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 세나와 두근 거리는 한강 데이트(4)
* * *
"데려 왔습니다. 사장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VAN에 타고 있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90도로 숙인다.
"회사와의 계약을 깨고 제 멋대로 행동한 것 치고는. 의외로 순순히 따로 왔군요. 세나씨."
허스키하고 굵은 목소리.
하지만 한국어 발음이 뭔가 어색하다.
"저를 미행한건가요?"
"미행이라기보다는, 비싼 돈 주고 키웠더니. 집 나가버린 개새끼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하시죠. 세나씨."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세나.
그녀가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아름다운 홍안을 빛낸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건가요?"
"하하. 협박이라니요. 세나씨. 수준 낮게. 그리고 정말로 협박이라도 할 것 같았으면, 지금 세나씨는 여기에 있을 수가 없죠. 아마 대림동 어느 지하 냉동실에 갇힌 채, 인육이 될 준비 중이었겠죠?"
"맞네. 수준 낮은 협박."
세나의 말에 VAN에 타고 있는 남자가 조용히 세나를 바라본다.
당장에라도 사람 하나쯤은 가볍게 손으로 찢어발길 정도로 살기가 가득한 눈빛.
하지만 그가 곧 살기를 거두고 호탕하게 웃기 시작 한다.
"하하하!! 진짜! 재미있군요. 세나씨. 당돌하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자, 이제 저 장난감 가지고 놀만큼 노셨으면, 회사로 돌아가야죠? 오늘 할 일이 많습니다."
"장난감?"
세나의 눈빛이 홍안으로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어도, 시현오빠를 무시하는 말은 참을 수 없다.
“그 말. 취소해.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하아. 요즘 애들은 정말. 가만 보면 꼭 나방 같다니까. 굳이 불속으로 목숨을 버리고 뛰어드는 모습이 말이야. 세나씨...”
세나를 바라보는 사자 같은 날 선 눈빛.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야!!!”
VAN에 타고 있는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로 세나의 온 몸이 찢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세나는 굴하지 않는다.
그의 맹수 같은 살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그 자리에 서서 보석같이 아름다운 홍안으로 사내를 노려본다.
도저히 이대로는 물러 날 것 같은 불청객들.
세나는 숨겨두었던 호신용 주머니칼을 꺼내들고는 날을 세운다.
“감히! 어디서!”
“칼을! 내보이다니 죽고 싶은 거야!”
VAN 주변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세나를 향해 달려드는데, VAN에 타고 있던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지른다.
“그만!! 내가 처리한다.”
덜컥!
VAN에 타고 있던 남자가 눈빛을 시퍼렇게 빛내며 차 문을 열고 VAN에서 내린다.
차에서 내리 남자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체격이 다부진 사내였다.
키는 185cm 정도에 근육질의 몸매.
짧은 회색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지금 나를 그 장난감으로 찌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귀엽다고 봐주니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보군.”
칼을 든 상대가 앞에 있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남자와.
칼을 쥐었음에도 오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나.
기세의 차이는 극명해 보인다.
“나도... 알아. 당신 무서운 거. 지금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하지만!”
세나가 들고 있는 주머니칼을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아니라.
칼날을 거꾸로 돌려.
자신의 잘 세공된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향해 겨눈다.
“나를 당신들 마음대로 조정하려 한다면, 지금 당장 내 눈을 파버리겠어. 보자고. 눈 한 개 밖에 없는 여자가 얼마나 상품가치가 있는지.”
점점 더 세나의 홍채와 가까워지는 칼날.
그 모습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회색 머리 남자.
갑자기 그의 어깨가 들썩들썩 거리기 시작한다.
“크큭.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크하하하!!!!”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는 남자.
그런 그를 향해 세나가 닿을 듯 말듯 한 곳까지 칼끝을 그녀의 홍안 깊숙이 들이 댄다.
“왜? 지금 비웃는 거야? 내가 못할 거 같아?”
살짝만 더 깊이 누르면 세나의 아름다운 보석 같은 홍안은 영원히 파손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한 쪽 눈을 잃어버릴 각오까지 한 세나.
그녀가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는 지금 상황에서 회사의 기세에 밀려 그들의 말 잘 듣는 장난감이 되어버린다면, 앞으로 그녀의 삶에서 유시현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한 쪽 눈을 잃더라도.
시현 오빠의 아름다운 모습은 나머지 한 쪽 눈으로 담을 수 있다.
단순한 세나의 머릿속에는 지금 그 생각 밖에 없다.
물러서지 않는 사내.
세나는 결단을 내린다.
꾸욱.
칼끝에 힘을 주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머니칼이 그녀의 눈을 망가트리기 바로 직전!
