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잘못 부여된 업(業) (2/501)



〈 2화 〉잘못 부여된 업(業)

불교에는 업(業)이라는 개념이 있어, 선업(善業)을 쌓으면 복(福)으로 돌아오고, 악업(惡業)을 쌓으면 벌(罰)로 돌아온다고 한다.
따라서 전생에 선업을 쌓았어야 현생이 행복할 것이며, 현생에 선업을 쌓아야 내생을 행복하게 보낼  있다.
즉, 언제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거든 나쁜 짓 말고 착하게 살라는 소리였다.

‘전생의 나는 어지간히도 나쁘게 살았던 모양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삶일 수가 없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운수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그만큼 재수가 없다는 소린데, 바로 내 운수가 그러했다.
어떻게 되먹은 팔자인지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기이할 정도로 운이 없었다. 오지선다는 물론 양자택일의 상황에서도 찍기를 성공해본 적이 없었고, 뽑기처럼 운이 작용하는 게임에서는 도무지 이득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어렸을 적에는 유난히 재수가 없는 정도였지 20대 중반에 접어들어서는 운수가 말라비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불행의 시작은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찾아온 급성 탈모였다. 덕분에 나는 이십 대 중반부터 가발을 쓰고 살게 되었다.
나이 30이 되었을 때는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소중이가 발기부전이라는 몹쓸 병에 걸렸다. 어느 순간 아침에 텐트가  쳐지는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대   없을 것이다.
너무 많은 불운을 겪어서일까.
어느덧 나는 길을 지나가다 새똥에 맞는 것 정도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는 대인배가 되어있었다.

‘하아. 외로워서 죽을 것 같다.’

현재 나의 진짜 문제는 탈모도, 발기부전도 아니었다. 다만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지독한 외로움이 나를 괴롭혔다.
체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더 외로워지는 것 같다. 농담이 아니라 이대로 고독사라는 걸 하게 되는 게 아닐까싶었다.

‘어머니는 잘 지내시려나?’

가족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무척이나 오래됐다. 그나마 연락은 자주 했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한지는 거의 3년이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본가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싶다. 오죽하면 유전적 원수지간으로 태어난 여동생마저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하지만 막상 집에 가고자 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괜히 찾아갔다가 또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보증 관련으로 빚쟁이한테 시달렸을 때 얼마나 힘들었던가.

‘혼자 있는 게 속 편하지.’

외로워도 차라리 혼자가 나았다.
내 불운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나는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과 직장에서조차도 엮이면 재수 없는 새끼로 통했다.
 와중에도 인복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먼저 다가와주는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는  쪽에서 벽을 치고 거리를 뒀다.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집까지 나온 마당에 누구랑 엮인단 말인가. 간신히 취업한 출판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된 것조차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딱히 부처님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미 다음 생도 그른 거 아닌가?’

다음 생이 행복하려면 현생에서 선업을 쌓아야 한다는데, 딱히 눈에 띄게 착한 일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혼자 불행하지 않고 내 불행을 옮기고 다녔으니 어찌 보면 이것도 악업을 쌓은 셈이 아닐까?

“염병.”

이거 참, 행복하려야 행복할 수가 없는 인생이다.

끼이이익- 콰아앙!

부디 지금의 선업(善業)이 지난 악업(惡業)을 뒤덮을 만큼 컸으면 좋으련만.

*

“아, 안돼!”

곧 일어날 상황을 예견하고 안타깝게 부르짖는 여자.

“염병.”

반면 옆에 있던 남자는 나직한 욕설 한 마디와 함께 망설임 없이 달려나갔다. 몸을 날린 남자는 아이를 껴안는 것과 동시에 차에 부딪쳤다.

끼이이익- 콰아앙!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비명성이 울린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사람이 치였어!”
“어린애는 멀쩡해! 그런데 애를 감싼 쪽이… 누가 빨리 119좀 불러요!”

누군가는 숨이 멎은 남자를 살리기 위해 기도를 확보하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누군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119를 부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사진을 찍거나 참혹한 현장을 구경한다.
한 남자가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비로운 백발에 피처럼 붉은 눈을 지닌 남자.
엉덩이 부근에는 악마를 연상케 하는 꼬리까지 있었으니 외양부터가 이미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더불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중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한 동안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눈가를 긁적였다.

“겨우 찾았는데… 한 발 늦었구나.”

죽은 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진한 안타까움이 어렸다. 이어서 잠시 후. 그 눈빛에 모종의 결심이 깃들었다.

