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미유키와 데이트(14)
* * *
정갈하게 차려진 다섯 가지의 음식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음식은 트리플 버섯과 캐비어 그리고 각종 유기농 야채가 들어 간 샐러드였다. 식사하기 전에 식욕을 돋구는 에피타이저 주제에, 세계 3대 진미 중에 무려 두 가지나 들어간다.
고담람쥐가 미유키와 아유미가 준비한 에피타이저를 음미하며 눈을 감는다.
“호오! 과연 이 진하고 우아한 풍미. 두 분의 요리 솜씨는 미슐랭 쉐프에 뒤지지 않는군요! 이 고든람쥐 만족합니다.”
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샐러드인데, 그 독설로 유명한 고듬람쥐가 칭찬할 정도면 미유키와 아유미의 요리 솜씨는 정말 대단한가 보다. 하지만 평생 동안 트리플 버섯이라던가 캐비어 따위는 먹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딱히 맛이 상상이가지 않는다.
오히려 식욕을 자극하는 것은 딱 봐도 육즙이 질질 흐르는 지나칠 정도로 고기질이 좋아 보이는 스테이크였다. 역시 아는 맛이 무섭다고, 그래도 스테이크는 몇 번 먹어봤으니 얼마나 맛있는지 알고 있다.
스테이크라면 졸업식이나 결혼식등 특별한 날에만 영접할 수 있는 고급 음식이건만, 최고급 스테이크가 고작 점심에 나타나다니!
역시 부자들의 삶은 다르구나!
고듬람쥐가 칼을 들어서는 우아하게 조금씩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미유키를 바라보며 한 마디 한다.
“흐음. 미유키씨. 역시 아직 서양식에 대한 이해는 아유미씨에 대해 부족하군요. 고기의 풍미는 좋지만, 육즙이 부족해요. 조금 더 노력해야겠어요. 그리고 아유미씨. 스테이크 솜씨가 훌륭하군요. 이 정도라면 저희 식당에서 메인요리로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에요.”
“감사합니다. 쉐프님.”
아유미가 우쭐해 하며 미유키를 바라본다.
미유키가 으드득 이빨을 갈며 분한 표정으로 아유미를 바라본다.
“자, 그럼 다음으로는 랍스터 맛을 좀 볼까요?”
랍스터!
새우도 아니고 랍스터라니.
랍스터는 tv 속에만 존재하는 전설의 생물이 아니었던가?
남녀역전 세계로 빙의되기 전 새우도 비싸서 못 사먹던 나에게 랍스터 따위를 직접 영접해 볼 기회 따위는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새우의 10배 쯤 크고, 불그스름하게 잘 익은 랍스터.
버터와 치즈를 사용해 요리했는지 냄새 또한 끝내준다.
꼴깍.
나도 모르게 먹고 싶어서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으음. 이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고듬람쥐.
세상에!
매 번 화내는 모습만 봐왔던 고듬람쥐가 이렇게 활짝 미소 짓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오! 역시 두 분 다 바다 생물에 대한 이해는 완벽하군요. 정말 훌륭한 랍스터였습니다.”
아···
당연히 맛있겠지.
랍스터인데.
원래 새우나 게, 이런 종류의 녀석들은 하나같이 다 맛있다.
다음으로는 이제 갓 만든 것 같은 신선한 장어 초밥이 늠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도 크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것이, 최고급 품질임에 틀림없다.
역시 나 미유키와 아유미의 장어초밥을 하나 씩 맛 본 고듬람쥐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장어초밥은 역시, 미유키씨가 앞서는군요. 간수도 환상적이고. 무엇보다도 이 장어의 신선함! 오늘 밤은 좋은 곳이라도 가봐야 할 것 같군요. 험험.”
좋은 곳에 가봐야겠다는 말을 하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 고듬람쥐.
아니 이 아저씨가 도대체 우리 순수한 미유키씨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다가 온 마지막 음식.
디저트!
디저트는 최신 트렌드에 맞게 샤인머스켓 빙수였다.
영롱한 샤인머스켓과 잘게 갈린 눈꽃 얼음.
보는 것만으로도 상큼하고 시원하다.
“두 분 다 역시 최신 트렌드를 잘 알고 계시는 군요.”
작은 스푼으로 샤인머스켓 빙수를 떠서 맛 본 고듬람쥐가 두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이제 누구의 음식이 더 훌륭했는지 결정을 내릴 시간이 다가 온 것이다.
“흐음. 이것 참 힘든 결정이군요. 마치 마스터 쉐프의 우승자를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고민이 되었어요. 하지만! 아주 미세한 차이로. 저 고드람쥐는···”
긴장된 순간.
미유키와 아유미가 고드람쥐를 주목한다.
“저 고듬람쥐는! 아유미씨의 음식을 선택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유키씨. 역시 메인 요리인 아유미씨의 스테이크가 제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군요.”
고드람쥐는 결국 아유미를 선택했다.
미유키의 패배.
미유키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완벽한 줄로만 알았던 미유키도 역시 사람은 사람이구나.
