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욕망 퀘스트
점호 시간이 끝나고, 서주환은 병사들과 함께 담배를 피러 갔다. 흡연자들 사이에서 취침 전 한 개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였다.
‘가족들에게 연락은 이틀 뒤에나 할 수 있겠네.’
훈련이 끝나기 전까지는 외부로 전화가 금지 되어 있다. 그리고 듣자 하니 오늘은 훈련을 시작한 지 3일째였다. 실질적으로는 오늘 하루도 거의 끝났으니 앞으로 하루만 참으면 가족들에게 연락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며 막사 3층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생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소라가 보였다.
서주환은 함께 돌아오던 일행을 대표해서 경례했다.
“강철. 중대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아, 주환아. 너 기다렸어. 잠깐 얘기 좀 하자.”
정소라는 그를 이끌고 행정반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의자에 앉더니 서주환에게도 앉으라는 듯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무슨 일이지? 아, 혹시 낮에 있었던 일로?’
여자들 뒤끝이 길다더니, 설마 이 시간까지 기억하다가 갈구려는 걸까? 그러나 막상 정소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정소라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흐흠.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잘 못 들었습니다?”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물었어. 오늘 훈련 중에 산에서 굴렀었잖아.”
“아.”
그 말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움직일 때 마다 신경에 거슬렸던 통증.
‘어쩐지 온몸에 멍이 들어 있더라니.’
샤워할 때 확인해봤더니몸 곳곳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맘때쯤 훈련하다가 산에서 구른 기억이 있었다.
“그, 오른쪽 어깨랑 다리가 조금 아프긴 한데… 그래도 참을만합니다.”
“참을만하기는. 아까 훈련 중에도 멍하던데. 그것도 다친 거 때문이지?”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주된 이유도 아니었다. 솔직히 멍했던 이유의 대부분은 욕망 시스템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알아서 좋게 생각해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하. 뭐… 정말 괜찮습니다.”
서주환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한데, 아무래도 그 웃음을 본 정소라는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아. 미안. 내가 미처 거기까지 신경을 못 썼다. 그게 아니었어도 거기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주환아, 미안하다.”
놀라운 모습이다. 세상 어느 중대장이 간부도 아닌 병사에게 잘못을 이리도 솔직하게 사과한단 말인가.
서주환은 어쩐지 묘한 기분으로 정소라를 보았다.
‘이런 사람이었지. 내가 본 간부 중 제일 좋은 사람이었어.’
회귀 전 현역으로 생활하던 당시, 서주환의 소문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간부들 사이에서도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소라는 그를 차별 없이 대했었다. 잘 하면 칭찬했고, 못 하면 혼냈었다. 특별히 그에게 잘해준 건 아니었지만, 그 차별 없는 대우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서주환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중대장님, 저 진짜 괜찮습니다. 제가 잘못했던 게 맞는데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개인정비 시간에 의무실은 가봤고?”
“어… 그건, 하하.”
서주환이 멋쩍게 웃자 정소라는 혀를 찼다.
“쯧. 자, 그럴 줄 알고 여기 파스 가져왔으니까 이거라도 뿌려. 아니면 붙이는 게 좋아? 둘 다 있는데.”
“아, 감사합니다. 붙이는 걸로 부탁드립니다.”
“그럼 붙여줄 테니까 잠깐 상의 좀 벗어봐.”
“예?”
예상치 못한 말에 말실수가 나왔다.
그에 정색하는 정소라.
“예에? 예라고 했나, 지금?”
“자, 잘 못 들었습니다?”
얼른 말을 바꾸자 정소라가 장난이었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풋. 똑바로 들은 거 맞으니까 벗어봐. 아까 어깨 뒤쪽도 짚었잖아. 거기 손 안 닿지 않아?”
“안 닿긴 하지만….”
“내가 붙여 줄게. 벗어봐.”
서주환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상의를 벗었다.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지만 정소라가 워낙 태연하게 말하니까 괜히 혼자 오버하는 것 같아서 빼기도 뭐했다. 물론 그래도 쪽팔린 건 쪽팔린 거지만.
‘훈련 끝나면 살부터 빼야겠어.’
상태창으로 확인했을 때 키가 170 밖에 안 되는데 몸무게가 90kg을 찍었다. 원래도 꽤나 통통한 체형이었는데 말년이라고 막 먹어대던 시절이라 몸무게가 절정을 찍은 상태였다.
“역시 등에도 멍이 좀 있네. 어디 뼈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지?
“아, 네. 그냥 근육이 놀란 정도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혹시 나중에라도 이상 생기면 바로 보고해,”
“네. 감사합니다.”
“붙인다.”
말과 함께 서늘한 감촉이 등에 느껴졌다. 파스보다 정소라의 손이 더 찬 듯 했다.
“끝. 이제 바지 걷어봐. 하는 김에 거기도 해줄게.”
“감사합니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자 정소라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파스의 겉면을 살살 떼어냈다. 잘 안 떼어지는지 손톱으로 겉면을 여러 번 긁는 모습이다.
서주환은 묘한 구도 때문에 어쩐지 민망함을 느끼며 정소라를 내려다봤다.
‘엄청 예쁘다.’
위장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정소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아, 그게, 그, 중대장님은 조금 전까지 회의하신 겁니까?”
“응? 그렇지?”
“위장도 제대로 못 지우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피곤하겠습니다.”
“하하. 다들 똑같아. 회의 끝나고 물티슈로만 대충 닦았어. 이제 퇴근하고 씻어야지.”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다친 거 챙겨주시니까 감동 먹어서 그렇습니다.”