‘환생 했어도 내 형이었던 사람이다. 이대로 둘 수는 없지.’

결심을 한 남자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려 허공을 내리그었다.

쩌어억-!

놀랍게도 남자의 손짓을 따라 허공이 갈라졌다.
갈라진 틈새 안으로는 붉은 비단이 깔리고 화려한 장식들이 즐비한 궁내가 보였다. 궁내에 있던 존재들은 경악한 낯으로 난데없이 갈라진 허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남자는 뒷짐을  채 그 놀란 낯짝들을 바라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이어서 남자가 발걸음을 옮기며 크게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명계(冥界)에 비상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용감하게 몸을 날렸던 남자. 서주환은 병원도 저승도 아닌 새하얀 공간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어난   시간이 지난 현재.
서주환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자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백발의 미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중후한 멋을 풍기는 웬 할아버지가 땅에 머리를 박은 채 끙끙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고 하니.
이 백발의 남자가 자신을 7차원계의 마신이라고 소개하며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참이었다.

‘미친놈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손에서 불을 뿜어낸다거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벼락을 치게 만드는 이적을 보여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야기 자체도 그에게 이로운 부분 밖에 없었으니 설령 거짓이라 해도 믿고 싶을 정도였다.
서주환은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몽마신 러스트 님?”
“러스라고 불러. 말도 편하게 하고. 전생이라지만 당신은  형이었으니까.”
“…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존대가 편합니다.”

서주환은 깍듯한 태도를 고수했다. 아무리 전생에 자신이 형이었다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전생의 이야기는 와닿지도 않는 말이었다.
러스트도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는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편하다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건 알아둬. 아까도 말했지만 전생의 당신은 칭송받아 마땅한 영웅이었다는 거.”
“…제가 영웅이었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그것도 그냥 영웅이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인간들의 리더였어. 무력과 인성은 물론 지도력까지 겸비했었지. 아, 그래봤자 결국 지구는 공허한테 멸망했지만.”
“지, 지구가 멸망해요?”

이건 듣지 못 했던 이야기다. 갑작스런 지구 멸망 소식에 머리가 멍해졌다.
러스트는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낄낄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그래도 다시 환생한 내가 공허를 없애버렸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 참고로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지구는 거기와 다른 차원이야. 전혀 연관 없는 곳.”
“하하…….”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그랬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상당히 버거웠다.
그런 서주환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러스트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

나오는 이야기 마다 정신이 멍해지는 것들이라 순간 목적을 잊고 있었다.
서주환은 잡념을 털어내고 다시 질문했다.

“그, 어쨌든 저를 되살려주시겠다 이 말이죠?”
“응. 참고로 회귀 시점은 5년 전이고, 잘못 씌워졌던 불운은 이미 없어진 상태야. 물론 기억도 유지시켜 줄 거고. 이게 명계에서 내민 배상 조건이야.”

배상(賠償)이라 함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사람이 그 손해를 물어 주는 일을 뜻한다. 즉, 다시 말해 명계 측에서는 서주환의 권리를 침해하고 손해를 입힌 전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지긋지긋 했던 불운이 내 것이 아니었다니.’

러스트의 말에 의하면, 본래 그는 전생에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럼에도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것은 명계 측의 실수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수를 저지른 명계의 우두머리가 바로 러스트의 옆에서 원산폭격 자세를 취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그런 염라대왕을 바라보는 서주환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토록 불행했던 인생이 고작 사무적인 실수 때문이라니…….’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다. 꽉 쥔 주먹이 분노를 대변하듯 부르르 떨렸다.
그때였다.

콰앙!

돌연 엄청난 소리와 함께 염라대왕의 머리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얼마나 세게 처박혔는지 조용히 분노하고 있던 서주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러스트가 염라대왕의 머리를  짓밟고 있었다. 염라대왕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끄으윽.”
“하여간 웃기는 새끼들이란 말이지. 아무리 타차원에서  영혼이라지만 그걸 헷갈려서 죄업을 잘못 부여해? 멸망한 차원 출신 영혼들은 억울해서 윤회하겠냐? 여기도 한 번 멸망시켜줘? 엉?”
“죄,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해봐. 업을 잘못 부여받은 영혼이 정말 우리 형 하나 맞아? 내 생각에는 다른 영혼도 여럿 있을 것 같은데?  나온 김에 한 번 조사해볼까. 흠.”

러스트가 의심스럽다는 듯 말하자 염라대왕은 번갯불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생각했다.

