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 미유키와 데이트(10)
* * *
그녀가 멍한 눈으로 요리선생님을 바라본다.
“그런 거 모른다. 우리 러시아에서는 모든 요리에 다 케첩 넣는다. 그리고 불곰은 어디 있나? 불곰 안 들어가면 음식 아니다.”
묘하게 위압감이 느껴지는 러시아에서 온 사샤.
요리선생님도 쫄았는지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는 다른 학생에게 다가간다.
“안젤리나씨. 감자를 그냥 통으로 넣으면 어떡해요!”
“빌리. 이건 감자탕이 아니라 소금국이잖아요. 물을 1L는 더 부어야 하겠네요.”
“니카씨. 이건 무슨 국인가요? 감자탕에 식초를 왜 부어요!”
필리핀에서 온 니카가 동남아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괜찮아요. 선생님. 이렇게 한 다섯 시간 끓이면 맛있어 져요.”
요리 수업은 고작 한 시간이면 끝나는데···
동남아 스타일답게 여유로워도 너무 여유로운 니카.
하아···
오늘따라 요리수업이 힘든지 요리선생님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다.
하지만 어디에나 선생님을 만족시켜주는 뛰어난 학생은 있는 법.
얼큰하면서 시원한 감자탕 냄새가 난다.
요리 선생님이 냄새를 따라서 가니, 검은 머리의 동양인.
중국에서 온 진가련이 웃으며 서 있다.
“오! 진가련씨. 역시 재료 손질도 잘 하더니, 과연··· 양념장도 잘 만들었나 보군요. 제가 맛 좀 봐도 될까요?”
“네, 선생님. 선생님이 맛 봐 주시면 영광이죠.”
진가련이 예의 있게 대답하며 국자를 넘긴다.
“오! 이 맛은!”
눈을 감고 진가련이 끓인 감자탕을 음미하는 요리선생님.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과연 맛있게 얼큰하네요. 역시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요. 훌륭합니다. 진가령씨. 하지만, 아직 그 한국 감자탕 특유의 깊은 맛이 나지 않는 게 아쉽군요. 그래도 외국분이 만든 감자탕 치고는 정말 대단···”
대단하다는 말이 나오기 직전.
요리선생님의 코를 자극하는 깊고 얼큰한 냄새.
냄새만 맡았는데도 저 얼큰한 국물에 밥을 쓱쓱 말아서 퍼먹퍼먹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벌이 꿀에 이끌리듯이 거부할 수 없는 발걸음.
킁킁킁
냄새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한참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던 진가령이 급하게 요리 선생님의 팔을 잡아 본다.
“서, 선생님! 맛 평가는 끝까지 해 주셔야죠!”
자신의 팔을 잡는 진가령의 손을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뿌리친 요리 선생님이 좀비처럼 냄새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태어나서 이렇게 밥이 땡기는 얼큰한 냄새는 처음이야!’
* * * * *
요리선생님의 좀비 같은 발걸음이 닿은 곳은 당연하게도 미유키가 요리하고 있는 감자탕 앞. 자존심을 다 버리고 숟가락을 든다. 그리고 미유키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미유키의 감자탕을 수저를 들이미는 요리 선생님.
진하고 얼큰해 보이는 빨간 감자탕 국물.
그의 목울대가 꿀렁꿀렁 거린다.
“아, 아직 다 안 끓였는데요! 선생님.”
미유키가 말려보지만, 요리 선생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는 미유키의 감자탕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린 상태.
천천히 수저로 감자탕 국물을 떠서 입에 가져다 된다.
후후~ 불어서 입안에 넣는다.
꿀꺽.
마치 게 눈 감추듯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감자탕 국물.
매콤하면서 얼큰하다.
거기다가 뼈로 육수를 만든 것처럼 진하면서 여운을 남기는 맛이라니!
이것이야말로 감자탕의 신세계!
한 수저로는 도저히 만족이 안 된다.
아예 밥그릇을 들어서 국자로 퍼서 뜨거운 감자탕 국물을 후후~ 불며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한다.
“바, 밥이 필요해!”
분명 아침을 먹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감자탕 국물에 밥을 안 비벼 먹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끄억~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 덧 진하고 얼큰한 감자탕 국물에 밥까지 거하게 한 사발 비벼 먹고 난 후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모든 참가자들의 시선이 미유키와 요리선생님에게 쏠려있다.
요리 수업 도중에 참가자가 만들 요리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밥을 비벼 먹다니.
도저히 요리 선생님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순간이다.
정신을 차린 요리선생님이 최대한 이 순간을 모면하려 한다.
“미, 미유키씨!”
“네. 선생님.”
“감자탕이·· 먹을 만은 한데, 좀 짜네요. 그래서 급하게 밥을 비벼 먹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만은 하니까 계속 요리하세요. 그럼···”
“네? 짜요? 아, 역시.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에 비해 싱겁게 먹는데, 제가 깜빡했네요. 역시 선생님. 제 요리의 결점까지 딱 짚어내시고. 아직 시간이 있으니, 더 맛있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먹은 감자탕 보다 더 맛있게 만들다니?
무슨 미슐랭 쉐프라도 되는 것인가?
