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도도한 유설화(2)
* * *
[나: 응, 유비야. 아니 그런 귀한 것들은 판매해야지. 나는 괜찮으니까, 괜히 점장님한테 들켜서 혼나지 말고.]
[이유비: 아니야, 시원아. 괜찮아. 시원이를 위해서라면 이런 거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마. 오히려 시원이를 위해서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어서 미안하기만 한 걸.]
아니. 유비야. 그게 아니라, 나는 그냥 민트초코 피로회복제랑 불닭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지 않은 거라고!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또 내가 받을 수밖에 없잖아.
하으·······
한숨을 쉬며 유비에게 페메를 보냈다.
[나: 알겠어. 유비야.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 유통기한도 있고 하니까, 혹시 우리가 못 만나면 그냥 유비가·······]
[이유비: 아니야, 시원아. 이거 유통 기한 엄청 길어. 1년이나 되는 걸! 그리고 내가 다른 신상품도 들어오면 시원이를 위해서 빼 놓을게. 다음 주에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민초라면이 출시한다던데!]
으윽. 맛이 없어서 잘 안 팔릴 것 같으니까 유통기한도 긴 것인가?
민트초코 라면이라니.
그 맛을 생각하니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다.
세상이 갈 때 까지 가는 구나!
[나: 아, 알았어. 유비야. 나 지금 수업 시작하려해서, 나중에 메시지 하자!]
[이유비: 시, 시원아! 편의점에는 언제 올 거야? 응? 나 오늘도 편의점에서 혼자 일해서 시간 많은데····]
급하게 유비와의 페메를 끝냈다.
유비의 민트초코 피로회복제와 불닭아이스크림이라는 극혐 신상품을 피하기 위해서는 한 동안은 유비를 만나는 건 피해야 할 것 같다.
유비와 메시지를 끝내고 강의가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한 명의 여학생이 강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하얀 피부에 조각 같이 아름다운 청순한 얼굴.
흩날리는 검은 긴 생머리.
그야말로 신비롭고 압도적인 미모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하아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빈자리를 찾는다.
터벅터벅.
걸어 온 그녀가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앉는다.
가까이에서 본 눈같이 하얀 피부와 사슴같이 큰 눈동자를 지닌 그녀.
유설화의 외모는 그야말로 천상계였다.
남녀가 역전되기 전의 세상에서 사실 나도 유설화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한 동안 그녀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유설화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남녀가 역전되기 전 세상에서는 그녀의 미모에 현혹된 남자들이 주위에 가득해서 나 같이 평범한 신입생은 감히 그녀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녀가 역전된 세상이고 상황은 반대가 되었다.
유설화가 내 옆자리에 앉자, 다른 여학생들의 시기어린 대화가 들렸다.
“어머, 저 늑대 같은 년 좀 봐. 재수 없게 우리 시원이 옆자리를 딱 차지하고 앉았네. 늦게 온 주제에.”
“씨발, 다른 년들 눈치 보여서 시원이 옆자리에 못 앉고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앉을 걸.”
“아서라. 너도 그러다 쟤처럼 왕따 당한다. 쟤 건방지다고 소문나서 학교 혼자 다니는 애 아니야. 그런데 건방지기만 한 게 아니라 눈치도 없네? 진짜 왕따 당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저 년 이름이 설화였지? 남자 선배들한테도 차갑고 싸가지 없게 굴어서, 완전 눈 밖에 났다더라. 꼴에 집은 좀 사는지, 포르쉐 타고 다닌데.”
“뭐야. 진짜? 금수저라서 저 싸가지로 하고 다니는 거야? 씨발. 집 좀 사나 봐? 그러면 그냥 학교 안다니고 가업 같은 거 물려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재수 없게 학교는 왜 꼬박꼬박 나와 가지고. 제발 눈에 좀 안 띄면 좋겠다!”
여론을 들어보니 설화는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얼음공주 유설화가 왕따를 당하게 된 거지?
시은이 얘기를 들어봤을 때.
유설화도 나와 같이 원래 살던 세계에서 남녀가 역전된 세계로 평행이동 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유설화 정도의 천상계 외모면 정말 개 싸가지가 아닌 이상,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유설화를 살짝 바라보았다.
유설화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사슴같이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아름다운 흑요석 같이 빛나는 검은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아름다운에 감탄하며 말을 건네고 말았다.
“안녕, 설화야.”
유설화가 인사를 건넨 나를 보더니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돌려 버린다.
마치 내가 그녀를 귀찮게 하는 날파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씨발. 남녀가 역전된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개무시를 당했다.
