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도도한 유설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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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유설화가 도도하고 싸가지 없는 건 알았지만, 원래 세계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자가 남자보다 10배나 많은 세계.
남녀 여전 세계로 빙의 된 후 유설화의 성격은 더 까칠해 진 것 같다.
유설화의 꺼지라는 손짓을 무시하며 유설화의 앞자리에 앉으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목표가 정해진 이상 이 정도로 물러나면 남자가 아니지.
“설화야. 나 지금 시은이 하은이랑 같이 점심 먹는데, 너도 같이 먹을래?”
손짓으로 쫒아버리는 것에 실패한 유설화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아니.”
“그래? 그래도 친구들이랑 같이 먹는 게 좋지 않아? 시은이랑 하은이가 불편하면 나만 여기로 올 테니까. 같이 먹을까?”
유설화가 짜증을 내며 말한다.
“걔네들 보다 네가 더 불편해. 그러니까 좀 가줄래? 혼자 있고 싶어.”
역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유설화와 친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눈앞에서 본 유설화는 정말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단정하고 청순한 검은색 긴 생머리.
작고 하얀 얼굴에 완벽한 브이라인 얼굴형.
정갈한 눈썹.
귀여우면서 별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큰 눈.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귀여운 오뚝한 코
루비처럼 빨간 입술.
하얀 얼굴에 루비처럼 빨간 입술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도도하고 차가운 유설화는 얼굴에서 빛이 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예쁜 내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거기다가 남들이 다 가지는 것 보다, 아무도 가지지 못한 걸 정복하고 싶어 하는 남자의 정복욕과 성취감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쉽게 유설화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설화야~ 그러지 말고 친하게 좀 지내자. 나도 설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설화도 그 뒷말이 궁금한지 흑요석 같은 검고 맑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설화야. 너희 어머니가 설화랑 친하게 좀 지내라고 말 하셔서 말이야. 나도 노력하는 중이거든. 그러니까, 설화 너도 너무 차갑게 굴지만 말고. 친하게 좀 지내자.”
역시나 설화 어머니가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는 말에 설화도 조금 경계심을 푼다.
“우리 엄마가? 시원이 네가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아는데?”
“아, 그러니까. 형준이네 어머니랑 너희 어머니랑 잘 아는 사이잖아. 나는 형준이랑 친구고.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 알게 됐어.”
형준이 어머니라는 말에 유설화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한 모양이다.
“나은이 아줌마 때문에 알게 됐나 보구나. 하여간, 엄마는 괜찮다는데도 꼭 쓸데없는 짓을 한다니까······”
유설화도 역시 형준이 어머니를 알고 있다.
그만큼 유설화의 어머니인 한효린과 형준이 어머니 손나은은 서로 으르렁 되지만 친한 사이라는 말이겠지?
“그건 그렇고, 시원이 너. 시은이, 하은이 하고도 친구야?”
나보다는 여자친 시은이와 하은이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유설화.
하긴, 이성인 남자 친구들이 없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현재의 유설화는 동성인 여자친구들 조차 한명도 없는 것 같다.
원래 이성친구가 없는 건 버틸 만 하지만, 같은 여자인 여자친구조차 없는 건 버티기 힘들다. 하루 종일 TV를 보거나 인터넷만 할 수도 없고, 같은 공감대를 가진 자기 나이 또래의 여자 친구들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응. 시은이랑 하은이. 둘 다 나랑 친한데? 왜? 소개시켜줄까?”
그전에 여자친구들과도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머뭇거리는 유설화.
그런 그녀를 대신해서 시은이와 하은이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시은아! 하은아! 설화도 우리랑 같이 점심 먹자는데? 괜찮지?”
“어? 설화도?”
“아·······”
시은이와 하은이의 일그러진 표정.
딱 보기에도 왕재수 공식 왕따 유설화와 같이 밥 먹기 싫어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나에게 푹 빠져있는 시은이와 하은이.
밥도 내가 샀겠다.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한다.
“으응. 그래. 시원아. 카레 식겠다. 빨리 와.”
“뭐, 어쩔 수 없지. 다른 애도 아니고 시원이가 같이 먹자는데.”
그렇게 어렵게 시은이와 하은이의 승낙을 받아내고 유설화에게 말한다.
“설화야. 가자. 시은이랑 하은이도 같이 점심 먹자고 하네.”
쭈뼛거리던 유설화도 더 이상 혼자서 밥 먹는 건 싫었는지, 식판을 들고 시은이와 하은이가 있는 자리로 같이 이동한다.
털썩.
시은이와 하은이의 앞 자리에 앉은 나와 유설화.
먼저 내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줄 겸 시은이와 하은이에게 유설화를 소개시켜 준다.
