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도도한 유설화(11)
* * *
유설화와 단 둘만 남게 되자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남자답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먼저 유설화에게 말을 건다.
“설화야. 아까 하던 얘기. 난 재미있던데, 좀 더 해줄래?”
“얘기? 무슨 얘기?”
“그 있잖아. 남녀가 역전된 세상에 관한 얘기.”
남녀가 친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여자가 흥미 있어 하는 내용일수록 좋다.
다른 얘기를 할 때는 전혀 흥미가 없어하던 유설화인데, 남녀가 역전된 세계에 관한 얘기 를 할 때는 입에 침이 튀도록 흥분했던 유설화다.
어떻게 보면 남녀가 역전된 세상에서 온 유설화에게 있어서, 말로라도 그녀의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일수도 있다.
원래 세계에서는 공주 취급만 받던 인싸 유설화가 남녀가 역전된 세계로 와서 하녀 취급받는 왕따가 되었다.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아, 그 얘기. 왜? 너도 다른 애들처럼 얘기하라고 하고, 나 비웃으려고 그러지?”
경계심을 보이는 유설화.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같은 여자인 하은이와 시은이도 남녀가 역전된 세계에 관한 얘기를 하자, 말도 안 된다며 유설화를 개 무시 했는데, 남자인 나는 어떻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미 남녀가 역전되기 전 세계를 겪은 남자이다.
충분히 그녀의 얘기에 아, 그런 세계도 있구나! 하고 호응해 줄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엿 같은 페미 이론에는 동조 못 하지만.
“아니야. 설화야.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래서. 그 남녀가 역전된 세계에서는 막, 남자도 2년 동안 군대 가고 그러는 거야? 사실 나도 여자만 군대 가는 건 잘 못되었다고 생각해. 남자나 여자나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아무리 신체 조건이 약하다고 해도 남자도 군대 가서 전투 기술도 배우고 나라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지. 실제로 북한이랑 전쟁이라도 나면, 여자만 골라 죽이는 거 아니잖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도 군대에 가야 하다니?”
유설화가 놀라서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
역시 내가 너무 오버했나?
아무리 유설화가 개념이 없어도, 신체능력이 여자에 비해 현저히 저하된 남녀가 역전된 세계의 남자를 군대에 보낸다는 건 동조 못하나보다.
유설화에게 잘 보이려고 너무 무리수를 둔 것 같다.
하지만.
유설화의 상식은 내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남자도 군대에 가야 하다니. 남자만 군대에 가야지! 아무리 지금 이 거지같은 세계에서는 여자의 신체능력이 남자 보다 뛰어나고, 남자보다 여자 수가 10배는 많다고 하지만, 여자를 군대에 보내다니. 그게 어디 말이 되냐? 여자는 출산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지고 있는데, 남자만 군대 가는 게 당연하지. 남자 새끼들이 출산의 고통을 알기나 해? 그 반의 반 만큼만 알아도 감히 여자 보고 군대 가라는 얘기는 절대 못 꺼낼 걸?”
아, 이런 개 씨발.
진짜 유설화가 아무리 예쁘다고 하지만, 개념이 보지에 달려 있나.
너무 보지개념이다.
도저히 남녀가 역전 된 세상 얘기로는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지가 않을 것 같다.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간다.
“아, 그나저나 막창만 먹었더니 좀 시원하고 상큼한 안주가 먹고 싶네. 설화 너는 어때?”
“응. 마침. 말 잘 했다. 나도 저런 냄새나는 안주 말고 그런 안주가 땡기는데.”
“그래? 그럼 나 주문한다. 누나~”
내가 퓨전 포차 사장님 아줌마를 부르자, 그녀가 곧 바로 나타났다.
“아유~ 우리 잘 생긴 동생. 뭐 필요한 거 있어?”
“네. 누나. 우리 좀 시원하고 상큼한 안주 있어요?”
“시원하고 상큼한 안주?”
퓨전 포차 사장님 아줌마가, 코를 찡긋 거리며 말한다.
“당연히 있지. 우리 포차 믹스 야채 안주. 특별히 우리 동생한테는 서비스로 줄게.”
역시 통이 큰 사장 아줌마다.
그런데 아줌마가 그렇게 얘기를 하며, 내 은밀한 부분을 바라본다.
“오늘 특히 시장에서 막 장 봐서, 오이가 신선하고. 굵고. 튼튼해.”
“아. 예. 저도 오이 좋아하는데. 감사합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공짜로 안주를 얻어서 기뻐하는데, 옆 자리에 앉아있던 남학생들이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저 사장님. 미친 거 아니야? 저거 성추행이잖아. 오이가 굵고 튼튼하다면서 거기 본 거 맞지?”
“어. 나도 봤어. 와. 존나 어이없네. 진짜 저 아줌마 오이로 대가리 맞아 봐야 정신 차리려나.”
아니 뭐, 공자로 안주도 주는데, 만진 것도 아니고 그 정도쯤이야 크게 기분 나쁘지 않다. 사실 말하면서 보는 시선처리까지 하나하나 다 신경 쓰면 세상 빡빡해서 어떻게 살아.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야! 씨발. 저 새끼들이 미쳤나. 오이로 뭘 때려? 감히 여자를 때려?”
