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제발 가지 마!(4)
* * *
최다정 차장과 김미희 주임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김미희 주임님이랑 다정 차장님도 시현이 오빠한테 선물 받았다고 했죠?”
“응. 그게 뭐?”
최다정 차장과 김미희 주임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코 생겨서는 안 될 일이 생각나버렸다.
“이거 혹시.........”
안 돼! 설마. 그럴 리가 없어.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돼.
이제야 겨우.........
이제 겨우.........
시현씨에게 용서를 빌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라고 말 할 용기가 생겼는데.
제발....... 시현오빠.
“이거....... 혹시. 오빠가 우리들에게 주는 퇴사선물은 아니겠죠? 생각해봐요. 갑자기 이렇게 시현이 오빠가 우리에게 선물을 줄 일이 뭐가 있는지.”
마침내 서유리의 입에서 나온 절대로 생겨서는 안 될.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될.
무서운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유시현이 없는 회사라니.
이미 유시현에게 철저히 길들여진 김미희 주임, 최다정 차장. 서유리 사원에게 주인이 없는 회사에 남는 다는 건.
자신들을 대신해서 모든 걸 떠받치고 있었던 남자가 회사를 떠난다는 건.
도저히 그녀들로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 잡아야 해!”
김미희 주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현씨가 회사를 떠나게 할 순 없어. 온 몸을 내 던져서라도 잡아야 해. 고맙다고. 미안했다고. 아직 그 흔한 말조차 한 번 한 적이 없는데. 절대. 절대 이렇게 보낼 순 없어.........”
도도하고 꼿꼿하기만 하던 최다정 차장의 몸이 허물어지듯 무너져 내린다.
“오빠. 안 돼. 진짜....... 이건 아니야. 나 이제야 오빠한테 힘들 땐 나한테 기대도 된다고, 같이 해쳐나가자고. 그렇게........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빠. 제발 가지 마. 아니야. 아닐 거야. 그 동안 그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지고 있던. 우리 오빠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순 없어.”
서유리 사원의 검은색 큰 눈동자에서 후회로 가득 찬 구슬처럼 굵은 눈물방울이 계속해서 그녀의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 *
차곡차곡 맞아 떨어져가는 파편의 조각.
유시현이 다른 팀원들을 위해 스스로 퇴사를 결정 하다니.
아영팀장이 눈을 감고 그동안 유시현과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본다.
여자로서는 하기 힘든 잡무를 노예같이 시키기 위해 유시현을 팀원으로 뽑았다.
사실 아영팀장도 어떤 일을 시켜도 묵묵히 해내는 책임감 강하고 남자다운 유시현이 처음부터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건 아니다.
유시현을 뽑고 열심히 일하는 유시현을 보며 처음 아영팀장이 가진 생각은.
그래,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였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한 유시현이 기특하고 듬직했다.
하지만.
여자들만이 가득한 팀의 분위기.
그 분위기가 서서히 유시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왜곡시키고 비틀기 시작했다.
휴식시간 동안 주절주절 수다가 일상인 여자들의 문화.
점점 할 얘기가 떨어지자, 남자팀원들을 씹기 시작했다.
“어머, 팀장님. 유시현씨 계속 보니 좀 어벙한 것 같지 않아요? 내가 하면 5분이면 다할 파일 정리를 멍청하게 30분 동안 하고 있더라고요. 일을 우직하게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머리도 좀 써가면서 해야죠. 팀장님. 제가 일을 안하는 게 아니라. 일을 빨리 끝내서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입이 간지러운 김미희 주임이 끼어든다.
“그치? 유리씨? 나도 시현씨 가만 보면 좀 답답할 때가 있더라. 점심 때 스탈벌스 심부름 좀 시키면 우직하게 그 긴 줄을 다서고 있어. 끼어들기 좀 하면 간단히 해결될걸. 뭐, 그렇게 답답한 꼰대처럼 행동하면 자기 점심시간만 줄어드는 거지 뭐.”
김미희 주임의 말에 이번에는 최다정 차장이 목소리를 죽이며 맞장구를 친다.
“진짜. 팀장님. 미희차장님. 유리씨. 이거 자기들한테만 하는 말인데. 어디 이런 말 내가했다고 세어나가면 안 돼. 알겠지? 어제 사실 나 시현씨랑 둘이서 술 마셨거든. 그렇게 싫다고 싫다고 하는데.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꼭 나랑 술 한 잔 해야겠다고 해서. 무서워서 한 잔 마셔줬는데. 글쎄........ 어머어머어머! 자기들 이리 가까이 와봐.”
호기심에 바짝 최다정 차장을 향해 모여든 여자 팀원들.
“글쎄. 시현씨. 알고 봤더니 집이 아주 거지 집안이더라고. 부모님이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는지 글쎄 아직 변변한 자기 집 한 채 없더라. 요즘 세상에. 시현씨 엄마 아빠면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자기 집 한 채 제대로 없어? 그렇게 해서 시현씨 같은 덜 떨어진 아들 어디 장가나 보낼 수 있겠어?”
