는 병사가 보였다. 4중대로 전입 온 지 얼마 안 된 신병이었다.
“최민성, 눈 떠라.”
“이, 이병 최민성. 죄송합니다!”
꾸벅거리며 졸던 녀석이 고개를 번쩍 들며 관등성명을 댔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보고 걷는 최민성. 하지만 서주환은 그 상태가 오래 못 갈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도 이등병 때 행군하다 졸았던 경험이 있다. 특히 찬바람이 부는 혹한기 행군은 더욱 춥고 졸렸다.
이럴 때 쓰는 특효법이 또 있지. 서주환은 다시 슬슬 눈이 감기려는 최민성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 이병 최민…”
“됐어, 인마.”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말하는 최민성의 얼굴이 암울하다. 첫 행군에서 최고참에게 연속으로 지적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서주환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최민성을 안심시켰다.
“민성아, 야한 생각 해봐.”
“잘 못 들었습니다?”
“야한생각 해보라고.”
“야한 생각 말입니까?”
최민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오래 걸으면 졸려. 이렇게 추운 날씨에는 더 그렇고. 행군이란 게 처음엔 의외로 할만하다가, 중반에는 발 아파서 힘들고, 후반에는 졸음과의 싸움이야."
“…맞습니다. 걸으면서 잘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럴 때 쓰는 방법이 있다.”
“아, 그게 야한 생각 하는 겁니까?”
최민성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건 아마 대한민국 모든 사병들이 쓰고 있는 방법일 터였다.
“어. 그럼 덜 졸릴거다. 그렇다고 야한 생각하느라 넘어지지는말고.”
“하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거의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라.”
“옙!”
최민성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다른 중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조는 병사는 더 없는 듯 했다.뒤쪽에서는 곧 분대장을 넘겨받을 이정훈이 후임들을 열심히 독려하고 있었다.
서주환은 빠르게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중대장님, 이제 제가 들겠습니다.”
“그래. 애들은 좀 괜찮고?”
“예. 다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너는 좀 어떤데?”
서주환은 씩 웃으면서 엄지로 병장 약장을 가리켰다.
“저야 뭐. 짬이 있는데 당연히 괜찮습니다.”
“풋. 이거 영 믿음이 안 가는데? 내가 이틀 전에 산에서 구른 말년 병장한테 파스를 붙여줬거든.”
"윽."
서주환은 그날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젠장, 그랬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당황해서 얼른 변명했다.
“그. 그건 실수입니다.”
“아하하.알았어.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
“…옙.”
“삐진 거 아니지?”
“안 삐졌습니다.”
“흐응. 알았어. 후후.”
정소라는 콧소리를 내며 웃더니 다시 앞서 나갔다. 서주환은 그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웃는 게 여우를 닮았네.’
지 난 생에는 몰랐던 그녀의 단편을 알게 된 느낌이다. 평소 FM을 추구하던 모습은 동물로 비유하자면 암사자 같았는데, 어쩌면 여우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나도 좀 졸리네.’
정소라에게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꽤 힘든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방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던 인생이었다. 신체가 바뀌었다고 해도 갑자기 빡센 훈련은 상당히 힘들었다. 그나마 행군이라는 게 체력보다는 정신력을 요구하는 훈련이어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럴 때는 역시 야한 생각이다.’
서주환은 최민성에게 알려주었던 방법을 써먹기로 했다. 그런데 문득 앞에서 걷고 있는 정소라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남자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 묘하게 여자란 느낌이란 말이지.’
군복에 방한도구로 꽁꽁 싸맨 몸은 여성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와는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이게 본능이라는 걸까? 펑퍼짐한군복 때문에 굴곡이 별로 없었지만, 여성의 엉덩이가 눈앞에서 움직이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여름에는 더 좋았는데.’
여름 행군 때는 쪄 죽을 것 같았지만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더운 만큼 정소라의 옷 가짐도 얇아졌던 것. 군복이라도 나름 굴곡이 드러나서 눈이 즐거웠었다. 그렇게 정소라의 엉덩이를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비틀.
오르막을 올라가는 중, 발을 헛디딘 정소라가 휘청였다.
“꺄악?!”
정소라에게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비명성이 나왔다.
길이 가파른 오르막. 여기서 잘못 넘어지면 십중팔구는 크게 다친다.
서주환은 반사적으로 깃발을 내팽개치고 손을 뻗어 정소라가 매고 있는 군장을 잡아챘다. 그러자 덜컥 하는 느낌과 함께 그녀가 정지했다.
“괜찮으십니까?”
“어, 으응. 고, 고마워.”
많이 놀랐는지 말을 더듬는 정소라.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 시선이 몰린 걸 의식하고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정소라가 입술을 짓씹는 게 보였다.
지금껏 다른 병사는 물론 남자 간부들보다 훈련을잘 수행했는데 이렇듯 비명을 지른 게 부끄러운 것이다. 프라이드가 강한 만큼 그런 경향이 더 심한 듯했다.그에 서주환은 일부러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가면 도착이니까 힘내자! 4중대 파이팅!”
“4중대 파이팅!”
자연스럽게 중대원들의 후창이 따라왔다.
앞에서도 이쪽 목소리를 들었는지 곧 3, 2, 1, 본부중대 까지 파이팅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정소라에게 몰렸던 시선이 흩어졌다.
정소라가 묘한 시선으로 서주환을 응시했다.
*
오르막을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가 보였다.
대대원들은 연병장에 정렬했고, 대대장의 선언과 함께 행군이 완전히 끝났다.
이정훈이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 뱀, 빨리 막걸리 마시러 가지 말입니다.”
“어! 빨리 가자! 목 말라 죽겠다!”
혹한기 행군이 끝나면 막걸리를 나눠준다. 마트에서 파는 평범한 막걸리였지만, 그것만큼 특별한 막걸리도 없었다. 행군 이후에 마시는 막걸리의 맛이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크. 전도 먹고 싶네.”
“그러게 말입니다. 나중에 밖에서 만나면 막걸리에 전 어떻습니까.”
“오. 형이 사는 거예요?”
“어어? 갑자기 왜 형입니까? 제가 후임인데 서 뱀이 사야 되는 거 아닙니까?”
“참나. 형이야 말로 슬슬 애들 앞에서도 말 놔요. 저 휴가 나갈 거 생각하면 저희 앞으로 얼굴 볼 날 한 달도 안 남았어요.”
“흐흐. 그럼 그럴까?”
“나중에 진짜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해요, 형.”
“좋지.”
각종 전 생각을 하며 기다리니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잠시 후 드디어 기다리던 차례가 왔을 때였다.
취사병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 컵이 다 떨어졌어요.”
“네? 그럼 어떡해요?”
“미안해요. 분명 인원수 보다 더 넉넉히 사왔는데… 취사장 가서 금방 가져올게요.”
취사병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서주환과 이정훈은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이유를 알만 했기 때문이다. 분명 두 잔씩 마신 놈들이 있을 게 뻔했다.
그때 눈앞에 종이컵이 내밀어졌다. 종이컵의 주인은 정소라였다.
“주환아, 이거라도 쓸래?”
“아,중대장님. 써도 됩니까?”
“응. 내가 쓴 거라도 괜찮으면.”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중댐!”
서주환은 빨리 막걸리를 마시고 싶었기에 사양 않고 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막걸리를 담아 컵을 입에 댄 순간.
띠링!
정소라의 상태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