“참나. 이거 가지고 뭘.”
정소라가 싱겁다는 듯 쿡쿡 웃었다.
“아, 이제야 떼졌다.”
말과 함께 착- 하고 다리에 파스를 붙인다. 파스 특유의 알싸한 느낌이 싸악 퍼지는데, 정소라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주환이 너는 다리털이 아예 없네?”
“예. 그냥 체모 자체가 적은 편입니다.”
“부럽다. 내 다리보다 더 매끈한 거같아.”
그리 말한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 서주환의 다리를 한 번 쓸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리를 훑는데, 손이 차게 식어 있어 기분 좋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서주환이 뭔가 반응을 나타내기도 전에, 정소라가 그의 다리를 툭 치며 말했다.
“자. 이제 들어가서 자. 내일 늦게 일어나지 말고.”
“아, 예. 감사합니다. 중대장님도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그래. 앞으로 이틀만 더 고생하자.”
“예. 편안한 밤 되십시오.”
“그래.너도 잘 자.”
서주환은 정소라에게 경례하고 행정반을 나왔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뭔가 이상한기분이 드는 게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그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용자의 강렬한 욕망을 감지했습니다.]
[최초의 욕망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무슨… 앗.”
서주환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행정반 안에는 아직 정소라가 있었다. 그는 얼른 생활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워 메시지를 켰다. 도착했다는 퀘스트 내용이 주르륵 펼쳐졌다.
『직속 상관을 범해라』
▶ 정소라 대위는 군인임에도 보기 드문 미인입니다. 더불어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로 1대대 남성들의 선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의 차갑고 도도한 행실 때문에 언감생심 다가가지도 못하고 상상의 나래만 펼칠 뿐입니다.
그러나 사용자에게 꿈을 이루어줄 욕망 시스템이 있습니다. 욕망 시스템의 힘을 적극 이용해 정소라와 합일하십시오.
▶ 달성 조건: 정소라와 섹스.
▶ 보상: 10,000LP
‘아니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퀘스트의 내용을 본 서주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당장 튜토리얼 퀘스트만 해도 여자를 꼬실 자신이 없어 생전 가본 적도 없는 업소를 염두에 두고 있던 그다.
한데 이게 무슨 괴랄한 난이도란 말인가.
‘그 여자를 어떻게 건드려?’
정소라는 분명 엄청난 미인이었지만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사람이었다. 육사 출신 엘리트의 그녀는 빠르게 진급했고, 여군으로서는 드물게도 간호장교가 아닌 전투중대의 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같은 남자 군인들에 비해 더욱 FM을 추구했고, 자신을 군인이 아닌 여자로 대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섣부르게 건드렸다간 영창 가기 딱 좋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욕망 시스템이 있어도…….’
대부분의 기능들이 잠금되어 있는 지금 무얼 어쩐다 말인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서주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방도가 없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정소라에게 그런 마음이 든 것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
작전 지역으로 가며 서주환은 밤새 생각한 계획을 복기했다.
‘몇 달 전에 작전 사령관이랑 사단장이 바뀌었었지.’
어떤 이유 때문에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병사인 그가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다만, 갑자기 고위 간부가 두 명이나 바뀌면서 사단 전체에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형성된 것만은 확실했다.
사병들이야 사단장이 바뀌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간부들은 다르다. 새로 온 사단장과 작전사령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평소보다 크게 액션을 취하려 한다. 한 마디로 나 좀 봐달라는 오버액션이다. 그러한 열의는 훈련의 FM화와 규모 확대로 이어져 사병들을 괴롭혔다.
‘이번 혹한기 훈련도 마찬가지였어. 평소보다 더 빡세게 진행됐다.’
이 때문에 말년인데도 개고생을 했었다. 전역이 두 달도 안 남은 상태에서 멘탈이 갈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떤 놈들은 이것도 다 재수 없는 서주환 때문이라며 말도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았었지.
서주환은 당시를 생각하면 언제나 이가 갈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것이 둘도 없는 기회로 다가왔다.
'대항군을 잡는다!'
기억에 의하면 이번 혹한기 훈련의 대항군 수장은 3대대의 윤정수 중사였는데, 그는 프로 대항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항군 경험이 많은 간부였다.
프로 대항군이라는 별명답게 윤정수 중사는 이번 훈련에서도 신출귀몰하게 날뛰며 2, 3, 4중대 무려 세 개 중대를 털어버린다. 그나마 남아있던 1중대도 그가 잡혀서 끝난 게 아니라 더 이상 훈련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날이 어두워져서 중지되었었다.
‘그 윤 중사를 평소에 인원이 적다고 무시당하던 우리 중대가 잡는다면?’
심지어 그 중심에 서주환이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직속 중대장인 정소라의 호감을 잔뜩 쌓을 수 있을 터였다.
‘실수만 안 하면 된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치트키나 마찬가지야.’
서주환은 이미 대항군이 어떤 순서로 진지를 털고 어떤 방향으로 이곳에 올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쯤 이기고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번 훈련에서 전 중대가 모두 털린 것은 대항군이 강력했던 것도 있지만 훈련 일정을 잘못 짠 게 가장 컸다.
‘멍청한 작전과장 새끼.’
지금 생각해도 그 멍청함에는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작전과장은 혹한기 훈련일정을 눈 오는 날로한 것도 모자라서 대항군을 상대하는 오늘, 야간 작전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대항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야간으로 시간을 잡은 건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속수무책으로 털리지. 다른 간부였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겠거니 하고 여겼겠지만 작전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폐급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서주환은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18시 30분.
대항군 잡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