“얘들아, 여기는 설화야. 다들 알지? 설화 너도 시은이랑 하은이 알지?”
시은이와 하은이가 유설화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다.
“어. 설화야.”
“내가 시원이 때문에 유설화랑 밥을 다 같이 먹네.”
그나마 시은이는 설화를 싫어하는 티를 안내지만 하은이는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낸다.
유설화도 시은이만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응.”
그리고 어색하게 이어지는 침묵.
알고 보니 유설화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싸가지가 없었다.
하긴, 원래 세상에서는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유설화를 공주님 모시듯 했을 테니.
유설화 같이 예쁜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 여자들 세상에서는 의외로 유리한 점이 많다.
유설화가 버린 잘생긴 오빠들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고, 유설화 덕분에 꼽사리로 남자들에게 점심이나 술을 얻어먹을 수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쁜 애 옆에 있으면, 그녀들을 공주 모시듯 하는 남자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자존감이 올라간다.
물론 남자들의 목표는 당연히 유설화 한 사람이지만, 유설화에게 잘 보이려는 남자들 때문에 그녀들도 공주 취급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남녀가 역전된 세상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원래 세상에서도 잘생긴 남자 녀석 옆에 있어봤자, 오히려 자기 자존감만 떨어진다.
여자들과 술 마시면, 돈은 각자 n분의 1 하면서, 모든 관심은 잘생긴 녀석에게만 간다.
이것보다 더 손해 보는 장사가 없다. 더불어 오징어 취급까지 당하며, 못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을 서포트 하는 개그 캐릭터로 변모한다.
그런 이유로 지금 하은이가 유설화를 경계하며 냉담하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생태계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공들여 친해진 시원이인데, 갑자기 유설화 같은 재수 없는 미녀가 나타나서 낚아 채 간다면, 이것보다 더 분한 일은 없는 것이다.
유설화와 친해지기 위해 시은이와 하은이를 소개시켜 줬는데 오히려 분위기가 더 무겁기만 하다. 이럴 때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게 해야 한다.
“애들아, 오늘 카레 돈까스 맛있지 않니? 메밀소바도 시원하고. 그치?”
“응. 시원아. 시원이가 사줘서 그런지 더 맛있다. 진짜.”
“오늘 카레 소스도 진하고 진짜 돈까스랑 잘 어울린다.”
시은이와 하은이는 내 얘기에 호응 하지만 유설화는 그저 묵묵히 밥만 먹고 있다.
“아, 그건 그렇고. 설화야. 설화는 취미가 뭐야?”
취미가 뭐냐는 말에 유설화가 시은이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입술을 연다.
나와 단 둘이 있었으면 아마 또 무시당했었겠지만, 그나마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시은이와 가까워지고 싶은 모양이다.
“응. 나는 네일아트 받는 거랑 꽃꽂이? 화장품에도 관심이 많고. 시은이는?”
질문은 내가 했는데, 시은이의 취미를 물어보는 유설화.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네.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시은이가 당황스러워 하며 말한다.
“응. 나는 랄이랑, 피파?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분석? 뭐, 다른 여자애들이랑 비슷하지 뭐. 그런데 설화는 취미가 좀······”
분명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데 거기서 말을 끝내는 시은이.
하은이가 그녀의 말을 이어 받는다.
“너는 무슨 취미가 꽃꽂이에 네일아트냐? 남자도 아니고. 여자새끼가 진짜 여자답지 못하게.”
사실 꽃꽂이나 네일아트 같은 취미는 남녀가 역전된 세계에서는 남자들이나 즐기는 취미이다. 여자들은 보통 게임이나 스포츠 게임 같은 걸 취미로 즐겨한다.
하은이의 말을 듣고 다시 시무룩해진 유설화가 묵묵히 다시 밥을 먹기 시작한다.
아, 이러다 분위기 더 다운되겠네.
다운된 분위기를 업 시키기 위해 다시 설화에게 말을 건다.
“설화야 너 혹시 동물 좋아해? 고양이나 강아지?”
설화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한다.
“응.”
애완동물이라면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관심 있으니까, 이번에는 대화 주제로 괜찮겠지.
“그래? 그러면 혹시 요크셔테리어나 골드리트리버도 좋아하겠네?”
“응.”
“나도 요크셔테리어 완전 좋아하는데. 완전 귀엽지 않냐?”
“어.”
계속해서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유설화.
그리고 이를 바라보고만 있던 하은이가 분통을 터트린다.
“야. 유설화. 너 왕따 당하는 것 같아서 시원이가 신경 써서 챙겨주는 중인데, 진짜 그 따위로 대답할래? 대답 똑바로 안 해?”
하은이가 팔소매를 걷어 올리며 유설화를 매섭게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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