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남녀역전 된 대학교(9)
* * *
“유설화? 아........ 쟤 존나 재수 없어져서 사람들이 피해 다니잖아. 시원이는 몰랐어?”
유설화가 정신이 이상하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설화가 정신이 이상하다니?”
“아, 시원이는 진짜 몰랐나 보네. 그러니까, 그게. 한 달 쯤 됐나? 원래는 설화가 여자답고 화끈해서 남자들이나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잖아. 그건 알지?”
얼음공주에 도도하기로 소문난 유설화가 화끈하다고?
당연히 성격 화끈한 유설화를 내가 알 리가 없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런데, 설화가 한 달 전 부터인가? 갑자기 완전 왕재수로 변해 버린 거야. 야한 농담을 해도 받아주지도 않고. 사람을 벌레 보듯이 보지를 않나. 원래는 자기가 제일 변태 같은 년이었으면서. 조금만 힘든 일 시켜도 못 하겠다고 하고. 지가 무슨 남자인 줄 아나. 약한 척은 혼자 다 해요. 아주. 그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성격 좋고 털털하던 유설화가 말도 없어지고, 예민해 져서, 혼자 사춘기 남자애처럼 말이야.”
시은이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지금 시은이가 말하는 유설화는 내가 원래 살던 세계의 얼음공주 유설화와 성격이 비슷했다.
설마, 이 남녀가 역전된 평행세계로 빙의 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닌 건가?
지금 시은이의 말만 들었을 때는 유설화 역시 원래 살던 세계에서 남녀가 역전된 세계로 빙의되었을 확률이 커 보였다.
시은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점점 설화를 기피하는 여자애들이 늘어났어. 학교에서 집단으로 왕따 당하기 시작한 거지. 성격이 거지같은데 어느 여자애들이 같이 다니겠냐. 요즘 같은 시대에 여자가 성격이 좋고 능력이 좋아야지 외모 예쁜 거 다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그나마 착한 남자애들이 설화가 불쌍하다고 가서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기도 했는데, 설화 이 미친년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또 남자애들이 말 걸면 쌩까더라고. 남자애들 자존심이 얼마나 쎈데. 당연히 먼저 말 걸었는데 거절당하면 뒤담화 졸라 까겠지. 그래서 설화는 남자애들한테도 왕따. 결국에는 저렇게 혼자서 학교 다녀. 밥도 혼자 먹고. 수업도 혼자 듣고. 말은 안 해도 존나 외로울 걸?”
하아........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찼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는 모든 남자들에게 공주 대접을 받던 유설화가 남녀가 역전된 세계에서는 재수 없어서 집단 왕따나 당하는 소녀가 되어있다니.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유설화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사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였다면 나 따위가 말을 걸어봤자, 유설화에게 완벽하게 무시당했겠지만 지금 같이 남녀가 역전된 세계에서는 나에게도 기회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학교에서 집단왕따에게 말을 거는 것은 눈치가 보인다.
물론 그녀가 나와 친했던 친구였다면 사람들 눈치 따위야 보지 않았겠지.
친구가 왕따를 당한다면 당당하게 나서서 나라도 친구를 위해 싸워야 한다.
하지만 유설화는 내가 원래 있던 세계에서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다.
그저 동경의 대상인 연예인같은 여학생 이었을 뿐.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괜히 말 걸었다가 무시라도 당하면 그건 또 그것 대로 쪽팔린다.
그래서 일단 유설화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녀가 혼자가 되었을 때.
완벽한 찬스를 위해 다음으로 기약한다.
“아, 그렇구나. 나는 전혀 몰랐네. 야, 그것 보다 시은이랑 하은이는 랄(legend of legend) 좀 하냐? 며칠 전에 형준이랑 PC방 갔는데, 형준이는 카트라이다만 하고 랄은 할 줄 모르더라. 아, 진짜. 팀 짜서 랭크 겜 하고 싶은데.”
랄이라는 말에 하은이와 시은이의 눈이 번쩍인다.
특히 조용하던 하은이가 다시 흥분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 혹시 시원이도 랄 하는 거야? 포지션이 어디? 나는 주로 정글을 한다오. 남자가 랄 시작하는 게 쉽지 않은데. 내가 도와줄까? 나 귀여운 스킨도 많은데. 레벨은 몇 이야? 아 랭겜 돌리고 싶다고 했으니까 레벨 30은 넘었겠네.”
갑자기 말이 많아진 하은이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아, 나는 주로 탑을 하는데. 탑 탑 탑! 포지션 안 겹쳐서 좋다. 시은이도 랄 하지? 시은이는 포지션이 뭐야?”
시은이가 자신 있게 말한다.
“나는 주로 미드라이너지. 여자도 미드가 중요하듯이, 랄도 미드가 핵심 아니냐? 어떻게 오늘 수업 끝나고 랄 한 판 할까? 이 누나만 믿고 따라 와. 내가 다 캐리 해줄 테니까. 아, 진짜 내가 르블렁 너프 되기 전까지만 해도, 완전 소환사의 계곡을 씹고 다녔는데.........”
오, 소환사의 계곡을 씹고 다닐 정도라면 적어도 플레티넘 정도의 실력은 되겠구나.
