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미유키와 데이트(4)
* * *
아줌마가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미유키를 바라보지만 미유키의 보라색으로 빛나는 자안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다.
푹!
그러다 갑자기 멈추어 선 미유키의 오른 손.
단검은 가판대에 깊게 꽂혀있었다.
“흐음, 역시 내 손으로 하는 건, 너무 쉬워서 흥미가 생기지 않는군요.”
“네? 그게 무슨 말이신지.”
미유키가 검을 다루는 것을 본 사기꾼 아줌마가 어느새 미유키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
주섬주섬 지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는 미유키.
“아줌마. 제가 여기 오면서 쿠폰을 받았습니다.”
“쿠, 쿠폰이요?”
당황한 아줌마.
갑자기 전통시장에 와서 쿠폰 타령이라니.
하지만 이미 미유키의 광기를 본 아줌마는 섣불리 그녀를 무시 할 수 없다.
미유키는 더 이상 그녀에게 있어서 외국인 호구가 아니다.
자기 손가락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찍어 되는 여자.
그런 여자가 수틀리면 검의 방향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즉 언제 무슨 일을 낼지 모르는 미친 여자인 것이다.
“제가 일본 사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90프로 할인 쿠폰이라고.”
“9, 90프로요?”
“네. 여기 보세요. 90프로.”
미유키가 아줌마에게 내민 전단지는 근처에 있는 E마트 특별할인 품목에 관한 90프로 할인 쿠폰이었다.
“아, 아가씨. 이건 여기가 아니라, 저기 마트에서···”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미유키를 바라보는 아줌마.
미유키가 덥석 아줌마의 손을 잡더니.
가판대에 꽂혀있는 단도를 잡아든다.
“저는. 일본사람이라. 그런 것 잘 모릅니다. 한국말 몰라서. 숫자밖에 안 보입니다. 90프로.”
부들부들 떨리는 사기꾼 아줌마의 손.
힘을 줘서 빼내려 해봐도 아줌마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보기에는 가녀리게만 보이는 미유키이지만, 그녀의 근육은 실전 압축 근육인 것이다.
“이 단도. 90프로 할인. 맞죠?”
“아, 아가씨!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요?”
아줌마가 마지막 남은 용기를 짜 내어서 미유키에게 반항을 해 본다.
하지만.
“역시. 이 단도. 다시 한 번 시험해 봐야겠어요. 아줌마. 손가락 벌려. 잘리면 곤란하니까.”
하얗게 질려버린 아줌마.
그리고 그런 아줌마를 아랑곳하지 않고 참교육 하는 미유키.
단도를 쥔 그녀의 손이 움직이려 하자, 아줌마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 알겠어! 90프로 할인. 90프로!”
그제야 아줌마의 손을 놓으며 미유키가 귀여운 미소를 날린다.
“고맙습니다. 역시 대 일본 제국을 도와준 친일파 매국노의 자손이라서 통이 크군요. 아 그리고!”
“네? 네에???”
아직까지 겁에 질린 얼굴로 미유키를 바라보는 사기꾼 아줌마.
미유키가 다시 한 번 귀엽게 웃으며, 전단지를 가리킨다.
“여기, 90프로 할인에 1 + 1 이라고·····”
그녀의 눈은 이번에는 호랑이가 그려진 단도에 가 있다.
“우리 오빠도 커플 단도 필요해서.”
호랑이가 그려진 단도를 바라보는 사기꾼 아줌마.
“이, 이건 진짜 안 돼! 이거야 말로······!”
어? 이거야 말로?
설마 호랑이가 그려져 있으니까·······
“이거야 말로 사신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현무의 혼이 담긴 단검이란 말이에요!!!”
하아···
진짜 이 사기꾼 아줌마는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구나.
* * * * *
“오빠 진짜 잘 어울려요. 오빠도 마음에 들죠?”
내 허리춤에 걸려 있는 호랑이가 그려진 단검을 보며 기뻐하는 미유키.
미유키의 그런 무시무시한 모습을 봤는데, 당연히 마음에 들어야지.
마음에 안 들면 살해당해 버릴지도 모른다.
“네. 미유키씨가 준 선물이니까. 마음에 들어요.”
단 돈 8,000원에.
붉은 주작이 그려진 주몽의 검과.
무려 사신 중에서도 강력하다는 현무의 혼이 담긴 단검까지 1+1으로 습득한 미유키.
부자일수록 더 조심하라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다.
물론 외국인을 호구로 보고, 친일파 조상을 자랑스러워하는 사기꾼 아줌마를 참교육 해준 건 기뻤지만.
“오빠, 우리 이제 E마트라는 곳에 가 볼까요?”
“E마트요?”
“네. 아직 한국에 와서 그런 곳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요. 전단지를 보니 어떤 물품이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미유키는 의외로 대형마트 조차 한국에서 가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아, 그렇구나!”
“네. 오빠. 그리고··· 그리고! 오빠랑 결혼하면 마트에 장도 보러 가야 할 테니까요. 이 기회에 예행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꼭 가보고 싶어요! 주부로서의 미유키의 확실한 모습. 오빠에게 보여 줄 테니까요.”
