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 미소년이 살아남는 법-177화 (177/413)

〈 177화 〉 걸레들이 후회하며 집착한다(13)

* * *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가만히 서유리의 책상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는데, 서유리가 자리에 앉으며 속삭인다.

“시현오빠, 지금 업무 보느라 정신없으니까 빨리 화장실로 가서 숨어요.”

역시 싸가지 없는 서유리의 말투.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한 바탕 하고 싶지만, 지금은 일단 참는다.

난자처럼 은밀하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허리를 숙이고 움직인다.

­스스슥!

과연 내 잠복술은 대단하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최고의 여류 암살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시대를 잘 못 타고 태어났다.

그렇게 무사히 여자 화장실까지 시현씨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에 성공했다.

휴우. 힘든 시간이었다.

치마에 손을 뻗어서 지갑을 꺼냈········

아니 꺼내려고 했는데 지갑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서유리의 책상 밑에 흘리고 온 것이 분명하다.

다른 건 몰라도 지갑은 있어야 한다.

목마르면 음료수도 뽑아 마셔야 하고.

화장실에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건 너무 잔혹한 일이다.

목마르고 배고파서 죽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잠입술을 발휘해 본다.

­스스스슥!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다.

내가 봐도 경이롭다.

역시 이쪽에 재능이 있구나.

그런데 허리가 너무 아프다.

잠시 허리를 쭈욱 피며 한 숨을 돌리는데.

젠장!

역시 시현씨는 보통이 아니다.

내가 잠깐 방심한 사이 나를 발견해 내고야 말았다.

“아영씨!”

시현씨가 나를 부른다.

안 돼!

여기서 들킨 게 발단이 되어서 시현씨가 퇴사라도 하면.

다른 여자팀원들에게 돌림빵 당할지도 모른다.

시현씨에 관한 일이라면 미친년들이 눈에 불을 키고 쌍또라이가 되어 달려든다.

1 대 1이면 자신 있지만, 3 대 1은 자신이 없다.

재빨리 다시 허리를 숙이고는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영씨! 어디 가는 거예요? 할 말 있으니까 좀 멈춰 봐요!”

시현씨가 나를 부르지만 무시하고 몸을 숨긴 채 달린다.

­스스슥!

­다다다다다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뒤를 돌아본다.

뒤에서 나를 붙잡기 위해 달려오는 시현씨.

존나 빠르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엘리베이터까지만 가면 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빨리 벗어나면 살 수 있다!

그런데.

마침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이 많은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다가 위층에서 멈추었다.

“에이. 씨발! 왜 다들 나만 가지고 그래! 진짜 미치겠네.”

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비상구 쪽 계단으로 뛰어가서, 비상구문을 덜컹! 열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계단을 날듯이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헉. 헉·······

힘들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 시현씨는 따돌린 것 같다.

괜히 고등학교 때 날아다니는 다람쥐.

날다람쥐라고 불린 게 아니다.

쌤들의 눈을 피해 토끼던 실력이 사회에 나와서까지 도움이 되다니.

잠깐의 부주의함으로 시현씨에게 위치를 노출시키고 말았지만, 침착함과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역시 나는 팀장으로서 자격이 있다.

엘리베이터 옆 비상계단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보니 유시현씨다.

전화를 피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전화까지 피하면 억울하게 회사에 출근했음에도 결근 처리가 될 수 있다.

일단 전화를 받아본다.

뚜르르르! 딸칵!

“아영씨.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거예요? 할 말 있으니까, 빨리 사무실로 와요.”

익숙한 시현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도 감미롭고 부드럽다.

빠져들 것 같다.

으·······

안 돼. 김아영 정신차리자.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 낸다.

“네? 팀장님? 저 지금 외근중이라 사무실 못가요.”

“외근 중은 무슨 외근중이에요. 방금 전에 사무실 앞에서 봤는데.”

이럴 때는 그냥 아 몰랑이 답이다.

끝까지 모른 척 한다.

“네? 그럴 리가요. 닮은 사람을 본 거겠죠. 저 진짜 외근 나와 있거든요. 어? 어! 잘 안 들려요. 저 지금 전화기가 잘 안 터져서. 그 점심시간 전에 들어갈게요. 팀장님. 끊어요!”

­딸칵!

휴우········

원래 내가 살던 세계에서 자주 쓰던 아몰랑! 작전으로 다행히 위기는 넘긴 것 같다.

위기를 넘긴 건 다행인데.

지갑을 못 가져와서 돈이 하나도 없다.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해서 배가 고픈데·······

­꼬르르륵!

눈치 없게 배에서 천둥이 친다.

여자팀원들만 있는 비밀 카통방으로 메시지를 보내본다.

[나: 저기 유리씨. 나 지갑 유리씨 책상 밑에 흘리고 온 것 같은데, 화장실로 가져다주면 안 될까?]

·······.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답장이 없다.

서유리 이 씨발년

배에서는 계속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배가 고프니 민감해 진다.

[나: 유리씨가 바쁜 가 본데, 미희씨나 다정씨가 여자 화장실로 지갑 좀 가져다주라.]

카통!

드디어 답장이 온다.

