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세나와 두근 거리는 한강 데이트(1)
* * *
한강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 세나와 나.
그리고 나타난 갈림길.
세나의 발걸음이 멈칫한다.
호수 같이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세나.
“오빠 어느 길로 가야해요?”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아. 세나야. 오른쪽....”
사실 오른쪽으로 가면 한강에 금방 도착한다. 하지만 왼쪽으로 가면 한강으로 가는 길은 멀어지지만, 좀 더 근사한 산책로를 걸을 수 있다.
“세나야. 한강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야! 왼쪽!”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급선회한다.
“아. 외, 왼쪽이군요! 맞아요. 한강으로 가려면 왼쪽이죠! 저도 이제 생각났어요!”
세나의 손을 잡고 걷다보니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로 돌아가고 있다.
내가 왜 이러지...
평소에는 걷는 것을 싫어해서 가까운 거리의 음식도 배달시키지만.
이상하게 오늘 만큼은 발이 날아갈 듯 가볍다.
사람은 별로 없지만 꽃들이 활짝 핀 아름다운 산책로.
그 길을 세나와 걸으니 마치 꽃향기로 가득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다.
“오빠.”
꽃들로 가득한 산책로를 걷던 세나가 나를 바라본다.
산책로에는 수많은 꽃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가득 피어있었지만.
당언컨대 지금 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세나보다 더 아름다운 꽃은 없다.
“응. 세나야.”
보는 것만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담담하게 말한다.
“오빠는 어렸을 때 좋아하는 책이 뭐였어요?”
“어렸을 때 좋아하던 책?”
“네. 오빠랑 같이 이렇게 꽃들로 가득한 산책로를 걸으니까, 어렸을 적 아빠가 정원에서 읽어주던 책이 떠올라서요.”
“응? 세나 아버님이 읽어주던 책? 그 책이 뭔데?”
눈부시도록 귀여웠을 세나의 어렸을 적 모습을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귀여운 요정 같지 않았을까?
“어린왕자요. 아버지가 어렸을 적. 저에게 읽어주던 책. 어린왕자였어요.”
“아~ 어린왕자. 나도 그 책 좋아하는데.”
“오빠도요? 그럼 오빠. 오빠는 어린왕자에서 어느 부분을 가장 좋아해요?”
어린왕자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유명한 책이다.
읽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생각이 난다.
“응. 그 보아뱀? 있잖아. 어린 왕자는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을 그렸는데. 어른들은 다들 모자라고만 생각하던. 어렸을 때는 그저 순수하게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 그림이 신기해서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순진했던 내가 그리워서 어린왕자하면 그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 그림이 생각나는 것 같아. 아마... 지금 나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면, 나도 모자라고만 생각 할 테니까.”
누구에게나 아이처럼 순수했던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건, 바로 내 심장을 아이와 같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세나다.
“저도 그 그림 진짜 많이 봤어요. 자주 그려보기도 했고요. 그런데. 오빠. 저는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를 좋아했어요.”
“여우?”
“네. 오빠. 마치 저 같아서...”
어린왕자와 만난 여우.
어린 왕자를 읽은 지 너무 오래 되었기에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다.
세나가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루비같이 아름다운 입술을 천천히 떼기 시작한다.
“저는 아직도 어린왕자와 여우가 지구에서 만났던 대사를 다 기억해요.”
“정말? 아직도?”
“네. 오빠 들어 보실래요?”
아직 한강에 도착하려면 더 걸어야만 한다.
마침 붉은 저녁노을이 우리 머리위로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나를 바라보자 세나가 잘 세공된 보석처럼 아름다운 홍안의 눈을 감으며, 어릴 적 읽었던 어린왕자의 구절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안녕.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인사 했어요. 그리고...”
1인 2역을 하며 연기하듯 어린왕자의 대사를 읊기 시작하는 세나.
“넌 누구니? 정말 예쁘구나... 어린 왕자가 말했어요.”
“난. 여우야.”
여우 목소리를 흉내 낼 때의 세나는 정말 귀엽다.