그리고 그제야 왜 유설화가 남자들에게 왕따를 당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야 뭐.
원래 살던 세계에서의 천상계 미모의 S급 여자들이 흔남들을 무시하는 걸 워낙 많이 봐서 익숙하다 하지만, 남자가 귀한 남녀가 역적 된 세계에서의 남자들에게는 흔히 겪는 일이 아니다.
보통은 남자가 먼저 말 걸어주는 것만으로 여자들은 그날 하루 종일 친구들과 화제 거리가 될 정도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말거는 경우는 흔치 않고, 그 말은 남자들의 자존심이 하늘을 치솟을 만큼 세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설화의 경우.
워낙 눈에 띄게 예쁘다 보니 자연히 남자들 중에서도 먼저 말거는 경우가 있었을 거고, 유설화는 원래 살던 세계에서 얼음공주로 유명했을 만큼 차가우니까, 당연히 무시했을 거다. 그래서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남자들이 유설화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을 거고.
더군다나 여자들은 여자들 나름대로 S급 외모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설화가 재수 없었을 거다. 보통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금수저에 잘생기기까지 한 녀석들은 술자리에서 뒷담화의 대상이 된다. 거기다 싸가지까지 없다면 그야말로 한 대 패거리고 싶을 정도로 재수 없는 새끼로 낙인찍히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인사를 먼저 건넸는데도 차갑게 씹은 유설화를 보며 여자들이 수근덕 거리기 시작한다.
아니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
“야. 방금 봤냐? 유설화 저 씨발년이 우리 시원이가 불쌍해서 먼저 말 걸어 줬는데도 씹는거?”
“진짜 저거 미친년이네. 그런데 우리 시원이는 인사 씹혔는데도 화 안내는 거 봐라. 시원이 성격 좋은 거 진짜 킹정이다.”
“감히 우리 시원이 인사를 씹어? 강의 끝나고 진짜 한 번 손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존나 싸가지 없네. 진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유설화를 욕하는 소리에, 유설화의 예쁜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때 마침 강의실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수님.
“자! 제가 조금 늦었네요. 그러면 오늘 강의 시작 할 테니 교재 꺼내세요.”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강의는 언어의 이해.
책가방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을 꺼낸다.
그런데 가방을 뒤척거리던 유설화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래도 수업 교재를 안 가지고 온 모양이다.
“설화야. 교재 안 가지고 왔니? 같이 보자.”
책상을 옆으로 붙이며 교재를 같이 보자며 말을 걸자, 유설화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본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큰 눈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차가운 독설.
“됐어. 유시원. 착한 척 그만 하지 그래? 너나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재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다시 책상을 떨어뜨리는 유설화.
그리고 그런 유설화를 째려보는 다른 학생들.
하지만 사실 나는 차갑게 구는 유설화의 모습이 재수 없다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진다.
‘그래, 여자가 너무 쉽기만 하면 정복하는 재미가 없지.’
솔직히 말해서 원래 살던 세계에서는 평범한 여자를 한 명 정복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운 여자 보다는 쉬운 여자가 좋았다.
하지만 남녀가 역전된 세계로 평행 이동하고 나서부터는 여자를 꼬시는 것이 너무 쉽기만 하다. 아니. 쉬운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먼저 섹스하자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사실 지금은 쉬운 여자보다 설화같이 정복하기 어렵고 까칠한 여자들에게 더 흥미가 당긴다.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험난한 산을 정복하는 느낌이랄까?
이래서, 원래 세상에서 돈 많고 잘 나가는 존잘 남 새끼들이 여자는 너무 쉬우면 재미없다고 하는 거였나?
돈 많고 잘생기면 다들 너무 쉽게 넘어오니까?
하여간 일단 지금은 설화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물러나기로 한다.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까.
지루한 소쉬르의 언어학에 관한 이해 수업이 끝나자, 나한테는 다시 한 번 눈길조차 안 주고 나가버리는 얼음공주 유설화.
유설화는 정말 정복욕구가 당기는 흥미로운 미소녀다.
유설화가 나가자 몇 몇 여학생들이 나에게 다가와서는 말을 건다.
“시원아. 괜찮아? 와 정말 유설화 씨발년. 개 싸가지다. 시원이가 왕따 당하는 거 불쌍해서 말 걸어 준 것도 모르고, 지가 잘난 줄 아네?”
“시원아. 저 왕따년 신경 꺼. 왕따 당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시원아, 상처받지 말고 누나들이랑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누나들이 우리 착한 시원이 위로해 주고 싶어서 그래.”
위험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는 선배 누나들.
잘 못하면 낮술 먹이고 강간이라도 할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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