무언가 대단한 각오를 하듯 주먹을 꽈악 쥐는 미유키.
대형마트에 가는 게 그렇게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나?
아니,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랑 결혼하면 마트에 장을 보러 가야 한다고?
미유키는 도대체 어디까지 앞서가는 거야!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고 있는 미유키.
그녀의 하늘하늘 거리는 보라색 머리와 하얀 피부.
토끼같이 큰 눈망울.
이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유키가 미래의 내 신부?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미유키는 그런 엄청난 말을 하고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다.
“오빠. 그런데··· 한국 전통시장에서는 저런 것도 팔아요?”
미유키가 섬섬옥수 같은 하얀 손을 들어 할머니와 아이가 빨간 세수 대야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가리켰다.
고양이 손 모양의 과일 깎는 필터.
손으로 돌려서 음식을 갈 수 있는 수제믹서기.
거기다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물 위에 뜨는 오리고무인형.
모두 조잡하기 그지없는 물품들이다.
거기다가 할머니와 손녀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물건을 팔고 있는 자리는, 한 평도 안 되는 구석자리.
돈이 없어서 그냥 집에 있는 물건을 잡히는 대로 들고 나온 게 틀림없었다.
“아. 미유키씨. 저건 그냥 집에 있는 중고물품을 팔려고 나온 할머님 같은데요?”
“중고물품? 오빠. 우리 저기 가 봐요. 저 물건들에서 장인정신이 느껴져요.”
미유키가 나와 팔짱을 낀 채 할머니와 어린 여자이가 물건을 팔고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과일 깎는 필터와 믹서기.
오리인형에서 장인의 정신이 느껴진다니.
도저히 미유키의 정신세계는 이해하기 힘들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험악하게 생긴 상인 아줌마에게 혼나고 있었다.
“아니. 할머니! 여기는 우리 자리라니까! 어서 꺼져요. 어서!”
“미안해요. 우리 손녀가 너무 배고파해서. 이거라도 어떻게 좀 금방 팔고 갈게요. 잠깐만 좀 봐줘요.”
보아하니 할머니가 더 일찍 와서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험악하게 생긴 상인 아줌마는 더러운 인상과 힘으로 할머니 자리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할머니. 배고파··· 어제부터 물만 마셔서 라면 먹고 싶어.”
손녀딸이 할머니를 바라보며 굶주린 배를 손으로 어루만진다.
“세경아. 조금만 참아. 이거 팔아서 할머니가 라면 두 개 끓여줄게. 계란도 넣어서. 응. 착하지. 우리 세경이.”
손녀딸을 달래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와 손녀딸을 보면서도 험악한 상인 아줌마는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인다.
“이거 둘이서 연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싸구려 동정심 따위 불러일으키지 말고. 어서 꺼지라고요. 꺼져! 진짜. 재수 없게. 아침부터 어디 거지같은 것들이 굴러 들어와서 남의 자리를 뺏고 지랄이야. 지랄이!”
점점 더 험악해져 가는 분위기.
미유키가 당당하게 그 사이로 걸어간다.
“할머니. 이거 파시는 거예요?”
미유키의 출현에 험악한 상인 아줌마가 매섭게 노려보며 시비를 건다.
“외국인! 지금 뭐하는 거야? 왜 어른들 얘기하는데 끼어들어서, 훼방을 놔! 훼방 놓기를!”
미유키가 할머니와 할머니 손녀딸을 향해 미소를 보이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상인 아줌마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줌마. 저도 다 들었는데. 이 자리가 아줌마 자리에요? 주인 있는 자리 아니잖아요.”
사실 시장에는 각자의 암묵적인 구역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가 있는 자리는 일반인들도 물건을 팔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임시 자리.
말하자면 정해진 주인이 없는 자리다.
그러니까 험악하게 생긴 아줌마가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뭐? 이게 미쳤나. 외국인이라고 좋게 말로 하니까. 겁 대가리를 상실했네. 한 대 처 맞고 병원실려가기 전에 어서 꺼져라. 그리고 틀딱 노인네. 노인네도, 거지같은 애새끼 데리고 꺼져. 확 다 부셔버리기 전에.”
한 눈에 봐도 건장한 체구의 험악한 상인 아줌마.
그 힘을 믿고 입도 거칠다.
내가 나서야 하나? 라고 생각도 했지만.
판도라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미유키다.
그녀를 일단 믿어보기로 한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덤벼 보시죠. 말로만 하지 말고. 멧돼지 같이 생겨가지고는.”
“뭐! 멧돼지!”
공교롭게도 상인 아줌마의 인상은 정말 딱 성질 사나운 멧돼지 같아 보였다.
별것 아닌 말에 저렇게 흥분하는 것 보니,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줌마의 별명은 멧돼지였던 것이 확실하다.
“오냐! 너, 말 한 번 잘했다. 삐쩍 말라서 눈은 크고 피부는 새하얘가지고! 사슴? 토끼? 담비! 아, 아니 하여간!!!”
미유키는 너무 예뻐서 어떤 동물을 가져다 붙여도 귀여운 동물밖에 생각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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