하지만, 세나의 다음 행동보다 더욱 빠르게 회색 머리사내가 움직인다.
츠츠츠... 파밧!
사자와 같이 날쌘 동작으로 세나의 주머니칼을 낚아챈 남자.
그가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에게서 낚아 챈 주머니 칼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세나의 가녀린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미소 짓는다.
“좋아! 오늘은 일단 물러나지. 황금알을 낳아줄 상품이 망가지면 안 되니까. 하지만.”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주머니칼을 바라보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에 넣는다.
“귀엽다고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내일 부터는 제대로 황 매니저가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거야. 한국 녀석들은 간이 작은 소인배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제법... 근성이 있는 녀석도 있군. 그럼 좋은 하루.”
그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선 회색 머리의 남자.
세나는 긴장이 풀려서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에 주저 않고 싶다.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회색 머리 남자의 소름 끼치듯 살기어린 목소리.
“그리고! 세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애송이와는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그의 눈빛이 악마처럼 빛난다.
“내가 질투 나서 그 애송이를 직접 찾아갈지도 모르잖아? 하하하!!!”
부우우웅!
마침내 세나를 뒤로한 채 떠나가는 검은색 VAN.
그리고....
풀썩....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버려 세나.
그녀가 그만 토할 것 같은 현기증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 * * * *
왠지 기운 없어 보이는 발걸음으로 유시현을 향해 걸어오는 세나.
세나를 기다리던 유시현이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세나야! 괜찮아?”
세나가 유시현을 보고는 힘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오빠....”
“그런데 왜 목소리에 힘이 없어. 세나야.”
“아무 일도 아니에요. 오빠.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좀 오늘 너무 많이 걸어서 힘들어서 그래요.”
“아. 그래. 하긴 나도 오늘 많이 걸어서 그런지...”
그때 유시현의 어깨에 스르륵 세나가 얼굴을 기대어 온다.
유시현을 보자 긴장이 풀린 세나가 자신의 몸을 맡기고 유시현에게 기댄 것이다.
“세나야! 왜 그래? 많이 힘들어? 진작 말을 하지!”
유시현의 어깨에 몸을 기댄 세나가 작게 속삭인다.
“오빠. 우리 이대로 잠시만 있어요. 아주 잠시만. 오빠랑 같이 있으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랑 있으니까. 금방 충전 될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
유시현의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한다.
세나의 붉은 머리에서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은 향기.
거기다 세나의 몸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비누냄새까지.
세나와 나.
단 두 사람만 아름다운 동화 속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다.
“세나야. 혹시. 세나는 나 좋아하는 거야? 실은 나, 나도 세나가.”
유시현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그의 속에 감추어두었던 마음을 고백해 본다.
처음 데이트 하는 사이에 이 정도로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던 유시현.
하지만 지금 꼭 세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려야만 할 것 같다.
“나. 세나 좋아해.”
“.......”
하지만 유시현의 품에 기댄 채 대답이 없는 세나.
설마, 나. 또.... 거절당하는 건가?
예슬이에게 고백도 하기 전에 차였던 아픈 경험이 있는 유시현이다.
그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흐릿해진다.
“세, 세나야. 미안해.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말을. 내가 너무 앞서 나갔지?......”
유시현이 재빠르게 수습을 하기 위해 세나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세나에게 들리는 답변은
“으으음... 오빠아.... 오빠아.. 가지 말아요.”
작고 귀여운 머리를 더 깊숙이 유시현의 가슴에 묻으며 정신없이 잠꼬대를 하는 세나였다.
“아.... 세, 세나. 그 새 잠든 거였구나. 하아... 다행이다.”
회사 사장과의 기 싸움 때문에 모든 기력을 소모했던 세나가 유시현을 만나자 마음이 느슨해져서 기절 하 듯 단잠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자신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세나를 바라보는 유시현.
시나도 유시현의 발에 기댄 채 갸르릉~ 거리며 잠시 동안의 휴식을 취한다.
‘지금 이 순간. 마치 데자뷰같아. 마치 오래전 너무 포근하고 따뜻했던 기억 같아.’
브이라인의 작은 얼굴.
백설기처럼 하얀 피부에 고양이처럼 큰 눈.
작고 오뚝한 귀여운 코.
루비처럼 붉은 입술에 가느다란 목 선.
유럽 어느 유서 깊은 왕국의 공주님 같은 세나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유시현.
그가 마치 마법에라도 홀린 듯이 천천히 세나의 하얀 뺨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선선히 불어오는 한 여름의 강바람.
기분 좋은 풀내음.
그리고 우리들만을 비추고 있는 것 같은 밤하늘의 별빛 아래서.
유시현의 붉은 입술이 세나의 하얀 뺨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을 다루 듯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