“흥. 봤지? 역시 넌 나한테 안 된다니까. 미유키. 이제 승부가 났으니까, 어서 네 옆에 있는 못생긴 남자 데리고 한강에서 나가!”
역시나 말을 얄밉게 하는 아유미.
그리고 요리승부에서 진 것이 분한지 아유미의 표정이 우울해 보인다.
“알겠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미유키가 힘없이 나에게 말한다.
“오빠. 미안해요. 미유키. 중요한 승부에서 지고 말았어요. 꼭 오빠와 한강에서 데이트하고 싶었는데···”
우울한 표정의 미유키.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용기를 주고 싶어진다.
“아니에요. 미유키씨. 미유키씨 음식 아직 먹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맛있어 보이는 걸요? 그 것보다. 미유키씨. 배고프지 않아요?”
사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프다.
더군다나 그런 상태에서 차려진 산해진미를 보니 더더욱 배가 고파져서 배가 아파 올 지경이다.
“오빠. 배고파요? 사실 저도 배고파요. 여기에서 점심이라도 먹고 가면 좋은데···”
미유키가 아유미의 눈치를 본다.
미유키와 아유미는 승부를 했고 그 승부에서 미유키가 진만큼, 아유미에게 부탁하기는 힘들다. 이럴 때는 남자인 내가 나서야지.
“저기, 아유미씨!”
“흥. 왜 그러는데요. 추남!”
아유미를 향해 뒤 돌아서는데, 갑자기 불어오는 한강의 상쾌한 강바람!
휘이잉~
거센 강바람 때문에 순식간에 모자가 벗겨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모자가 벗겨진 내 모습을 본 아유미의 눈동자가 무엇인가에라도 놀란 듯 커졌다.
“어? 아? 에??? 나, 난데? 아, 아리에 나이!(말도 안 돼!)”
일본어로 무엇인가 혼잣말을 하는 아유미.
그녀의 볼이 순식간에 복숭아처럼 붉게 변했다.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서는 툭툭~ 털어서 다시 썼다.
그리고 아유미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요. 미유키씨가 승부에서 진 것은 알지만, 지금 저희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데 점심만 한강에서 먹고 가면 안 될까요?”
“네? 아. 예? 그... 하, 하사카시 데스.(부끄러워요.) 으으으.”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유키를 놀려 되던,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아유미는 어디가고.
다리를 비비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금발의 미소녀 아유미가 서 있다.
“네? 아유미씨?”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여있어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내가 아유미에게 다가가자, 아유미가 깜짝 놀라서 발그레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나, 난데!”
이상하게 두근두근 거리는 아유미의 심장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다.
“아유미씨. 금방 먹고 갈게요. 그런데 아유미씨. 가까이서 보니 피부도 좋으시고, 정말 귀여우세요.”
망설이는 것 같아 해서, 칭찬을 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 다니까.
하지만 칭찬을 해도 사실에 근서해서 해야 한다.
사실 가까이에서 본 아유미는 정말로 백옥 같은 피부에 귀여운 얼굴을 한 미소녀였다.
칭찬을 들은 아유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양 손의 검지를 맞부딪치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스, 스키데스! 처,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세, 센빠이.”
“네?”
또 다시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는 아유미.
당황하면 일본어와 한국어를 같이 쓰는 버릇이 있나 보다.
그런데 천천히 먹고 가라고 했으니까, 이거 지금 허락한 것 맞지?아유미의 귀여운 황금색 눈동자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다.
“고마워요. 아유미씨.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우네요. 그러지 말고, 아유미끼도 같이 먹죠? 아유미씨도 점심시간이라 배고플 것 아니에요?”
“와, 와따시모 데쓰까?(저도요?) 하, 하사카시 데스!(부끄러워요.)”
너무 긴장해서인지 일본어로 계속해서 말하는 아유미.
당연하게도 나는 야동으로만 일본어를 배웠으니.
기무찌, 야메떼 구다사이!
이런 단어 말고는 일본말을 모른다.
대충 감으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으니, 그냥 우리 자리로 데리고 가면 될 것 같은데?
덥썩.
아유미의 하얗고 고운 손을 잡자, 아유미가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본다.
“세, 센바이. 신도가 도떼이 하야모 데스!!!(진도가 너무 빨라요)”
뭐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손을 잡고 이끌자 아유미가 조금의 저항도 없이 내 손을 잡고 따라온다. 아유미의 손을 잡고 미유키에게 걸어오자, 미유키가 경계의 눈빛으로 아유미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아유미. 너 우리오빠랑 왜 손잡고 있는 건데!”
마치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탕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씩씩거리는 미유키.
나도 모르게 잡고 있던 아유미의 손을 놓으며 얘기한다.
“아. 미유키씨. 아유미씨도 미유키씨랑 같이 점심먹자고 했는데, 아유미씨가 부끄러워해서 제가 손잡고 데리고 온 거예요.”
“몰라요! 오빠도 제 남자친구가 되실 분이 그러면 안돼요! 막, 다른 여자 손을 잡고···”
“미, 미안해요. 미유키씨!”
내가 왜 사과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미유키가 화가 난 걸 보니 그녀의 마음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반면에 아유미는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