‘차원계 또라이로 유명한 몽마신의 내정간섭이라니! 절대 안 된다!’

그가 알기로 죄업이 뒤바뀐 사건은 분명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랫것들이 무얼 숨기고 있을지 어찌 안단 말인가. 기실 이번 사건도 러스트가 막무가내로 쳐들어오기 전까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혹시라도 정말로 다른 사건이 밝혀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이었다.
다급해진 염라대왕은 고통을 참고 얼른 입을 열었다.

“러스트님,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전수 조사할 터이니 부디 믿어주십시오!”

씨익. 그 한 마디에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짓는 러스트. 하나 그는 웃음기를 티 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는 잘못한 사람한테 해야 하는  아닌가? 너, 나한테도 잘못한 거 있어?”

그 말에 눈치 빠른 염라대왕이 고개를 번쩍 들고 서주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그의 머리를 짓밟고 있던 발은 사라져 있었다.
염라대왕이 서주환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외친다.

“정말 송구합니다, 서주환님. 저희 명계에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네, 네?”
“말로만 사죄하는 건 믿기 힘드시겠지요. 제 권한으로 회귀 시점을 5년 더 돌려드리겠습니다. 총 10년 전으로 회귀시켜드리지요. 혹여 원하신다면 빙의(憑依)나 환생(還生)도 가능합니다. 이게 제 최선이니 이걸로 부디…!”

염라대왕은 다시 머리를 쿵 소리가 나도록 땅에 처박았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생의 선악을 판별하는 심판자이자, 저승의 십팔 장관(十八將官)과 팔만 옥졸(八萬獄卒)을 거느린 저승의 왕이 한낱 인간에게 무릎 꿇고 머리 숙이다니. 이 광경을 뭇 저승사자들이 봤다면 두 눈을 의심했을 터였다.
서주환은 염라대왕의 필사적인 기색에 질겁하여 한 걸음 물러났고, 러스트는 그에게 한 쪽 눈을 찡긋 하며 입을 뻥긋거렸다.

[저놈한테는 안 들리니까 티 내지 마.]

갑작스레 머리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 서주환은충고대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좀 짜증나더라도 이쯤에서 받아들이는 게 좋아. 여기서 더 족쳐봐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면 나도 이 녀석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거든. 십중팔구는 내가 없어지면 무슨 수작을 부려도 부릴 거야. 물론 형에게 일이 생긴다면 복수야 해줄 테지만, 그것도 이미 죽고  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서주환은 다시  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러스트가 나서기 전만 해도 명계의 실수로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었지만, 지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리고 명계의 왕이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인 마당이었다. 아니, 성의를 넘어 굴욕적이기까지 한 상황이었으니, 러스트의 말마따나 상황을  지속시켜봐야 좋을  없었다.
더불어, 염라대왕이 제시한 조건은 고통스러웠던 지난날들을 희석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달콤한 보상이었다.
속으로 결론을 내린 서주환은 염라대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시지요, 대왕님.”

움찔. 서주환이 내민 손길을 보고 몸을 떠는 염라대왕. 그러나 당장 일어날 생각은 없어보였다. 기어코 서주환의 입에서 용서하겠다는 말이 떨어져야 일어날  했다.
그를 본 서주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솔직히 당장에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꽤 힘들었거든요.”
“그, 그렇군요. 확실히 없는 죄를 뒤집어 쓰셨으니 쉬이 용서할 수 없겠지요…….”

염라대왕의 얼굴이 낭패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러스트가 다시 한 번 깽판을 치는 게 아닐까 가슴이 타들어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러스트가 명계에서 날뛰는 걸 직접 본 참이었다. 그 악마 같은 모습은 그야말로 마신이란 위명에 걸맞았다.

‘그 꼴을 다시 볼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후에 있을 처벌을 각오하고 상제(上帝)와 신선(神仙)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염라대왕이 모종의 결심을 내리려던 그때. 서주환이 돌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더 문제 삼을 생각도 없습니다. 대왕님께선 이미 배상을 하기로 했고, 사실 대왕님이 실수 한 당사자도 아니잖습니까?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저,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제게 직접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분만 처벌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그야 물론이지요! 크흑.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상은 물론, 반드시 범인을 색출하여 엄벌을 내리겠습니다!”

염라대왕이 감동받은 표정으로 서주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러스트는 그런 염라대왕의 모습이 같잖다는  코웃음을 쳤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전성을 보내는 중이었다.