“진짜요? 다정 차장님? 강남에 있는 아파트가 없는 건 이해하겠는데. 요즘 워낙 비싸니까. 시현씨 부모님은 그 나이 처먹도록 자기 집 한 채도 없다니. 충격이다 충격! 어머! 그 정도로 거지 집안이면 시현씨가 키 185cm에 조각미남이라도 어디 처녀는 고사하고 한 번 갔다 온 분 이랑도 결혼하기 힘들 텐데. 시현씨는 키도 작고 외모도 그냥 그렇잖아. 진짜 시현씨 어떡한대요? 장가는 다 갔네.”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하는 서유리와 더 신이 나서 호응하는 김미희 주임.
“진짜 어디 그 뿐인 줄 알아? 시현이 걔. 차도 없어서 회사에 지하철타고 다니더라. 요즘 세상에 남자가 차도 없어. 그게 말이나 돼? 부모님 잘 못 만나서 가난하고 못나게 태어났으면 자수성가라도 해야. 어디 저기 동남아시아 여자라도 하나 데리고 살 텐데. 남자가 직장도 중소기업에. 내가 시현씨 어머니면 속이 다 썩어 문드러졌겠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벌써부터 인생이 꽉 막혔네. 꽉 막혔어. 화장실 변기처럼.”
팀원들이 대놓고 유시현 걱정 질을 하기 시작하자 아영팀장도 은근슬쩍 끼어든다.
아무리 팀장이라도 한 명 다구리 치는 이런 뜻 깊은 자리에서 맞장구를 안 쳐주면 혼자만 따 당하기 쉽다.
“그렇지? 하긴. 시현씨. 일만 소처럼 많이 하지. 제대로 하는 일도 없더라. 원래 일이란 게 자기들 알다시피.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하나 똑 부러지게 하는 게 중요하잖아. 우리 서유리씨 봐. 일 하나 주면 시간은 좀 오래 걸려도 얼마나 똑 부러지게 잘 해. 내가 서유리씨는 진짜 믿고 맡긴다니까. 유리씨. 오늘 화장품 해외배송 주문시킨 거. 깔끔하게 잘 처리했어요. 비록 회사 업무는 아니지만. 우리 유리씨. 진짜 센스 쩔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니까.”
“아이. 팀장님. 사람 부끄럽게. 팀원들 다 있는 대서 그렇게 칭찬하시면 부끄럽잖아요. 그리고 팀장님. 팀장님 화장품 주문하면서 제 것도 하나 시켰는데. 샘플로 글쎄 샤넬 티슈를 준대요. 팀장님 샤넬 티슈. 생각만 해도 고급질 것 같지 않아요? 두 개 준다니까 우리 팀장님 것도 한 개. 제가 챙겨서 드릴게요.”
“어머, 이런 센스쟁이. 진짜.”
척척 죽이 잘 맞는 아영팀장과 서유리 사원이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앞으로 힘든 업무 있으면 전부 시현씨한테 몰아줘요. 유리씨 시키지 말고. 사람이 말이야. 오냐오냐 하니까. 업무가 하나도 안 늘어 진짜. 유리씨는 이미 업무능력 만랩인데. 일 좀 빡세게 해 봐야, 유리씨의 반에 반이라도 따라가지 않겠어요?”
처음에는 다른 팀원들에게서 왕따 당하기 싫어서 은근슬쩍 끼어들었던 유시현 돌려까기였는데, 이제는 아영팀장이 유시현 고로시(죽이기)를 주도하고 있다.
“영어 관련 업무는 전부 성현대리한테 넘기고. 자기들 힘들고 번잡한 업무는 전부 유시현한테 넘겨요. 여자들끼리 뭉쳐야 한남충 벌레 새끼들이 감히 기어오르지 못하지. 알았죠?”
“네. 팀장님! 역시 회사는 팀장님을 잘 만나야 한다니까!”
“평생 친언니처럼 따르면서 충성하겠습니다. 팀장님!”
“우리 팀장님. 진짜 카리스마 쩐다. 얼굴은 진짜 10대로 보이는 동안인데, 카리스마는 회장님포스.”
팀원들의 칭찬에 점점 더 기세등등해진 아영팀장.
갈수록 회사의 힘들고 어려운 업무들은 유시현에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개발사업부의 여자팀원들 다섯 명의 업무를 유시현 혼자 짊어질 정도가 되었다.
그렇기에.
아영 팀장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유시현 사원 혼자서 여자 팀원들들 대신해서 대부분의 힘들고 핵심적인 업무를 해쳐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 유시현 사원이 팀을 떠난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회사 상황이 안 좋은 삼종리서치에서 실적까지 나지 않는다면 개발사업부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부서가 될 것이고.
유능한 성현대리와 다시 영업부로 돌아가면 되는 동철 차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팀원들은.
직장을 잃은 한심한 백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녀가 역전된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 온 다른 여자들에 비해 능력이 압도적으로 딸리는 팀원들은.
남은 평생을 새로운 직장도 얻지 못한 채, 거리의 노숙자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 * * * *
비록 개발사업부 팀장은 김아영.
자신이었지만.
위태위태한 팀의 모든 걸 힘겹게 받치고 있던 팀의 핵심이자 주춧돌은 유시현이었다.
그런 유시현이 나가면........
과연 그녀들이.
아니 우리가 버텨 낼 수 있을까?
그 남자가. 우리를 대신 해 떠받들고 있던 그 많은 것들을?
* * *