휴우·······

다정 차장이다.

그래도 다정 차장은 나를 좀 생각해 주는 구나.

[다정차장: 아, 팀장님. 칠칠치 못하게 왜 지갑을 흘리고 다녀요. 지금 시현씨 얼굴 보느라 바쁘니까 이따가 시현씨 퇴근하면 가져다 드릴게요.]

시현씨 퇴근하면?

이, 씨발년이!

그 말은 나는 밥도 먹지 말고 화장실에 짱 박혀서 회사 끝날 때까지 숨어 있으라는 말 아니야!

서유리랑 김미희 주임은 내 카통을 보고 읽씹한다.

최다정 차장 역시 안 보내느니만 못한 카통을 보내며 내 성질을 긁고 있다.

벌써 시간은 점심시간에 가까워지고 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내가 죽든 니들이 죽든 한 번 해보자!

무시 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해야 참을 거 아니야.

­꼬르르륵! 꼬륵 꼬륵!

배에서는 천둥이 치는 것 같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시현씨한테 선물이나 받고, 서유리, 김미희, 최다정도 좆되게 자폭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평소라면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했겠지만.

지금같이 배 등가죽이 허리에 붙어있을 때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냥 성큼성큼 개발사업부실을 향해 걸어간다.

폭탄 아영이가 간다.

다 죽었어!

* * * * *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개발사업부팀 앞에 다다를 때 까지 시현씨를 보지 못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다.

하지만 나를 발견한 서유리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니, 팀장님! 오지 말라니까 그러네. 꺼지라는 말 이해 못해요?”

볼이 빨개진 채 나를 노려본다.

혹시라도 시현씨가 나를 발견할까 봐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다.

“씨발. 이제 나도 몰라! 그러게 내가 협조 할 때 좀 잘하지 그랬어. 아, 몰랑! 그냥 나 시현씨한테 이제 그만 모습 드러낼래. 안 그래도 우리 시현씨가 나 하루 종일 찾았다며. 무슨 선물을 주려고 나를 하루 종일 찾으시지.”

자포자기한 여자는 무섭다.

같은 여자인 김미희, 서유리, 최다정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눈치 빠른 서유리가 얼른 나에게 다가와 비굴모드로 나온다.

“에이. 팀장님. 제가 카톡 씹었다고 삐지신 거예요? 미안해요. 업무가 너무 바빠서 그랬어요. 화 풀어요.”

“그래. 아영팀장님. 내가 미안해요. 그냥 아영 팀장님 심심할까봐 카통으로 장난 좀 친건데. 설마 진심으로 받아들인 거야? 우리. 유시현씨 퇴사 결사반대! 같은 팀이잖아요. 이러지 말아요. 응?”

최다정 차장도 아까 나에게 보냈던 카통에 대해 사과한다.

독하게 마음먹고 사무실로 왔지만, 막상 사과를 받으니 조금 마음이 풀어진다.

“왜, 이제 와서 그래. 다들. 아까는 개무시 하더니. 내가 시현씨한테 모습 드러낸다고 하니까. 이제야 좀 잘해 줄 마음이 들어? 왜? 아까처럼 나 개무시 해보지 그래. 응?”

서유리와 최다정이 웃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 팔짱을 낀다.

“팀장니임~ 우리가 언제 팀장님 무시했다고 그래요. 팀장님이 오해하신 거라니까. 진짜.”

“어머, 아영 언니. 진짜. 서운하다. 내가 평소에 언니 얼마나 챙기는 줄 알면서, 그 정도로 밖에 생각을 못 한 거야? 아영 언니. 이 다정이가 점심시간에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스탈벅스 카라멜 마키야토 사올게. 조금만 참아요. 응?”

자리에 앉아서 인터넷쇼핑을 하던 김미영 주임도 합세한다.

“그래요. 팀장님. 이제 오전 시간도 다 갔는데, 딱 다섯 시간만 참으면 퇴근 아니야. 오늘만. 딱 오늘만 잘 버텨줘요. 그러면 우리가 주말에 어떻게든 시현씨 퇴사 못하게 할 방안을 강구해 올 테니까. 오늘은 우리가 팀장님 업무도 다 커버해 줄 테니까. 팀장님은 그냥 어디 구석에서 인터넷 쇼핑이라도 하면서 놀면 된다니까. 놀면서 회사 다니고. 얼마나 좋아요. 안 그래요?”

뭐, 생각해 보니.

사실 그냥 시현씨한테 안 들키고 몇 시간만 참으면 된다.

심지어 오늘 해야 할 업무들도 다른 팀원들이 커버해 준다고 한다.

나쁜 제안은 아닌다.

다시 마음이 약해진다.

“아, 진짜. 사람 마음약해지게. 다들. 그러면, 나 점심시간에도 숨어 있어야 하니까, 대신 맛있는 점심 도시락이나 좀 사다 줘요. 지금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진짜.”

“어머. 우리 팀장님 배고프세요? 걱정 말아요. 우리 팀장님 오늘 고생하는데, 최고급 도시락으로 모실게요. 뭐 좋으세요? 특뿔급 한우? 품격 넘치는 스테이크?”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