외국인에게 알바로 요리수업을 하는 반 전문가 수준의 요리 선생님이 일본 최고의 일식집 중 하나인 다래정의 사장이자 수석 요리사.
미유키의 요리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미유키의 감자탕을 맛 본 후, 열정을 다해 감자탕을 만들어 보았지만, 미유키가 만든 감자탕의 깊고 얼큰한 감자탕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학생에게 음식으로 밀리다니. 요리선생님으로서의 명예와 권위가 바닥에 떨어질지 몰라!’
조바심이 난 요리선생님.
그는 할 수 없이 숨겨두었던 비장의 무기에 손을 뻗치고 만다.
‘비록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용서받지 못 할 행동이라 해도, 어쩔 수 없어.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슬그머니 싱크대 아래 찬장을 열어 마법의 육수!
하루 동안 푸욱 고아낸 사골육수를 꺼내들어 조심스레 물을 버리고 새로 만드는 감자탕에 붇기 시작한다.
찐득찐득 진해 보이는 사골국물에 품질 좋은 돼지등뼈.
혹시 몰라 시레기까지 듬뿍 넣어 시원함을 배가 시켰다.
그가 여태까지 쌓아왔던 모든 정성을 다해 요리를 하기 시작하는 요리선생님.
이렇게 간절하고 열심히 요리를 해보는 건, 일류 호텔의 쉐프가 되기 위해 모든 젊음을 바쳤었던 시절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당연히 정성이 들어가고 좋은 재료가 들어가니, 일반적인 물과 고기가 들어간 감자탕보다 맛있을 수밖에 없다.
부글부글부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하는 얼큰한 감자탕.
수저를 떠서 맛을 보았다.
‘이 맛은!’
분명 자신이 여태까지 만들어 본 감자탕 중에서는 최고의 맛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들어 본 감자탕 중에서 최고이지, 감히 미유키가 만들어 낸 깊고 찐한 최고의 감자탕에 비한다면 여전히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도대체 저 일본 미소녀 참가자에 비해 뭐가 부족한 것일까!!!!!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좌절감에 빠져 고개를 푸욱 숙이고 한숨을 내쉬는 요리선생님.
그런 그를 향해 금발의 러시아 참가자 사샤가 천천히 다가온다.
“요리선생. 여기서 곰 냄새가 난다.”
“네???”
곰 냄새라니?
요리선생이 당황하는 사이 사샤가 잽싸게 수저를 뻗어서 후루룩~ 감자탕을 흡입한다.
“역시 곰이 들어가서 해장에 좋다. 보드카 한 병 까야겠다.”
그제야 요리 선생님은 사샤가 말하는 곰이라는 것이 고기를 우려낸 찐한 육수 국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저 없이 러시아식으로 작은 합플라스크 보드카병을 주머니에서 꺼내 꿀꺽꿀꺽 마셔버리는 사샤.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펄펄 끓고 있는 감자탕 솥을 하얗고 귀여운 양 손으로 잡고 마신다.
“사, 사샤씨. 뜨거워요!”
요리선생님이 말려 보지만, 러시아 슬라브식 스타일이라서인지 전혀 거침이 없다.
“캬~ 좋다. 뜨끈뜨끈하고 얼큰한 게 모스코우 고향 생각난다.”
선생님이 끓인 감자탕 맛있다는 사샤의 말에 하나 둘씩 모여드는 참가자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요리선생님의 감자탕을 각자의 그릇에 담아 맛을 보기 시작한다.
“와! 역시 선생님은 선생님이구나. 이렇게 깊고 진한 맛이! 마치 우리 이탈리아 최고급 파스타에 피자를 먹는 것 같아요!”
“피쉬 앤 칩스보다 맛있는 음식이 세상에 존재했다니. 역시 세상은 넓구나. 오늘 저녁 토트넘 경기는 감자탕에 소주 한 잔 하면서 봐야겠군요. 송흥미 언니가 한 골 넣어야 할 텐데. 해라카네 언니는 언제쯤 본캐로 돌아올지···”
“쉐쉐! 이 진가련은 스승님의 감자탕에 탄복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부디 제자로 받아주세요!”
물론 최선을 다 해 만들어서 인 것도 있지만, 당연히 사골 국물과 좋은 품질로 만든 요리선생님의 감자탕은 당연히 참가자들의 감자탕보다 맛있다.
참가자들을 기만한 것 같은 생각에 칭찬을 들어도 요리선생님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다.
그 때.
마지막으로 요리선생님의 감자탕을 국자에 퍼서 자신의 그릇에 담아 맛을 보는 미유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요리선생님의 눈동자가 동요되어 심하게 흔들린다.
‘끄, 끝이다! 대충 참가자 몇 명에게만 맛을 보여주고 선생으로서 존경을 받으려 했는데. 저 일본인 참가자 정도의 실력가가 이 감자탕 맛을 본다면. 나만 특별한 재료를 썼다는 것을 못 알아 볼 리가 없어. 그러면 모든 학생들의 나를 바라보는 존경의 시선이 경멸의 시선으로 바뀌겠지. 다 틀렸어··· 선생으로서의 명예와 자존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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