지금 내 계정을 강탈당해서 브론즈로 떡락 했으니까, 시은이 코인열차 좀 탑승해 볼까?
나는 시은이를 바라보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내 랄 급행버스가 될 시은이에게 잘 보여야지.
“진짜? 우와. 아깝다. 시은이 르블랑만 너프 안 되었으면 지금 다이아몬드 찍었겠다. 그치?”
다이아몬드라는 말에 시은이와 하은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 다이아몬드? 하하하. 시원이가 게임 방송을 많이 봤나 보데. 야. 시원아. 플레티넘, 다이아몬드, 챌린저 이런 애들은 그냥 뉴튜브 게임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애들이고. 에이, 시원이가 아직 랄을 별로 안 해봐서, 플레티넘, 다이아몬드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구나. 그게 볼 때는 쉬워 보여도 실제로 하면, 황금 손 아니고서는 골드 가는 것도 어려워.”
하은이도 시은이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치, 나도 학교에서 랄 좀 한다면 하는 편인데, 내가 이제 골드 2단계. 그리고 시은이가 실버 1단계야. 시은이도 르블렁으로 할 때는 골드 4~5단계에서 놀았는데, 르블렁 너프먹고 나서 병신 되서 실버에서 못 올라오고 있어. 시원이는 티어가 뭐야? 아이언? 아니면 브론즈?”
젠장.
나는 하은이의 말을 듣고 살짝 실망이 되었다.
어떻게 시은이 다이아몬드 티어 버스 좀 타보려고 했는데, 고작 실버라니.
그나마 하은이는 골드니까, 브론즈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하은이라도 티어 셔틀 시켜 봐야지.
“아, 그렇구나. 나는...........”
사실 내 원래 티어는 다이아몬드인데.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내 랄(ROL)의 티어는 브론즈니까.
괜히 다이아몬드였는데, 아이디 강탈당해서 브론즈로 너프 먹었다고 하면 거짓말쟁이처럼 들릴 테니까.
“응, 나는 브론즈야.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러면 요즘 남자들은 랄(ROL) 잘 안 해? 여자들은 꽤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여자들한테는 랄(ROL) 인기가 어느 정도야?”
시은이가 말하려 했지만, 하은이가 먼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시은이의 입을 막고 먼저 아는 척을 한다.
랄에서 만큼은 시은이가 하은이 보다 티어가 떨어지기 때문에 아는 척을 할 수 없다.
꼬우면 티어를 올려야지.
그게 바로 랄의 약육강식 세계니까.
“응. 남자들 중에서 랄(ROL) 하는 애들은 거의 없지. 있으면 아마 인기 폭풍일걸? 여자들이야 워낙 단순해서, 같이 게임해주는 남자면. 얼굴이 메주 같이 생겼어도 은근 좋아하는 여자애들 꽤 있잖아. 그런데 잘생긴 남자가 게임까지 잘하면........”
그렇게 말하면서 하은이가 나를 슬쩍 본다.
나에게 극도로 호감을 보이는 눈빛을 숨길 수 없다.
시은이 역시 나를 보는 눈빛이 처음 강의실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르다.
처음 강의실에서 하은이와 시은이가 나를 바라 볼 때는 그저, 몸 좋고 얼굴 잘생겨서 잘나가는 남자동기.
학과에서 인기 많으니까 나도 관심 있어 정도였다면, 지금은 마치 동경하는 아이돌을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애정이 담긴 눈빛이다.
그만큼 야동과 게임에 대한 공감대를 여자들과 공유하는 것은, 여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호감 포인트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만화에나 존재하는 모든 여성들이 선망하는 메인 히로인 캐릭터쯤으로 보일지도.
왜냐하면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현실 세계에서 몸매 죽이고 얼굴 귀여운 여자가.
학과에서 그저 그런 평범한 녀석들과 같이 밥을 먹기 위해 학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선배와의 약속을 파토 냈다.
그 것도 모자라서, 요즘 무슨 야동이 재미있느냐 면서 은꼴하게 만들고, 성격은 또 뭐 이리 털털하고 좋은지. 잘나가는 예쁜 여자인 주제에 밥은 또 자기가 산다고 한다.
거기다가 결정타로 랄(ROL)까지 같이 할 수 있는, 그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전천후 사기캐.
이런 정도의 여자 녀석이라면, 사귈 수 없다 하더라도 친구로라도 남고 싶어지게 된다.
사실 그 마음.
꼭 사귈 수 없더라도 친구로라도 남고 싶어.
이게 가장 큰 함정이자, 위험한 단계이다.
즉 남몰래 하는 사랑.
짝사랑의 시작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시은이와 하은이는 아직 자신들이 인지하지 못 하고 있지만.
그녀들의 나에 대한 조건 없이 무엇이든 주고 싶은 열렬한 짝사랑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 그러니까, 남자들 중에서는 보통 랄(ROL)같은 게임을 하는 녀석들은 거의 없다는 말이네?”
멍하게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보던 하은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시은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있다고 해도 랭겜을 못 돌릴 정도의 가끔 취미로 하는 정도거나, 그것도 아니면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인방용으로 랄(ROL) 돌리는 남자 정도?”
랄(ROL) 인방이라!
오, 이건 또 귀가 솔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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