세나의 붉은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쓰다듬어 주고 싶다,
“나랑 놀자, 난 너무나 슬퍼......"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제안했어요. 하지만. 난 너하고 놀 수가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단 말야." 여우가 말했어요.”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할 때 세나의 표정은 너무나 공허해서 마음속이 텅 빈 것만 같아 보였다.
“아, 미안해" 어린 왕자가 말했어요. 그런데 길들인다는게 무슨 의미지?”
길들인다.
여우를.
세나가 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어린왕자 속 대사를 읊기 시작한다.
“길들인다는 건...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야."
관계를 맺는다.
세나와 나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저 가끔 연락만 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세나와 나.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설레고 있다.
“관계를 맺는 다는 건...”
세나의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리고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세나는 나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내겐 넌 아직 수십 만의 아이들과 같은 어린아일 뿐이야. 난 네가 필요하지 않고. 너 역시 내가 필요하지 않아. 너에게는 내가 수십 만의 여우들과 같은 여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거야.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가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너한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고..."
그렇게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읊으며 나를 바라보는 세나의 눈빛은.
마치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제발...나를 길들여주렴!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햇빛을 받은 것처럼 밝아질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와는 다르게 들릴 너의 발자국 소리를 나는 알게 될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땅 속으로 숨을 거야.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길 바! 밀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나한테 쓸모가 없어. 밀밭을 보아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그래서 슬퍼! 그러나 네 머리칼은 금빛이야, 그래서 네가 날 길들인다면 정말 신날 거야! 밀도 금빛이기 때문에 밀은 너를 기억하게 해 줄 거야. 그래서 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까지 사랑하게 될 거고......”
마치 내 마음 속에 어린 왕자 얘기를 통해 세나가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다.
“세나야.... 세나는 세나가 어린 왕자 속 여우같다고 했지?”
한참 어린 왕자 속 여우와 어린왕자 연기에 몰입해 있던 세나가 마치 꿈속에서라도 깬 듯, 신비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네. 오빠.”
“그러면... 어린왕자가 세나를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해?”
“오빠. 그건...”
서로를 바라보는 세나와 나.
이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세나와 내 심장이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돼요. 저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으니까. 우선 나와 좀 떨어져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마 여우 세나는. 곁눈질로 어린 왕자를 볼 거예요. 그러면서 날마다 조금씩 더 가까이 앉으면..."
“앉으면?”
“여우 세나는 어린 왕자를 기다리기 시작 할 거예요. 상처가 많은 여우 세나는 마음을 여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 매주 같은 시각. 어린 왕자가 여우 세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다면....”
세나가 내 품에 안겨있는 시나를 쓰다듬으며, 행복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가령 어린왕자가 오후 네 시에 세 시부터 여우 세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예요.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 세나 여우는... 어린왕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암울하기만 했던 암흑 같던 세상이 이미 장미 빛으로 변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나도 모르게 세나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을 따라하고 있다.
“하지만 길들인 것에는 언제나 책임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린 왕자가 아니 시현 오빠가 세나 여우를 길들인다면, 오빠에게는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차라리 길들이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그토록 우리를 소중하게 만드는 건 오빠와 내가 함께한 시간일 테니까.”
말을 끝낸 세나의 표정은 세나를 만난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슬픈 모습이었다.
“세나야...”
도대체 과거의 세나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의 나로서는 쉽사리 위로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그녀의 아픔은 커 보인다.
“오빠. 미안해요. 제가 너무 감상에 젖어들었었나 봐요. 이런 얘기. 오빠가 아는 세나랑 맞지 않는데.”
다시 천사처럼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세나.
좀처럼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토해 낸 것처럼 세나의 표정은 후련해 보인다.
비록 지금은 세나는 나에게 있어 사막에서 만난 한 마리의 여우일 뿐이고, 나도 세나에게 있어 그녀가 봐왔던 수십만의 남자들 중 한 명일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 사이에는 관계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길들여지지 않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우 세나.
언제가 내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녀만의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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