[잘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명계의 왕이야. 척 져서 좋을 게 없지. 사실 나도 타차원에서 더 날뛰면 귀찮아지거든.]

그렇게 명계를 뒤집었던 대사건이 일단락되었다.

*

“크흠. 어흠.”

염라대왕이 행색을 바로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제라도 위엄을 살리려는 듯 허리를 곧게 편 그가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배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주환님께서는 회귀(回歸), 빙의(憑依), 환생(還生) 중 하나를 택해주시면 됩니다.”
“회귀로 하겠습니다.”

서주환은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셋 모두 엄청난 보상이었지만 빙의나 환생을 선택하면 가족들을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정확히 10년 전인 2015년 12월 22일로 회귀시켜드리겠습니다. 10초 정도 걸리니 마음의 준비를 해주시지요.”
우웅- 준비하라는 말과 동시에 서주환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가는구나.’

10년 전이면 그가 22살일 적이다.
아직 크게 불행했던 사건들이 벌어지기 이전이니 나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뭔가 중요한  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스쳐가는 기억 하나.

'…잠깐만. 내가 언제 전역했더라?'

대한민국의 남자가 가장 입대를 많이 하는 나이는 21살이다. 서주환은 21살이었던 14년 5월경에 입대했었고, 15년도 12월이면 아직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을 때였다.
서주환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마아안-!”

그러나 야속하게도 외침과 동시에 번쩍! 하는 빛무리가 그를 완전히 감쌌다. 다만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은 러스트의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이번 생은 재밌게 보내봐, 형. 염라 놈 몰래 선물도 넣어놨으니 유용하게 쓰라고!]

러스트의 알 수 없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까무룩 암전했다.

*

Cookie.
<전수조사>

“네 이노오옴!  죄를 정녕 모른단 말이냐! 오냐, 좋다! 내 직접 네놈의 죄를 낱낱이 읊어주마!”

저승의 지배자, 염라대왕의 천둥 같은 호통소리가 대전을 떨어울렸다. 전에 없는 분노에 저승사자들과 옥졸들은 물론 염라대왕의 직속이라  수 있는 십팔 장관들조차도 숨을 죽였다.

“혼에 과보(果報)를 부여하는 일은 명계의  업무이자 가장 중요한 행사이고, 당사자인 혼백에게는 일생을 보내며 쌓은 선악의 결과를 맺는 열매일지니. 이를 허투루 관리하는 것은 있어서는   일이다!”
한데 네놈은 이를 소홀히 여겼음은 물론이요. 추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음에도 바로잡을 생각은 고사하고 제 실수를 숨기기에 급급하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시일이 더 지난 후에는 그 혼백이 타차원에서 온 것을 들어 큰 실수도 아니었다며 술마당에서 안줏거리로 씹었으니 일말의 반성조차 없다 할  있겠다.”
“어, 억울하옵니다, 대왕님! 애초에 그 혼백은 타차원에서 왔기에 죄업을 판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는 취기에 실수를 범한 것이오니 그 점을 감안하시어…”
“이노오오옴! 시끄럽다! 끝까지 반성은 안 하고 술김에 그랬다며 변명 같지도 않은 망언을 하는구나! 마지막 기회를 주었음에도 반성의 기미를 볼 수가 없으니 용서의 여지가 없다! 여봐라!”

염라대왕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던 옥졸들이쏜살같이 달려와 기립했다. 염라대왕은 옥졸들에게 추상같이 호령했다.

“이놈을 팔열지옥(八熱地獄)에 내던져라! 이놈의 실수로 죄업을 부여 받은 영혼이 32년간 불행하게 살았으니, 이놈은 각 지옥에서 4년 씩, 총 32년 동안 고통 받아야 할 것이다. 끌고 가거라!”
“충!”
“파, 팔열지옥이라니! 아, 안 됩니다! 대왕님! 대왕님! 잘못했습니다, 대왕님-!”

저승사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염라대왕은 그에게 눈길 한  주지 않고 대전에 모인 신하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전수 조사를 실시할 것이다. 십팔 장관과 옥졸들은 짐을 따라오라. 이 시간부로  직접 명계의 썩어빠진 부분을 뿌리부터 뽑아낼 것이니!”

그리 말하는 염라대왕의 눈동자가 초열(焦熱)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
이 날을 기점으로 69차원의 명계는 전 차원을 통틀어 가장 공명정대(公明正大)하다 칭송 받았으며, 훗날 이 염라대왕은 옥황상제의 신임을 받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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