남자 테이블 학생들이 하는 말을 들은 유설화가 오히려 흥분을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 테이블에 앉은 손님 중 짧은 머리를 한 남자가 반박을 한다.
“아니, 왜 그 쪽이 흥분하고 그러는데요? 진짜로 때린다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대놓고 성희롱 하는데 그런 말도 할 수 있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장난으로라도 여자를 때린다는 말은 삼가 해야지. 혹시 없어?”
“네? 없다니 뭐가요?”
“그 대가리라는 거?”
“하아. 진짜 어이가 없네.”
짧은 머리를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의 친구가 말린다.
“야. 쟤 우리 학교에서 유명한 왕따 또라이 유설화잖아. 그냥 네가 참아. 똥 밟았다 치고.”
“아니야. 가만, 있어 봐. 또라이라고 그냥 두면 더 미쳐 날 뛴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유설화에게 다가 온 짧은 머리 남자가 말한다.
“저기요. 그 쪽 저 알아요? 왜 다짜고짜 반말인데요?”
“몰라. 내가 너 나이도 알아야 해?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서 괜히 시비 거는 척 말 거는 거면, 꺼져 줄래? 난 180도 안 되는 남자한테 관심 1도 없거든.”
“아니. 진짜 언제 봤다고 너래? 그리고 저도 그 쪽한테 관심 전혀 없고, 시비 걸고 있는 것도 그쪽이거든요.”
“관심 없는 척 쩐다. 진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데.”
“그러게요. 그러게 너는 왜 가만히 안 있니? 반이라도 가게?”
“뭐! 씨발 지금 나한테 반말 한 거야? 그리고 반이라도 가게? 지금 그 걸 말이라고 해!”
본격적으로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유설화가 무개념으로 시비를 걸면, 짧은 머리 남자는 개념 있는 발언으로 다 맞받아치고 있다.
“욕은 하지 말고. 나는 너한테 ‘씨발’ 이라고 욕 못해서 안하는 줄 알아?”
“아, 진짜. 개 어이없네. 이 존만한 새끼가. 입만 살아가지고. 너 말 조심해라 그러다 신세 조진다.
“신세 조진다고? 네가 뭔데 내 신세를 조지는데?”
“너. 우리 엄마가 누군지 알아?”
아, 진짜 유치해서 못 봐주겠네.
이제는 유설화가 자기 엄마까지 팔아가며 어떻게든 이기려고 한다.
“너희 어머니가 누구신데?”
“우리 엄마가 바로 그 유명한 청담 한식당 사장이거든. 높으신 분들이랑 인맥 쩔거든. 너 같은 새끼, 인생 조지는 거 한 순간이야. 알아?”
아, 진짜 유설화랑 동석하고 있는 내가 다 부끄럽다.
성인이 요즘엔 초등학생도 안 한다는 부모님 팔아서 협박하기 하고 있네.
하지만 짧은 머리 남자가 우습다는 듯이 코웃음 친다.
“아, 그러세요. 너희 어머님이 청담 사장님이세요? 그런데, 이거 어쩌나. 네가 말하는 높으신 분이 우리 아버지 같은 국회의원 말하는 것 같은데? 과연 누구 신세 조지는 게 더 빠를까? 내 신세? 아니면 네 신세?”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말에 유설화가 뇌 정지라도 온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보니 우리학교 선배 중에 아버지가 국회의원인 선배가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다.
이름이········
“야. 재준아. 네가 참아라. 괜히 똥 밟지 말고.”
그래 맞다.
재준.
김재준이었다.
유설화도 그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지, 황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앉는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자에게 졌다는 것이 분하기만 한지, 씩씩 거리며 거침 숨을 몰아쉬고 있다.
“설화야. 괜찮아?”
“괜찮아? 야. 유시원. 너 같으면 괜찮겠냐? 부모님 권력이나 팔아서 깝치는 남자 새끼한테 졌는데. 씨발··· 진짜. 내가 억울해서·······”
너무 분해서 그렁그렁 눈물까지 보이는 유설화.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유시원. 너 솔직히 나한테 관심 있지?”
갑자기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지는 왜 물어 보는 거야.
불안하게.
“어? 응.”
그래도 일단 대답은 솔직하게 한다.
비록 뇌는 썩었지만, 외모와 몸매가 끝내주는 건 사실이니까.
“야. 그러면. 나도 네가 막 싫고 그런 건 아니니까,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줄 게. 대신 한 가지 일만 좀 해줘라.”
“일? 무슨 일?”
유설화가 씩씩 거리면서 짧은 머리를 한 남자를 바라본다.
“저 새끼한테 시원하게 술 한 잔만 머리에 부어줘. 남자한테 어려운 부탁 아니잖아.”
뭐? 술을 머리에 부으라고?
그것도 국회의원 아들한테?
갈등이 된다.
사실 같은 남자끼리 술 한 잔 머리에 끼얹는다고 큰 죄는 아닌데.
더군다나 그전에 시비도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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